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119주기④]뉴욕 타임스의 대특종과 대오보

기사등록 2014/10/10 13:31:08

최종수정 2016/12/28 13:29:36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뉴욕 타임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기록을 갖고 있다. 1895년 황후 시해 사실을 사건발생 사흘 뒤인 10월11일 미 언론 최초로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을미사변이 벌어진 10월8일에도 ‘왕의 아버지 대원군, 무장세력 이끌고 궁궐 들어가, 왕비의 생명 위협’이라는 뉴스를 송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뉴욕 타임스는 1882년 8월18일엔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대오보를 하기도 했다. 사진은 1894년 12월3일 뉴욕 이브닝 월드의 명성황후 삽화. 2014.10.09. <사진=뉴욕 이브닝 월드/미의회도서관>   robin@newsis.com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뉴욕 타임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기록을 갖고 있다. 1895년 황후 시해 사실을 사건발생 사흘 뒤인 10월11일 미 언론 최초로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을미사변이 벌어진 10월8일에도 ‘왕의 아버지 대원군, 무장세력 이끌고 궁궐 들어가, 왕비의 생명 위협’이라는 뉴스를 송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뉴욕 타임스는 1882년 8월18일엔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대오보를 하기도 했다. 사진은 1894년 12월3일 뉴욕 이브닝 월드의 명성황후 삽화. 2014.10.09. <사진=뉴욕 이브닝 월드/미의회도서관>  [email protected]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첫날 기사 송고…1882년엔 명성황후 피살 오보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명성황후의 시해는 저물어가는 19세기 세계 최대의 사건이었다. 전시도 아닌 평시에 외국(일본)이 남의 나라 궁궐을 부수고 들어가 직접 살해했다는 점에서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만행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죽음의 과정을 증언한 여러 보고서는 차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잔인함의 극치였지만 ‘칼로 살해해 시신에 석유를 부어 불태웠다’는 당시 언론 보도만으로도 세계는 경악했다. 120년 전 세계 모든 유력 언론은 물론, 작은 도시의 마이너 매체에 이르기까지 조선 황후의 시해사건에 대한 속보를 끊임없이 만들어낸 이유다.

 그중에서도 뉴욕 타임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기록을 갖고 있다. 이번 시리즈 1회에서 언급한 것처럼 뉴욕 타임스는 1895년 10월12일자로 시해 사실을 보도했다. 송고일 10월11일은 명성황후 시해 사흘만의 일이었다. 며칠씩 걸리는 전보에 의존하거나 국제 증기선에 실린 현지 신문을 통해 몇 달 뒤에 소식을 접하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언론치고는 전광석화같은 보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건 당일에도 관련 기사를 뉴욕 타임스가 송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1895년 10월8일 뉴욕 타임스는 일본 요코하마 발로 ‘한국의 반개혁 폭도들’ 이라는 짧은 기사를 긴급 타전한다.  

 뉴요커들이 10월9일 보게 된 이 기사는 작은 제목으로 ‘왕의 아버지 대원군, 무장세력 이끌고 궁궐 들어가, 왕비의 생명 위협’이 달려 있었다. 내용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 있는 기자가 알려왔다. 왕의 아버지이자 반개혁파 지도자인 대원군이 무장세력을 이끌고 왕궁에 난입했다. 왕비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다”는 한 문장에 불과했지만 이른바 ‘을미사변’이 일어났으며 왕비 신상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팩트’를 정확히 보도한 것이었다.

 일본의 낭인배들이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우는 바람에 한동안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날의 1보는 사실상 뉴욕 타임스의 대특종이라고 볼 수 있다.

 ▲ ‘고종과 명성황후 피살’ 뉴욕타임스의 대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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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뉴욕 타임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기록을 갖고 있다. 1895년 황후 시해 사실을 사건발생 사흘 뒤인 10월11일 미 언론 최초로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을미사변이 벌어진 10월8일에도 ‘왕의 아버지 대원군, 무장세력 이끌고 궁궐 들어가, 왕비의 생명 위협’이라는 뉴스를 송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뉴욕 타임스는 1882년 8월18일엔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대오보를 하기도 했다. 사진은 을미사변 당일에 송고돼 이튿날 게재된 뉴욕 타임스의 특종 기사. 2014.10.09. <사진=뉴욕 타임스 DB>  [email protected]
 흥미로운 것은 뉴욕 타임스가 명성황후와 고종이 시해됐다는 엄청난 오보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을미시해가 일어나기 13년 전인 1882년 8월18일 런던의 한 신문을 인용한 보도였다. 다음은 기사 전문.

 “런던에서 8월17일 수신된 팰맬 가제트에 따르면 조선에서 전면적인 반란 사태가 일어나 왕과 왕비가 살해됐다. 일본 공사관은 반외국파들과 관련된 조선인들의 공격으로 불에 탔다. 일본 군인들이 서울의 한강에 급파됐다. 프레스 어소시에이션 기자에 따르면 조선의 반란은 공식 확인됐으며, 사망자 가운데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장교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1866년 15살의 나이에 왕비로 간택된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섭정을 저지하기 위해 1873년부터 반대 세력을 규합,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대원군을 축출한 후 민씨 척족과 개화파를 대거 중용했지만 이에 반발하는 세력과 권력 암투가 계속됐다.

 1882년 7월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 교관이 살해됐다. 이때 명성황후는 죽음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난다. 대원군의 밀명을 받은 난군이 궐내로 난입, 자신을 찾아 나서자 궁녀의 옷으로 갈아 입고 무예별감 홍계훈의 도움을 얻어 피신한 것이다.

 이 같은 오보는 명성황후가 그해 여름 50여일 간 도피한 사이 국상이 선포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 국상이었지만 궁궐 피습 등 극도의 혼란 속에 고종까지 죽은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영국 매체를 인용했다가 뉴욕 타임스까지 덩달아 오보를 한 셈이다.

 명성황후가 보란 듯 생환하고 대원군과의 권력 암투가 계속되면서 뉴욕 타임스는 그녀를 더욱 주목하게 된다. 1889년 6월4일 ‘왕비는 허수아비가 아니다’라는 기사에서 “왕비는 조선의 가장 힘센 권력층의 하나이고 왕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공공연히 전달한다. 궁안에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다”고 전했다.

 명성황후가 애연가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왕비는 한복을 입고 아름다운 다이아가 달린 비단옷을 입는다. 역시 다이아가 박힌 허리띠 장식을 하고 미국산 담배를 즐겨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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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뉴욕 타임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기록을 갖고 있다. 1895년 황후 시해 사실을 사건발생 사흘 뒤인 10월11일 미 언론 최초로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을미사변이 벌어진 10월8일에도 ‘왕의 아버지 대원군, 무장세력 이끌고 궁궐 들어가, 왕비의 생명 위협’이라는 뉴스를 송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뉴욕 타임스는 1882년 8월18일엔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대오보를 하기도 했다. 2014.10.09. <사진=뉴욕 타임스 DB>  [email protected]
 비록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그녀를 싫어 하는 백성들도 있었지만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이 앞장선 무뢰배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됐다는 사실에 조선의 민심은 들끓었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기치 하에 의병의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백범 김구(1876∼1949)가 20살 때 한 일본인을 척살한 것도, 만주 하얼빈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해 세계를 놀라게 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쾌거도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배경이 있었다. 명성황후는 살아서 청일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죽어서 동북아의 역사를 바꾼 존재였다.

 ▲ ‘러시아 킬러’ 헤트로바, 일본 긴장   

 1896년 1월23일 샌프란시스코 콜은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한다.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한 러시아인 킬러 때문에 일본이 바짝 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디트로이트 출신 유지 F H 클라크 박사의 증언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직접 듣고 전한 스토리였다.

 ‘음모자 헤트로바(Hetrova, The Intriguer)’라는 기사는 클라크 박사의 삽화를 곁들인 가운데 “킬러이자 외교관인 러시아인은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몇 건의 살인 등 여러 나라의 사건들과 관련 있다. 그는 왕비의 죽음 이후 지금 일본에서 몇 가지 의문의 목적을 갖고 체류하고 있다”고 전했다. 위험 인물인 그를 일본 형사들이 뒤쫒도록 러시아가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이다.

 클라크 박사는 “그가 요코하마 시내에 나가면 일본 형사들이 앞에 두 명, 뒤에 두 명이 따라붙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전쟁의 빌미를 주는 일이 그로 인해 발생할 것을 두려워 했다. 그의 이름은 헤트로바이고 불가리아 등 많은 지역의 살인에 얽혀 있다. 헤트로바는 한국의 정치 혁명에 영향을 주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명성황후 시해 2년 뒤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난 것을 고려하면 러시아가 일본과의 파워게 임을 위해 복잡한 정치·외교적 음모에 관여했을 개연성이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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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뉴욕 타임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기록을 갖고 있다. 1895년 황후 시해 사실을 사건발생 사흘 뒤인 10월11일 미 언론 최초로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을미사변이 벌어진 10월8일에도 ‘왕의 아버지 대원군, 무장세력 이끌고 궁궐 들어가, 왕비의 생명 위협’이라는 뉴스를 송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뉴욕 타임스는 1882년 8월18일엔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대오보를 하기도 했다. 한편 1896년 1월23일 샌프란시스코 콜은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한 러시아인 킬러가 일본을 긴장시키고 있다고 보도해 시선을 끌었다. 사진은 샌프란시스코 콜의 보도. 2014.10.09. <사진=미 의회도서관 DB>  [email protected]
 당시 헤트로바는 189㎝의 신장에 몸무게가 약 120㎏이나 되는 거구로 묘사됐다.

 한편 클라크 박사는 “미국에선 믿지 않지만 조선 왕비는 확실히 죽었다. 조선에 가서 사실을 확인한 도쿄 주재 미국 공사 스테픈 보우살로부터 들은 것이다. 궁궐이 피습됐을 때 네 명의 여성이 있었는데 왕비를 포함해 3명이 죽었고 다른 한 명은 기어서 빠져나왔다”고 전했다.

 그는 “조선의 왕은 다시 그녀에게 왕비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녀는 대단한 여성이었다. 정치 외교는 물론, 막후 조종에도 능했지만 결국 생명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 명성황후 시해범, 일본서 피살

 1904년 3월24일 노스다코다의 윌리스톤 그래픽지가 ‘시해범 피살’이라는 기사를 올려 독자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했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의 얼굴을 모르는 일본 낭인배들을 위해 궁궐에서 인도한 우범선이 피살된 사건이었다.

 우범선은 당시 훈련대 군인 동원의 책임자로 명성황후의 소각된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듬해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친일 김홍집 내각이 몰락하자 일본으로 피신했다.

 도쿄에서 망명 생활을 한 그는 암살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이름과 신분을 감추고 살았으나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조선의 열혈청년들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보도에선 조선에서 온 두 명의 남성이 우범선을 살해했으나 무려 5개월이 지나서야 알려졌다고 전한다. 이 사건이 조선의 정세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일본이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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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뉴욕 타임스는 명성황후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기록을 갖고 있다. 1895년 황후 시해 사실을 사건발생 사흘 뒤인 10월11일 미 언론 최초로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을미사변이 벌어진 10월8일에도 ‘왕의 아버지 대원군, 무장세력 이끌고 궁궐 들어가, 왕비의 생명 위협’이라는 뉴스를 송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뉴욕 타임스는 1882년 8월18일엔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대오보를 하기도 했다. 한편 1904년 3월24일 노스다코다의 윌리스톤 그래픽(사진)은 ‘시해범 피살’이라는 기사를 올려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2014.10.09. <사진=미의회도서관 DB>  [email protected]
 우범선이 일본으로 피신한 후 조선은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시해 가담이 정치적 행위이기때문에 인도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래서 일단의 조선인들이 우범선 처단을 맹세하게 된 것이다.

 앞서 밝힌대로 우범선은 정체를 감춘 채 은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없었다. 1903년 10월 어느날 두 사람이 우범선의 집에 찾아왔다. 그들은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일본에서 공부하며 여행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범선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하지 않았고 함께 술을 먹고 카드게임도 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친하게 되었고 3∼4일을 우범선의 집에서 머물렀다. 

 10월25일 저녁, 술을 먹으며 우범선과 대화하던 한 사람이 갑자기 칼을 빼내 찔렀다. 다른 한 사람은 철퇴로 머리를 가격했다. 우범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신문에 따르면 칼로 찌른 사람은 고영근이었고, 철퇴를 휘두른 사람은 노원명이었다.

 “이들은 살인 혐의로 수감됐으며 주머니 안에선 ‘왕비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일본에 가는 것이 위임됐다”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이들에게 엄한 처벌을 내릴 것으로 믿지 않고 있다.”

 실제로 고영근은 만민공동회 사건 등으로 조선에 돌아갈 경우 체포될 수 있었으나 ‘국모 시해범’을 처단한 공적으로 고종은 그의 죄를 사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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