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대보증을?…" 서류 위조 피해 호소 잇따라 '입증 막막'
"재개발 무산되어도 피해 없다"…'매몰비용'에 직원 월급 포함하기도
【서울=뉴시스】김지훈 기자 = "재개발 추진위원회를 발족하던 날 구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필요하다기에 나눠준 종이에 이름과 주소를 쓰고 도장을 찍어준 것밖에 없는데 나도 모르게 연대보증인이 돼 있더라고…"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사는 염모(82)씨는 최근 재산증명서를 떼러 갔다가 'D건설'로부터 자신의 재산이 가압류된 사실을 알게 됐다.
앞서 지난 2006년 3월께 '추진위원회 설립에 필요하다'는 말만 믿고 '백지'에 이름과 주소 위에 도장을 찍은 김씨는 자신도 모르게 재개발 추진위원회의 연대보증인이 돼 있었다.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10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재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던 건설사와 컨설팅사들이 추진위원회를 상대로 한 '매몰비용' 청구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소송이 길어질 것을 대비해 '서류상' 연대보증인들에 대한 가압류 조치도 빼먹지 않는다.
문제는 추진위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연대보증인이 본인 동의 없이 임의로 지정됐다는 논란이 곳곳에서 일면서 이에 따른 주민 간 소송전까지 벌어지고 있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이모(69)씨 등 9명은 지난 7월 같은 동네에 사는 김모(57)씨를 사문서위조 혐의로 서울동부지검에 고소했다. 대부분 60~70대인 이들은 김씨가 자신들에게 "구청에 제출할 민원서류다. 서명하라"고 해놓고는 이를 연대보증 '확약서'로 위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뜻하지 않게 '중곡2동 재개발 추진위원회'의 연대보증인이 된 이들은 추진위원회가 끝내 설립 승인을 받지 못하자 컨설팅 회사가 낸 3억9000만원대 비용상환청구소송의 공동피고가 됐다.
추진위원회에게 지난 2006년부터 사무실 임대료와 업무추진비 등을 지원했던 'K용역'은 소송에서 자신들이 채용한 직원 2명의 임금 8600여만원까지 갚을 것을 요구한 상태다.
막연하게 재개발을 추진한다는 얘기만 믿고 협조했다가 수억원을 물어줘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이들은 연대보증 확약서가 위조됐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고소장을 접수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사건을 맡은 광진경찰서에서는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있어 답답함은 커지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1구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2006년 "추진위원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이 필요하다"는 말에 도장을 내어준 60~70대 노인 13명은 지난달 D건설로부터 1명당 적게는 4500만원부터 많게는 1억7000만원까지 재산을 가압류당했다.
이 구역은 지난 2006년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2009년 9월 재개발 조합이 설립되는 등 재개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재개발에 반대하는 일부 주민이 '추진위원회 때 D건설 컨소시엄과 맺은 계약은 위법하다'며 무효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D건설은 곧바로 투자금 회수 작업에 들어갔다. 가계약을 맺은 지난 2006년 10월부터 추진위원회가 쓴 28억원 중 자신들이 투자한 13억7400여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연대보증인들의 재산을 가압류해버린 것이다.
자신의 재산을 가압류 당한 진모(73)씨는 "구청에 추진위원회 결성보고를 해야 한다고 해서 도장을 찍어준 것뿐인데 연대보증인이 돼 버렸다"며 "확약서가 위조된 게 확실한데도 법적으로 구제받을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H건설사와 가계약을 체결했던 서울 광진구 자양동 주민들도 속을 끓이고 있다. 지난 2011년 10월 정비구역으로 지정됐으나 지난해 2013년 10월 구역이 해제되면서 주민 10여명이 건설사로부터 2억원대 소송과 더불어 1명당 4000만원의 재산을 가압류 당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 추진위원회 대의원 자격으로 H건설사와의 모임에 참석해 식사를 하던 이들은 "재개발사업이 무산되어도 금전적인 피해는 없으니까 안심하라"는 시공사 관계자의 말에 공사도급계약서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H건설은 2009년 상반기에 '자양동 광신마을 재건축추진위원회' 사무실을 일방적으로 폐쇄하고 관련 서류를 모두 챙겨가버렸다. 그리고는 연대보증인들에게 민사소송을 걸고 이들의 재산을 가압류했다.
서울의 한 법무법인 관계자는 "재개발 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시공사들이 추진위원회를 상대로 매몰비용 상환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특히 상대적으로 경제·법률적 지식이 얕은 노인들이 연대보증 등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연대보증 관련 갈등의 경우 법률적으로 위조 등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며 "주민을 상대로 한 시공사들의 소송 남발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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