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남산 산책로의 토끼. 사람들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풀을 뜯고 있다.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삶이야기 禪이야기’ <66>
옆의 두 도반이 얘기하는 걸 봅니다. ‘이거 같이 해 볼까요?’ 라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은 안 하고 ‘언제 하면 되죠?’라고 되묻는 걸 봅니다. 이해관계로 보면 참 일 빨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리 관계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답에 ‘하고 싶다’는 긍정적인 표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기는 하지만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뉘앙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얼굴이 밝지 않으니, 뭐가 진짜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일은 그냥 하는 게 다가 아닙니다. 하는 과정에서 서로 교류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니 정말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 아니면 왜 아닌지도 알려줘야 합니다. 오래된 대화를 상실한 부부도 아니고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요.” 또는 “아 그거 정말 하고 싶어요”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동의와 공감을 이끄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좋은 거 아닌가 싶습니다.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인 아티샤 존자는 최상의 정신적 친구는 감추어진 잘못을 공격하는 사람이고 최상의 가르침은 감추어진 결함을 정통으로 지적해 주는 사람이며 그가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이걸 알면 재가 출가자를 떠나서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남들이 아는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서 자기 잘못을 지적한다고 화내는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한 도반이 가끔 친구한테 연락해서 “너도 살만하니까 이제 기부금도 내고 시간 내서 재능기부도 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NGO 등에 기부금을 내는데 그치지 않고 재능기부를 하는 분들이 많아집니다. 얼마 전 NGO 나마스떼코리아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역사이야기’에 강연을 맡아준 국방부, 외교부, 국회, 문화재청 등의 공무원들을 비롯해 PD, 교수, 건축가 등 대다수가 재능기부를 해주서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던 어떤 한 분이 어쩌다 “위선 아닌가?”라고 농담조로 웃으며 말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옆에서 듣다가 걸림 없이 오히려 “그런가요? 그렇게 보이던가요?‘라며 웃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행동이 가식이나 위선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도 숭고한 사람은 없고 숭고한 행만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시간 내서 재능 기부한 사람을 비뚤어진 눈으로 보는 것은 농담이라도 바르지 못한 듯합니다. 재능기부를 하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올바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휴식도 해야 하는 주말에 가족들까지도 뿌리치고 나오는 그런 재능기부를 부탁해도 흔쾌히 허락하며 오히려 고맙다고 하는 분들이기에 도반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그분들은 남들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보이기 위해 굳이 행을 하는 분들이 아닙니다. ‘줄탁동시(茁啄同時)’라고 합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날 때 안과 밖에서 같이 쪼아야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습니다. 이미 도반들이 안에서 기부를 생각하고 있음이 보이기에 밖에서 보시를 권선한 것입니다. 바른 행동을 하는 분들을 비뚤게 보기 이전에 잘 모르는 남도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겸손과 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말 속에 마음이 다 보입니다. 수행자는 무릇 그래야 합니다. 특히 재가자에게 보시를 받고 사는 출가자는 더 그래야 합니다.
동계올림픽을 열기도 한 일본 나가노의 겨울 산은 참으로 푹신합니다. 새하얗게 천지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눈이 쏟아지는 날에 산간 시골 주민들은 세 명도 못 들어가는 작은 노천온천으로 향합니다. 옷 갈아입을 판잣집조차 없이 노천 작은 연못에서 입던 옷을 던지고 감기 걸릴세라 온천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몸을 담그고는 맥주 캔을 땁니다. 멀리서 곰인지 사슴인지 모르는 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순간을 즐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걱정하면 무얼 하나요? 어차피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고 피할 데도 없는데. 그냥 이렇게 잠겨 있겠습니다. 여러분의 선정은 어떤가요? 바로 여기서 당장 들어가 계신가요? 지금뿐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지금이 다입니다. 지금 즐겁지 않은데 정말 다음이 즐겁겠나요?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고통이 아닌 기쁘게 받아들인 길은 더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차려진 밥상을 편식하지 마시고 잘 챙겨 드시기 바랍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는 보살(bodhi + sattva)에서 보디(bodhi)의 어근 부드(budh)의 과거분사형이 붓다(buddha)로 잠에서 깨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의 명사형이 보디(bodhi)이니 깨어나거나 깨달음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보리살타 즉 보살입니다. 잠을 자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 무명에서 깨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깨어난다니 무명과 잠은 같은 듯하면서 다릅니다. 잠에서 꿈을 본다면 이건 무명을 밝힌 것일까요? 티베트 꿈 수행의 요체는 장자의 꿈처럼 현실도 꿈이며 꿈에서 꿈을 꾸면서 계속해서 그게 꿈이라는 것과 꿈속의 꿈이라는 것까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 부질없는 한낮의 꿈입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도 그렇습니다. 있지도 않지만, 없지도 않은 게 꿈입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서 ‘나’에 집착하고 나의 욕심인 ‘돈’에 집착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얼른 그 꿈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다시 편히 주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에는 요령도 필요합니다. 요령도 오랜 간절한 수행의 체득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저편에는 무의식이라는 아주 넓은 여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의 틈도 못 찾고 있습니다. 일단 그 틈을 찾으면 그 틈은 무한대로 커질 수 있습니다. 무의식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이걸 찾는 방법이 요령입니다. 찾은 사람만이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자기 점검을 위해 선정에 들어가서 본 의식의 틈에서 나오는 무의식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보다 보면 남들은 무의식이라는 게 이미 자신에게는 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미리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미래를 보게 됩니다. 무의식이 미리 가르쳐주는 그 느낌입니다. 그 느낌은 나를 넘은 모두의 집단 무의식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수행력과 안목으로 그냥 말없이 세상을 보시면 됩니다. 어렵다고요? 뭐든지 의심 덩어리인 의단(疑團)을 품고 창의적으로 생각해 내고 고정되지 않게 말랑말랑하게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부처님 말씀이라도 그 의도를 보고 그 말을 바꿀 수 있다면 그래서 법에 합당하다면 당신은 이미 선지식입니다.
훌륭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죄인인 것을 참회하며 일신우일신하면서 매일 개과천선해서 사는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공자의 9대손인 공부(孔駙)가 편찬했다는 ‘공총자(孔叢子)’에서 말했나 봅니다. 부처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직 숭고한 사람은 없고 숭고한 행만 있을 뿐입니다. 훌륭한 스님은 없습니다. 승려의 훌륭한 행만이 있을 뿐입니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승은 승려가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는 즉 보리심을 가지기를 원하는 원보리심과 행하기를 바라는 행보리심을 가지고 행한 보리행의 실천자인 사부대중 모두입니다. 이걸 모르는 출가승이 있다면 부처님의 겉말만 알고 속뜻은 모르는 자로 재가자들의 보시를 받아먹을 자격이 없는 그냥 광물로서의 보석일 뿐입니다.
* 칼럼니스트 하도겸은 법륜사(종로구 사간동)에서 목요요가명상마당(오후 7시)과 일요입보리행론마당(오후 3시)에서 무료자원봉사를 하면서 자신을 바로 보는 방법을 찾고 있다. 또 칼럼을 통해 사회와 종교계의 자성과 쇄신을 촉구하는 입장에서 화합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칼럼 내용 대부분은 제보되거나 인터뷰한 분의 글을 수정·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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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두 도반이 얘기하는 걸 봅니다. ‘이거 같이 해 볼까요?’ 라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은 안 하고 ‘언제 하면 되죠?’라고 되묻는 걸 봅니다. 이해관계로 보면 참 일 빨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리 관계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답에 ‘하고 싶다’는 긍정적인 표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기는 하지만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뉘앙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얼굴이 밝지 않으니, 뭐가 진짜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일은 그냥 하는 게 다가 아닙니다. 하는 과정에서 서로 교류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니 정말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 아니면 왜 아닌지도 알려줘야 합니다. 오래된 대화를 상실한 부부도 아니고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요.” 또는 “아 그거 정말 하고 싶어요”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동의와 공감을 이끄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좋은 거 아닌가 싶습니다.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인 아티샤 존자는 최상의 정신적 친구는 감추어진 잘못을 공격하는 사람이고 최상의 가르침은 감추어진 결함을 정통으로 지적해 주는 사람이며 그가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이걸 알면 재가 출가자를 떠나서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남들이 아는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서 자기 잘못을 지적한다고 화내는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한 도반이 가끔 친구한테 연락해서 “너도 살만하니까 이제 기부금도 내고 시간 내서 재능기부도 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NGO 등에 기부금을 내는데 그치지 않고 재능기부를 하는 분들이 많아집니다. 얼마 전 NGO 나마스떼코리아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역사이야기’에 강연을 맡아준 국방부, 외교부, 국회, 문화재청 등의 공무원들을 비롯해 PD, 교수, 건축가 등 대다수가 재능기부를 해주서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던 어떤 한 분이 어쩌다 “위선 아닌가?”라고 농담조로 웃으며 말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옆에서 듣다가 걸림 없이 오히려 “그런가요? 그렇게 보이던가요?‘라며 웃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행동이 가식이나 위선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도 숭고한 사람은 없고 숭고한 행만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시간 내서 재능 기부한 사람을 비뚤어진 눈으로 보는 것은 농담이라도 바르지 못한 듯합니다. 재능기부를 하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올바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휴식도 해야 하는 주말에 가족들까지도 뿌리치고 나오는 그런 재능기부를 부탁해도 흔쾌히 허락하며 오히려 고맙다고 하는 분들이기에 도반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그분들은 남들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보이기 위해 굳이 행을 하는 분들이 아닙니다. ‘줄탁동시(茁啄同時)’라고 합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날 때 안과 밖에서 같이 쪼아야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습니다. 이미 도반들이 안에서 기부를 생각하고 있음이 보이기에 밖에서 보시를 권선한 것입니다. 바른 행동을 하는 분들을 비뚤게 보기 이전에 잘 모르는 남도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겸손과 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말 속에 마음이 다 보입니다. 수행자는 무릇 그래야 합니다. 특히 재가자에게 보시를 받고 사는 출가자는 더 그래야 합니다.
동계올림픽을 열기도 한 일본 나가노의 겨울 산은 참으로 푹신합니다. 새하얗게 천지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눈이 쏟아지는 날에 산간 시골 주민들은 세 명도 못 들어가는 작은 노천온천으로 향합니다. 옷 갈아입을 판잣집조차 없이 노천 작은 연못에서 입던 옷을 던지고 감기 걸릴세라 온천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몸을 담그고는 맥주 캔을 땁니다. 멀리서 곰인지 사슴인지 모르는 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순간을 즐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걱정하면 무얼 하나요? 어차피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고 피할 데도 없는데. 그냥 이렇게 잠겨 있겠습니다. 여러분의 선정은 어떤가요? 바로 여기서 당장 들어가 계신가요? 지금뿐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지금이 다입니다. 지금 즐겁지 않은데 정말 다음이 즐겁겠나요?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고통이 아닌 기쁘게 받아들인 길은 더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차려진 밥상을 편식하지 마시고 잘 챙겨 드시기 바랍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는 보살(bodhi + sattva)에서 보디(bodhi)의 어근 부드(budh)의 과거분사형이 붓다(buddha)로 잠에서 깨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의 명사형이 보디(bodhi)이니 깨어나거나 깨달음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보리살타 즉 보살입니다. 잠을 자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 무명에서 깨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깨어난다니 무명과 잠은 같은 듯하면서 다릅니다. 잠에서 꿈을 본다면 이건 무명을 밝힌 것일까요? 티베트 꿈 수행의 요체는 장자의 꿈처럼 현실도 꿈이며 꿈에서 꿈을 꾸면서 계속해서 그게 꿈이라는 것과 꿈속의 꿈이라는 것까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 부질없는 한낮의 꿈입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도 그렇습니다. 있지도 않지만, 없지도 않은 게 꿈입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서 ‘나’에 집착하고 나의 욕심인 ‘돈’에 집착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얼른 그 꿈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다시 편히 주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에는 요령도 필요합니다. 요령도 오랜 간절한 수행의 체득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저편에는 무의식이라는 아주 넓은 여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의 틈도 못 찾고 있습니다. 일단 그 틈을 찾으면 그 틈은 무한대로 커질 수 있습니다. 무의식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이걸 찾는 방법이 요령입니다. 찾은 사람만이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자기 점검을 위해 선정에 들어가서 본 의식의 틈에서 나오는 무의식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보다 보면 남들은 무의식이라는 게 이미 자신에게는 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미리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미래를 보게 됩니다. 무의식이 미리 가르쳐주는 그 느낌입니다. 그 느낌은 나를 넘은 모두의 집단 무의식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수행력과 안목으로 그냥 말없이 세상을 보시면 됩니다. 어렵다고요? 뭐든지 의심 덩어리인 의단(疑團)을 품고 창의적으로 생각해 내고 고정되지 않게 말랑말랑하게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부처님 말씀이라도 그 의도를 보고 그 말을 바꿀 수 있다면 그래서 법에 합당하다면 당신은 이미 선지식입니다.
훌륭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죄인인 것을 참회하며 일신우일신하면서 매일 개과천선해서 사는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공자의 9대손인 공부(孔駙)가 편찬했다는 ‘공총자(孔叢子)’에서 말했나 봅니다. 부처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직 숭고한 사람은 없고 숭고한 행만 있을 뿐입니다. 훌륭한 스님은 없습니다. 승려의 훌륭한 행만이 있을 뿐입니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승은 승려가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실천하는 즉 보리심을 가지기를 원하는 원보리심과 행하기를 바라는 행보리심을 가지고 행한 보리행의 실천자인 사부대중 모두입니다. 이걸 모르는 출가승이 있다면 부처님의 겉말만 알고 속뜻은 모르는 자로 재가자들의 보시를 받아먹을 자격이 없는 그냥 광물로서의 보석일 뿐입니다.
* 칼럼니스트 하도겸은 법륜사(종로구 사간동)에서 목요요가명상마당(오후 7시)과 일요입보리행론마당(오후 3시)에서 무료자원봉사를 하면서 자신을 바로 보는 방법을 찾고 있다. 또 칼럼을 통해 사회와 종교계의 자성과 쇄신을 촉구하는 입장에서 화합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칼럼 내용 대부분은 제보되거나 인터뷰한 분의 글을 수정·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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