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칼럼]고 정재훈 문화재관리국 국장

기사등록 2014/08/20 13:46:20

최종수정 2016/12/28 13:14:42

【서울=뉴시스】 하도겸 박사의 ‘문화예술 산책’ <15>

 오래전 문화유산채널(www.k-heritage.tv)은 고 정재훈(鄭在鑂) 전 문화재관리국장의 인터뷰를 통해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의 건립과 1970년대 초 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경주관광종합개발’을 조망하는 등 2부작으로 소개한 바 있다. 1960~70년대 초창기 문화재 행정 등 문화재 행정 발전사와 전통 조경 정착에 앞장선 정재훈 교수는 문화재청 50주년의 산증인으로 문화재 행정을 이끌어 온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문화재청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재관리국은 1961년 10월 2일에 발족했다. 구 황실사무총국으로 청와대에 붙어있던 이승만 대통령 직속기관이었다. 일제 강점시기에 일본은 임진왜란 때 소서행정이나 가등청경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만든 왜성 등을 다 사적으로 지정했다. 정작 우리나라 명량해전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이나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과 관련된 장소는 지정하지 않았다. 이런 식민사관 등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때는 쉽지 않았다. 문헌하는 분들이 민족사를 제대로 다시 쓸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고고학 발굴이 필요한 시기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429억 들던 시절, 288억이나 투입해 천마총과 안압지를 발굴한 박정희 대통령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일개 사무관인 정재훈 교수를 불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장관이라도 대통령을 바로 만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이후로도 재정을 맡았던 재무부 이재국장과 문화재를 책임진 정재훈 문화재관리국장은 수시로 독대(獨對)가 가능했다.

 박 대통령은 전략적으로 울산에 공업단지를, 포항에 제철단지를 넣고 바이어가 오면 그 가운데인 경주에 자게 했다. 자연스럽게 바이어들은 천년이전 신라의 제철공업 현장인 황남대총에서만 3천 점이 넘는 칼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많은 칼을 오래 세월 만들어낸 우리 제철에 대한 신뢰가 저절로 생기게 되는 장면이었다. 황남대총, 안압지 발굴에서 나온 자료로 제일 먼저 일본에 간 것이 ‘한국 미술 5천년사’다. 일본보다 유구한 역사를 보여주고 그걸 전 세계에 순회시킨 것도 일본에 한국의 자존심을 보여주고 세계의 한국인식에도 크게 공헌했다.

 냉전 시대의 독재자라고도 불리기도 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은 경제뿐만 문화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이러한 족적에 1970년대 초 경주 개발 계획안을 짰던 정재훈 전 문화재관리국장의 공훈도 대단했다. 1971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신라 고도의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연의 감이 살아나도록 개발할 것’이라며 경주 종합개발계획을 지시했던 것을 생전에 자주 술회했다. 1973년 7월 천마총에서 금관이 출토되자마자 곧장 호송차에 실어 청와대 집무실 앞에 진열하고 브리핑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가 경제발전을 하려면 일본과 관계 개선이 불가피한데 그에 앞서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할 것이 정신적인 의식이다. 국민이 우리 문화와 역사 유산의 우수성을 잘 알아야 한다. 또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적 교훈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이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선 것도 역사적 교훈을 살리기 위함이었다고 정 전국장은 자주 전했다.

 1986년 10월 문화재관리국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정국장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하고 일본 국화의 놀이공원으로 만들어버린 일본 잔재를 뿌리 뽑고 본래 우리의 창경궁으로 회복시키는 데 앞장섰다. 조경전문가들의 조언을 청취해 창경궁에 있던 왜식 조경을 뜯어고치고 정원에는 소나무, 대나무, 살구나무, 버드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등 한국의 대표 나무(수종)로 채웠다. 문화재청의 산파역이기도 한 정 국장의 얼은 창경궁들의 나무와 함께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유족 가운데 미망인도 별세했다. 네팔 담푸스 봉사에 참여했던 장남인 정상호 현영건설 이사는 8월 14일 11시 방송된 SBS ‘생활경제’에서 “자원봉사란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했다. “평생 자나 깨나 문화재 얘기를 하시며 우리 문화재 사랑을 실천했던 아버님의 모습이 그립다”며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우리의 위상을 살리기 위해 봉사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회상하는 그에게서 정 교수의 자상한 아버지상이 보인다. 목아박물관의 박찬수 관장도 “정재훈 국장님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우리 문화재가 세계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문화재인들은 그에게 큰 빚을 졌다”고 전했다. 한국 문화재 정책의 근간을 마련하고 1970년대 경주관광개발계획을 주도한 정재훈 전 문화재관리국장은 73세로 2011년 8월 29일 암과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이제 며칠 있으면 3주기가 된다. 문화재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깊이 고인을 추모할 것이다.

 ※ 1938년 3월 3일 경남 진주 출신은 정재훈 국장은 진주사범학교를 나와 단국대에서 지금의 경영학과 같은 상학을 전공하고 한양대 환경과학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주사적관리사무소 소장, 1975년 문공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1과장, 1978년 국립중앙박물관 보급과 과장, 1979년 문공부 해외공보관 문화지원과 과장, 1980년 문공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3과 과장, 1981년 문공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2과 과장, 1983년 문공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기획관, 1986년 문공부 문화재관리국 국장, 1993년 문화체육부 생활문화국 국장,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사무국 국장, 1996년 국립중앙박물관 사무국장, 1996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굴조사사업단 단장을 역임한 문화재 역사의 산증인이다. 이외에도 조경학회 상임이사, 국제관광공사 훈련원 강사, 한양대 강사, 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체육부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자문위원회 위원, 문화체육부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사적) 위원,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조경학과 석좌교수, 문화재청 국보지정분과 문화재위원, 문화재경관분과위원장 등을 겸직한 바 있다. 저서로는 1990년 백제문화의 유적과 유물, 한국의 미 14(궁실.민가 한국건축에 있어서의 조원), 안압지 조경학적 고찰, 아름다운 정원, 한국의 옛조경, 보길도 부용동 원림, 북한의 문화유산 I, II를 내기 시작하여, 1996년 전통의 원, 1997년 선덕여왕(시 : 문예대상작품), 2000년 소쇄원, 2000년 나의 길, 나의 인생(약식회고록)을 냈다. 이처럼 문화유산 보호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대통령표창(경주발굴사업), 1983년 근정포장, 1992년 홍조근정훈장, 2005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사진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목아박물관(관장 박찬수)에 고 정재훈 국장이 식수한 반송이다.

 [email protected] hadogyeo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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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겸 칼럼]고 정재훈 문화재관리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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