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칼럼]백일법문⑧ 중관파와 삼론종에서 말하는 중도

기사등록 2014/09/18 15:05:36

최종수정 2016/12/28 13:22:58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생활선’ <143>  중관파의 시조 용수(龍樹)보살은 ‘중론(中論)’의 귀경게(歸敬偈)에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去)’라고 했다. 이것은 열반(涅槃)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열반은 원래 생(生)하는 것도 멸(滅)하는 것도 아니므로 어떠한 자성(自性)이 있지 않은 공(空)임을 표명한 것이다.    공(空)은 단순히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도 아니고 도피와 체념에 사로잡힌 회의주의도 아니며 결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무(無)도 아니다. 공사상의 근저는 어디까지나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연기해 생겨나는 일체의 법은 고유한 본성 즉 고정적인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고 설한 것이다. ‘여러 인연으로 생한 법(衆因緣生法)이 곧 공(空)이며 가명(假名)이며 중도(中道)’이다.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생과 멸(滅)의 양변을 여의였다는 뜻이다. 이 생·멸(生滅)과 단·상(斷常)과 일·이(一異)와 래·거(來去)의 양변을 여읜 것이 중도다. 그러므로 중도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생·멸·단·상·일·이·래·거의 여덟 가지를 여읜 팔불(八不)과 관련해 불생불멸 등의 표현이 나오면 그것이 곧 중도다. 팔불은 단순히 중도를 표방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 중도 불성을 의미한다. 중도 사상은 중도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인의 이상적 목표이자 인류의 지극한 선(善)의 상징인 불성까지 갖춘다.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衆因緣生法)’이란 일체제법이 연기해 생함을 말한다. 이 연기법은 그 본성이 무(無), 즉 공한데 아주 아무것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분명히 연기하고 있으므로 가(假)인 것이다. 연기를 하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연기를 하는 것은 공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非空非假) 동시에 공이고 거짓(亦空亦假)이니 이것이 곧 중도다. 즉 모든 연기의 내용은 공(空)이지만 가(假)와 중(中)이 모두 내포돼 분리돼 있지 않고 전부 원융해 있다.    반야바라밀이란 일체 제법이 실로 깨뜨릴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어서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 항상 머물러 있는 모든 법의 모습(법상 法相)이며 법의 자리(법위 法位)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일체만법을 통합해 말하는 것으로 그 내용은 중도연기를 근본으로 삼는 진여법계며 상주법계다. 반야바라밀이란 정법(正法)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반드시 단견과 상견의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상(常)과 무상(無常) 내지 세간과 출세간 등의 모든 상대적인 두 법은 다 변견이며 이 양 변견을 여읜 중도가 반야바라밀이다. 참으로 양변을 여의고 양변을 완전히 융화하는 쌍차쌍조한 중도를 행하는 것이 실지의 반야바라밀이고 불교의 정법이다.    육정(六情)이란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근(六根)을 말한다. 육진(六塵)은 이 육정에 상대되는 물질·소리·향기·맛·감촉·법의 여섯 가지 대상이다. 눈에는 물질이 보인다는 식으로 전부 상대가 있는 것으로 모두 여의어야 한다. 언제 무엇이든지 간에 집착하는 마음은 변견으로서 똑같이 병이다. 무엇이든 간에 완전히 변견을 버려야만 참으로 원융무애한 중도 정견을 성취할 수 있다. 바른 도는 착한 행동을 잘한다는 말이 아니고 양변의 변견을 완전히 버린다는 것으로 이것이 반야바라밀이고 중도다. 결국, 참으로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려면 이 반야바라밀에 대한 집착까지도 버려야 한다.    삼론종의 교리는 기본적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지향한다. 파사란 외도와 소승 등 범부의 망정(妄情)을 깨뜨려 언어가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이르지 못하는 도(무명도: 無名道)를 체달함이며 현정이란 무애한 바른 관찰인 중도실상을 득오(得悟)함이다. 이는 바로 망정을 깨뜨려 무소득의 진공을 얻는 것이니 파사의 구경(끝)이 곧 현정이다. 그러므로 삼론종에서는 파사 외에 따로 현정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파사가 그대로 현정이라고 한다.    중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행하는 도요, 이 중에 입각한 관(觀)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능히 관하는 마음이다.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이 이 중관(中觀)에서 마음을 깨쳤다. 이 근본 골자인 중을 떠나서는 삼세시방의 제불보살의 불법이 있을 수 없고 이 중도를 의지해야만 정관(正觀)을 이를 수가 있다. 중도를 깨치고 중도에 입각해서 정관을 가지고 설법을 하던 무엇을 하던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곧 변견(邊見)에 떨어지고 만다.    이제란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말한다. 세제는 세간 사람들이 진리에 전도돼 세상의 모든 것을 항존하는 유(有)라고 집착하는 것이고 제일의제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전도를 떠나 일체법이 공(空)·무(無)하다고 자각한 올바른 진리를 말한다. 중론의 골자는 유무(有無)든지 진속(眞俗)이든지 모든 이제를 회통하여 원융무애하게 하는 데 있다.    삼론종에서 불교를 논의할 때 중(中)이라는 것을 떠나서는 불교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삼론종에서는 일체 불교가 중(中)에서 파생됐고 중에 총섭(總攝)돼 있으므로 불교를 알려면 중을 알아야지 중(中)을 모르고서는 불교를 바로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삼론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교의 각 종파가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중은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불교교리의 근본 골자이다.  ※ 이 글은 ‘백일법문 (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1992)을 정리한 불교닷컴의 ‘뜻으로 간추린 백일법문’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풀었다.  hadogyeom.kr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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