[인터뷰]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 김민자 "한국 기막히게 발전…자랑스럽다"

기사등록 2015/08/11 16:46:59

최종수정 2016/12/28 15:26:40

【서울=뉴시스】임태훈 기자 = 50년대부터 활약했던 한국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김민자씨가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포포인트 바이쉐라톤 남산에서 뉴시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시스터즈의 아야기를 담은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이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한국을 찾은 김민자씨는 1950년대 미8군과 극장 무대에서 활동 했으며, 이후 미국에 진출해 '찰리 브라운'으로 빌보드 차트에도 오른 바 있다. 2015.08.11.   taehoonlim@newsis.com
【서울=뉴시스】임태훈 기자 = 50년대부터 활약했던 한국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김민자씨가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포포인트 바이쉐라톤 남산에서 뉴시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시스터즈의 아야기를 담은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이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한국을 찾은 김민자씨는 1950년대 미8군과 극장 무대에서 활동 했으며, 이후 미국에 진출해 '찰리 브라운'으로 빌보드 차트에도 오른 바 있다. 2015.08.11.  [email protected]
헝가리 거주…28년만에 한국 찾아
 "60년대 미국 활동으로 좀 더 나은 사람돼"
 "후배들, 목표 있으면 계속 나아가라"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1960년대 '비틀스' '롤링스톤스' 등 인기 대중음악 팀들이 대거 출연한 CBS TV '에드 설리번 쇼'. 한국의 갓 스물 넘은 처녀 셋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아리랑'을 부른다.

 이후 한복을 열어젖히니 안에 입고 있던 화려한 서양식 의복이 드러난다. 세 사람은 이후 유창한 영어로 인기 팝송인 '스와니(swanee)'를 능숙하게 부른다.   

 '김시스터즈'는  '소녀시대' '원더걸스' '투애니원(2NE1)' 등 한류 걸그룹의 원조격이다. 1950년대 미 8군 무대와 극장 무대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1959년 아시아 걸그룹으론 처음으로 60년대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해 인기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6·25 동란으로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에 위안이 됨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자랑거리가 됐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을 뿐 아니라 악기도 자유자재로 다뤘다.

 이들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과 당대 유명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인 김해송의 두 딸들(김숙자·김애자)과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활동명 김민자))로 구성됐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머물고 있는 김시스터즈 막내(세 자매의 나이 터울은 한 살씩이다) 김민자(74)가 28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13~18일)에 김시스터즈를 다룬 영화 '다방의 푸른 꿈'(감독 김대현)이 개막작으로 선정되면서 방한하게 됐다. 재즈 드럼 연주자이자 헝가리 출신 남편인 타미 빅과 내한, 두 사람은 함께 무대에도 오른다.

 공연에 앞서 서울 중구 호텔에서 머물고 있는 김민자를 만났다. '애드 설리번 쇼'에 나와 당대 팝스타들 부럽지 않은 노래·연주 실력을 뽐내던 열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비슷한 연배의 원로들이 사진 촬영을 어색해하는 것과 달리 젊은이들 못지 않은 다양한 포즈로 촬영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해외에 오래 살아 한국말이 서툴러 영어를 약간씩 섞어 사용했는데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발음은 분명했고 눈빛은 형형했다.  

 -한국에 얼마만에 오신 건가요?

 -미국에 진출한 이후 1970년도에 왔었어요(당시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기념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아버지(이봉룡)가 돌아가신 1987년에 잠깐 온 적이 있고요. 그 이후로는 처음입니다."  

 -그동안 한국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너무 놀랐어요. 미국 가기 전에 전쟁(6·25 동란)이 나 건물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없었죠. 제가 살던 곳이 필동인데 전쟁이 나 살던 큰 집도 다 없어졌죠. 근데 지금은 뉴욕처럼 높은 빌딩도 많이 생겼네요. 기가 막히게 좋아져 자랑스러워요."

 -미리 '다방의 푸른 꿈' 요약본을 봤는데 LA가 고향처럼 느껴진다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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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임태훈 기자 = 50년대부터 활약했던 한국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김민자씨가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포포인트 바이쉐라톤 남산에서 뉴시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시스터즈의 아야기를 담은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이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한국을 찾은 김민자씨는 1950년대 미8군과 극장 무대에서 활동 했으며, 이후 미국에 진출해 '찰리 브라운'으로 빌보드 차트에도 오른 바 있다. 2015.08.11.  [email protected]
 "남편이 축구를 좋아하는데 국제 게임을 할 때 한국하고 다른 나라가 붙으면 물론 한국을 응원해요. 수영 경기 할 때도 그렇고. 태어난 곳은 절대 잊을 수 없죠. 다만 LA와 라스베이거스에서 오래 살아서 좀 편안하긴 하죠."

 -미국 진출 당시 영어를 못했음에도 영어 노래를 기가 막히게 해 현지 기자가 놀란 사실도 있는데요. 초반에는 영어를 하지 못해 힘든 일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많았죠(웃음). 초반 돈이 없을 때였어요. 조그만 아파트에 셋이 같이 살았는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현관 문을 열어보니까 누가 샴푸 샘플을 두고 갔더라고요. 우리는 좋아서 막 썼는데 눈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 거예요. 세척액 같은 거였는데 글을 못 읽으니… 결국 병원에 갔죠(웃음). 뷔페를 처음 가봐서 한 접시 음식을 못 먹을 정도로 넘치게 담기도 하고 상점에서 산 모자의 가격표를 그대로 붙이고 길거리를 다니기도 하고…. 지금은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 때는 정말 창피했어요(웃음)."

 -'다방의 푸른 꿈'이 개봉되고  다시 한국에서 재조명되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영화는 아직 못 봤지만 영광이죠. 아직도 한국 분들이 저희를 생각하신다는 것이 반갑고 기뻐요. 그냥 행복하죠(웃음)."

 -맨 처음에 미국 가셨을 때 걱정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미국 군인들이 한국을 위해 많이 죽어서 한국에 대한 선입견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죠. 근데 라스베이거스에서 첫 번 째 공연을 끝냈는데 다들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한국에서 너희들 봤는데 여기까지 와서 공연하니 자랑스럽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아시아 그룹으로는 처음 성공한 것인데 정말 행운이 따른 거죠."

 -'애드 설리반 쇼'에 계속해서 출연하셨는데 매번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타, 벤조, 트럼펫, 콘트라 베이스 등 셀 수 없을 만큼 새로운 악기를 계속 연주하시더라고요.  

 "제가 드럼치고 숙자 언니와 애자 언니가 기타를 치곤 했죠. 다 미국에서 배운 악기죠. 트럼펫도 불고 플루트도 불고. (진행자인) 애드 설리번이 아이리시 사람이라 (아이리시 관악기인) 백파이프를 열심히 배워 불었더니 너무 좋아했어요. 우리 뒤로 30명이 함께 백파이프를 부는 모습은 장관이었죠.

 -악기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우신 거예요.

 "타고 났나 봐요(웃음). 아무래도 음악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근데 굉장히 연습을 많이 했어요. 매일 몇시간씩 일주일 동안 정말 많이 연습했어요."

 -미국 가기 전 미8군에서 공연했을 때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슬픈 이야기가 많아요.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들이지만요(웃음). 공연하면 군인들이 돈 대신 위스키 박스를 줬어요. 그걸 팔아서 돈을 마련했죠. 하루는 그 박스가 너무 무거워서 할머니가 도와주셨는데 그만 박스를 놓쳐서 위스키 병이 깨진 거예요. 그게 돈이니 할머니가 다쳤는지 여부보다 위스키 병을 더 걱정하기도 했죠."

 -이난영 선생님은 민자 선생님의 고모이신데 친 딸 두 분보다 선생님이 더 닮으셨어요(웃음). 한국 원조 대중음악 여가수인데 어떤 분이셨나요?  

 "맞아요. 제가 친딸인 줄로 아는 분들이 많았죠(웃음). 음악적인 것 외에도 정말 재주가 많은 분이셨죠."

 -김애자 선생님은 87년 암으로 사망하셨어요. 많이 보고싶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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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임태훈 기자 = 50년대부터 활약했던 한국 최초의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김민자씨가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동자동 포포인트 바이쉐라톤 남산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시스터즈의 아야기를 담은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이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한국을 찾은 김민자씨는 1950년대 미8군과 극장 무대에서 활동 했으며, 이후 미국에 진출해 '찰리 브라운'으로 빌보드 차트에도 오른 바 있다. 2015.08.11.  [email protected]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서 마음이 아파요. 참 밝고 항상 마음이 열려 있고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저라면 못했을 일을 먼저 당당히 해냈고, 무서움이 없는 사람이었죠.

 -김숙자 선생님은 미국에 계시죠? 자주 연락을 하시나요?

 "팀 활동을 그만두고 연락을 못 한지 꽤 오래 됐죠. 보고 싶네요."

 -당시 김시스터즈 이후 김치 캣 같은 한국 걸그룹은 물론 일본에서도 비슷한 콘셉트의 걸그룹들이 미국에 계속 진출했는데요, 그래도 김시스터즈의 인기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가장 원조니까요(웃음). 뒤로 온 그룹들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원조라는 걸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드러머인 토미 빅 씨는 라스베이거스 호텔에서 각자 공연하다가 만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67년 결혼 이후 지금까지 알콩달콩 정겹게 살아가시는 것이 보기 좋아요.  

 "저의 남편이 이해가 많아요. 저는 어려서 한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말다툼을 해도 여자라서 조용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 남편은 무엇이 문제인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라고 제안하죠(웃음). 무슨 일이 있어도 토론을 하자는 거예요. 참 존경하는 사람이에요. 한국문화에 대해서도 융통성 있게 배려해주죠. 우리는 참 행복합니다(웃음)."

 -헝가리에서 여전히 음악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압니다. 공연 초청 무대도 종종 있다고요. 앨범 제작도 하시나요?  

 "네. 남편이 앨범 제작을 하고 작곡도 하고 연주도 하니까요. 헝가리에서 굉장히 유명한 시인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서 만든 노래가 있는데 굉장히 감성적이고 현지 정서와 잘 맞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죠."

 -미국에서 활동하신 때를 돌아보시면 지금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요?  

 "개인으로는 정말 큰 행운이고 굉장히 큰 혜택이었죠. 무엇보다 세계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저의 여러가지 면을 알게 됐죠. 그래서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여성 듀오 '미미 시스터즈'(큰 미미·작은 미미)와 보컬그룹 '바버렛츠'(안신애·김은혜·박소희)가 선생님 오신 것을 기념해 16일 오후 7시 서울 홍대 앞 곱창전골에서 '미미시스터즈 & 바버렛츠 헌정 콘서트 - 기쁘다, 민자 언니 오셨네'를 열어요(김민자는 이날 공연을 직접 관람하고 무대 위에서 인사도 할 예정이다). 두 팀을 만나보셨나요?

 "미미시스터즈가 공항에 마중나왔더라고요. 참 재미있는 친구들이에요. 바버렛츠는 아직 못 만났는데 만나보고 싶어요.(웃음)"

 -두 팀은 여성 걸그룹으로 정체성과 앞으로의 활동을 고민하며 김시스터즈를 롤모델로 삼고 있죠. 아마 다른 아이돌 그룹들에게도 김시스터의 활동은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을까요?   

 "제 경험을 반영해서 말하자면,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계속 나아가라는 거예요. 목적과 야망과 재주가 있으면 계속 노력하라는 거죠. 그러면 누구나 성공할 거라고 단언하기는 힘들죠. 하지만 그 같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게 되죠. 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창의력과 아이디어. 그것이 있으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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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 김민자 "한국 기막히게 발전…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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