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뉴시스】홍춘봉 기자 = 스몰카지노 개장 전 말레이시아 겐팅그룹은 강원랜드를 인수하기 위해 두차례나 강원랜드를 방문했다. 사진은 2000년 10월 개장한 당시 강원랜드 스몰카지노호텔 전경. 2014.01.28. (사진=강원랜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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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뉴시스】홍춘봉 기자 = 스몰카지노 개장 전 강원랜드 인수를 적극 추진했던 겐팅그룹은 이후 5대 조기송 사장시절 크루즈사업에 지분 30% 참여를 요청할 정도로 강원랜드와는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하마터면 강원랜드가 말레이시아 겐팅그룹 산하 기업이 될 뻔했던 비화는 차치하고 림우통 회장의 일화는 거의 전설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현대그룹 고(故) 정주영 회장과 비견되는 인물이다.
중국 푸젠성 안시지역에서 1918년 4남3녀 가운데 5번째로 태어난 림 회장은 16세에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가세가 기울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삼촌에게서 목수기술을 배우며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중국에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그래서 19세가 되던 1937년 '희망의 땅'이라는 말레이시아로 이주하게 된다.
대부분의 화교들이 그랬던 것처럼 림 회장도 '말레이시아 드림'을 꿈꾸며 삼촌에게서 익힌 목수일을 기반으로 먹고 살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당시 10일간의 긴 여정 끝에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을 당시 그의 수중에는 미화 2달러가 전 재산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생각이 남 달랐던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맞닥뜨린 과제가 먹고 사는 문제였다.
생존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남보다 더 악착같이 일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들보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한편으로 보는 눈과 생각이 달랐다고 한다.
특히 탁월한 신용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건설현장에서 목수 기술자로 일하던 그는 건설업을 시작했고 남보다 빠른 공정과 하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으면서 빠르게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느 날 그에게 날 인생 최고의 행운을 잡는 기회가 찾아왔다.
1963년 정확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왕의 아들 목숨을 구해준 일이 그것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중국계 화교가 구해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국왕은 곧 림우통을 왕궁으로 불러 융숭한 대접을 한 뒤 말했다.
"우리 아들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의 진심을 담아 보답하고 싶다.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으니 소원을 말해 달라."
림우통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카지노 사업권을 달라"고 황당한 요구를 했다.
회교국가인 말레이시아는 도박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나라인데 의외의 제안에 국왕은 놀라고 말았다.
거액의 보상금이나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을 원할 것으로 생각했던 국왕은 림우통의 전혀 상상치도 못한 카지노 사업권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아니, 우리나라는 회교권 국가인데 어떻게 도박장을 설치할 수 있느냐? 다른 것으로 원하면 모르지만…."
카지노에 대한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갖고 있던 그는 당돌하게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버스로 2시간을 달려가면 나타나는 겐팅의 깊은 밀림에 카지노 리조트를 만들 구상을 갖고 있다. 밀림지역은 통제가 용이하다. 해발 1800m 고원지대에 세계적인 리조트단지를 만들면 가능하다. 카지노리조트에는 회교도인 말레이시아인들은 절대 출입시키지 않고 외국인 관광객만 받겠다. 카지노리조트가 조성되면 1만명 이상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연간 수천억이 넘는 이익이 생기면 이익금의 30%를 국왕에게 바치고 30%는 국가에 세금으로 내겠다. 국가에 이만한 도움이 되는 사업도 드물다. 그러니 카지노 사업권만 만들어주시기 바란다. 투자비도 모두 마련할 수 있다. 지난 25년간 말레이시아에서 건설업을 하면서 돈도 벌었고 말레이시아를 위해 보답하고 싶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던 카지노리조트 사업에 대해 설명하는 림 회장은 진지했고 국왕은 그의 방대한 구상 및 정부와 국왕을 위하는 상생협력 방안에 마음이 움직였다.
카지노 사업권을 림 회장에게 특별히 허가해 주도록 당시 툰쿠 압둘라만 초대총리에게 요청한 국왕은 범상치 않은 사업가로 판단하고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했다.
이후 압둘라만 총리는 겐팅지구 카지노리조트 인허가에 필요한 행정절차와 인허가 등을 일사천리로 진행토록 해 1965년 착공이 가능하게 됐다.
림 회장은 건설업을 하면서 쿠알라룸푸르에서 버스로 4시간 거리의 고원휴양지인 '카메룬 하이랜드'를 보고 카지노리조트 구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중소규모 건설업자에 불과한 림 회장은 세계적인 카지노 리조트를 밀림지역에 건설하려는 방대한 꿈을 갖고 있었고 엄청난 행운은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잘 맞아 떨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겐팅지역에 무려 1만200에이커(약1470만평)의 밀림지역을 불하받고 카지노 사업권까지 확보한 림 회장은 즉각 중국 본토로 건너가 카지노사업권을 담보로 개발에 필요한 투자자금을 마련했다.
1965년 마침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밀림 속 카지노 리조트 공사를 시작했다. 카지노리조트의 메인 시설이 들어서는 장소는 장장 25km 밀림지대를 개간하는 험난한 난공사였다.
해발 1800m 첩첩산중 밀림에 산을 깍아 도로를 내고 케이블카를 놓아 마침내 1969년 겐팅하이랜드 카지노리조트 1단계 공사를 마쳤다. 1단계 공사를 마치고 개장한 겐팅카지노리조트는 말이 좋아 리조트지 사실은 소규모 시설에 불과했다.
1968년 림 회장은 카지노리조트 개장 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카지노사업을 하고 있는 서울 워커힐을 찾아가 카지노사업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기로 요즘으로 치면 MOU(양해각서)를 맺었다.
1967년 인천 오림포스관광호텔에 이어 이듬해 1968년 개장한 워커힐호텔 카지노는 국내 최고의 카지노였다. 워커힐은 겐팅 림 회장에게 카지노 운영노하우를 전수하면서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겐팅의 게임테이블은 수십대에 그쳤고 고객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객실도 39개에 불과해 2000년 10월 개장한 강원랜드 스몰카지노 보다 훨씬 작고 초라한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스몰카지노의 역사는 겐팅이 강원랜드에 31년 앞서 개척한 셈이다. 당시 림 회장은 스몰카지노를 운영하며 시설을 계속 확장했고 1970년대 초반 메인시설이 완공되었다.
림 회장이 해발 1800m 고원지대에 카지노리조트를 구상한 것은 아열대 지역의 최고 휴양지는 해변보다 쾌적하고 서늘한 고원지대가 최고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4계절 쾌적하고 서늘한 겐팅리조트는 돈 많은 동남아지역 화교와 신혼부부, 중산층 직장인들의 휴가지로 인기를 끌면서 대박이 났다.
이후 꾸준히 시설을 확장한 겐팅은 현재 호텔 객실이 1만3000실이 넘고 하루 4만명이 찾는 세계적인 리조트로 성장했다. 또 겐팅은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 5조원을 투자해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종합휴양시설 및 카지노를 갖춘 리조트월드 센토사를 2010년 1월 말 개장했다.
또 겐팅은 필리핀에도 진출해 필리핀 최초의 대규모 카지노리조트인 리조트월드 마닐라를 개장했다.
현재 겐팅그룹은 연간 2000만명이 넘게 방문하는 카지노리조트를 시작으로 2억평의 팜 오일농장, 8개의 호텔, 스타크루즈, 골프장, 제지회사 등을 갖춘 말레이시아 최고의 재벌로 성장했다.
림 회장은 지난 2008년 10월23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국왕과 압둘라 총리를 비롯한 장관, 중요 정치인, 외국의 저명한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대거 참석해 애도했다.
겐팅 카지노는 림 회장의 장례식이 열린 날 오전6시부터 6시간동안 카지노 영업을 전면 중단했다. 당시 필자도 우연찮게 겐팅카지노리조트에서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다.
직원들이 림 회장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라는 취지였는데 1969년 겐팅카지노가 개장하고 휴장을 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특히 림회장이 사망한 뒤 쿠알라룸푸르 일대는 하루종일 폭우가 쏟아져 말레이시아 국민들은 림 회장의 서거를 하늘도 애도한다고 해석했다. 말레이이사에 폭우가 24시간 내리는 날은 수십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라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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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강원랜드가 말레이시아 겐팅그룹 산하 기업이 될 뻔했던 비화는 차치하고 림우통 회장의 일화는 거의 전설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현대그룹 고(故) 정주영 회장과 비견되는 인물이다.
중국 푸젠성 안시지역에서 1918년 4남3녀 가운데 5번째로 태어난 림 회장은 16세에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가세가 기울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삼촌에게서 목수기술을 배우며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중국에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그래서 19세가 되던 1937년 '희망의 땅'이라는 말레이시아로 이주하게 된다.
대부분의 화교들이 그랬던 것처럼 림 회장도 '말레이시아 드림'을 꿈꾸며 삼촌에게서 익힌 목수일을 기반으로 먹고 살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당시 10일간의 긴 여정 끝에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을 당시 그의 수중에는 미화 2달러가 전 재산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생각이 남 달랐던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맞닥뜨린 과제가 먹고 사는 문제였다.
생존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남보다 더 악착같이 일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들보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한편으로 보는 눈과 생각이 달랐다고 한다.
특히 탁월한 신용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건설현장에서 목수 기술자로 일하던 그는 건설업을 시작했고 남보다 빠른 공정과 하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으면서 빠르게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느 날 그에게 날 인생 최고의 행운을 잡는 기회가 찾아왔다.
1963년 정확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왕의 아들 목숨을 구해준 일이 그것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중국계 화교가 구해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국왕은 곧 림우통을 왕궁으로 불러 융숭한 대접을 한 뒤 말했다.
"우리 아들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의 진심을 담아 보답하고 싶다.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으니 소원을 말해 달라."
림우통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카지노 사업권을 달라"고 황당한 요구를 했다.
회교국가인 말레이시아는 도박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나라인데 의외의 제안에 국왕은 놀라고 말았다.
거액의 보상금이나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을 원할 것으로 생각했던 국왕은 림우통의 전혀 상상치도 못한 카지노 사업권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아니, 우리나라는 회교권 국가인데 어떻게 도박장을 설치할 수 있느냐? 다른 것으로 원하면 모르지만…."
카지노에 대한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갖고 있던 그는 당돌하게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버스로 2시간을 달려가면 나타나는 겐팅의 깊은 밀림에 카지노 리조트를 만들 구상을 갖고 있다. 밀림지역은 통제가 용이하다. 해발 1800m 고원지대에 세계적인 리조트단지를 만들면 가능하다. 카지노리조트에는 회교도인 말레이시아인들은 절대 출입시키지 않고 외국인 관광객만 받겠다. 카지노리조트가 조성되면 1만명 이상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연간 수천억이 넘는 이익이 생기면 이익금의 30%를 국왕에게 바치고 30%는 국가에 세금으로 내겠다. 국가에 이만한 도움이 되는 사업도 드물다. 그러니 카지노 사업권만 만들어주시기 바란다. 투자비도 모두 마련할 수 있다. 지난 25년간 말레이시아에서 건설업을 하면서 돈도 벌었고 말레이시아를 위해 보답하고 싶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던 카지노리조트 사업에 대해 설명하는 림 회장은 진지했고 국왕은 그의 방대한 구상 및 정부와 국왕을 위하는 상생협력 방안에 마음이 움직였다.
카지노 사업권을 림 회장에게 특별히 허가해 주도록 당시 툰쿠 압둘라만 초대총리에게 요청한 국왕은 범상치 않은 사업가로 판단하고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했다.
이후 압둘라만 총리는 겐팅지구 카지노리조트 인허가에 필요한 행정절차와 인허가 등을 일사천리로 진행토록 해 1965년 착공이 가능하게 됐다.
림 회장은 건설업을 하면서 쿠알라룸푸르에서 버스로 4시간 거리의 고원휴양지인 '카메룬 하이랜드'를 보고 카지노리조트 구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중소규모 건설업자에 불과한 림 회장은 세계적인 카지노 리조트를 밀림지역에 건설하려는 방대한 꿈을 갖고 있었고 엄청난 행운은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잘 맞아 떨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겐팅지역에 무려 1만200에이커(약1470만평)의 밀림지역을 불하받고 카지노 사업권까지 확보한 림 회장은 즉각 중국 본토로 건너가 카지노사업권을 담보로 개발에 필요한 투자자금을 마련했다.
1965년 마침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밀림 속 카지노 리조트 공사를 시작했다. 카지노리조트의 메인 시설이 들어서는 장소는 장장 25km 밀림지대를 개간하는 험난한 난공사였다.
해발 1800m 첩첩산중 밀림에 산을 깍아 도로를 내고 케이블카를 놓아 마침내 1969년 겐팅하이랜드 카지노리조트 1단계 공사를 마쳤다. 1단계 공사를 마치고 개장한 겐팅카지노리조트는 말이 좋아 리조트지 사실은 소규모 시설에 불과했다.
1968년 림 회장은 카지노리조트 개장 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카지노사업을 하고 있는 서울 워커힐을 찾아가 카지노사업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기로 요즘으로 치면 MOU(양해각서)를 맺었다.
1967년 인천 오림포스관광호텔에 이어 이듬해 1968년 개장한 워커힐호텔 카지노는 국내 최고의 카지노였다. 워커힐은 겐팅 림 회장에게 카지노 운영노하우를 전수하면서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겐팅의 게임테이블은 수십대에 그쳤고 고객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객실도 39개에 불과해 2000년 10월 개장한 강원랜드 스몰카지노 보다 훨씬 작고 초라한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스몰카지노의 역사는 겐팅이 강원랜드에 31년 앞서 개척한 셈이다. 당시 림 회장은 스몰카지노를 운영하며 시설을 계속 확장했고 1970년대 초반 메인시설이 완공되었다.
림 회장이 해발 1800m 고원지대에 카지노리조트를 구상한 것은 아열대 지역의 최고 휴양지는 해변보다 쾌적하고 서늘한 고원지대가 최고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4계절 쾌적하고 서늘한 겐팅리조트는 돈 많은 동남아지역 화교와 신혼부부, 중산층 직장인들의 휴가지로 인기를 끌면서 대박이 났다.
이후 꾸준히 시설을 확장한 겐팅은 현재 호텔 객실이 1만3000실이 넘고 하루 4만명이 찾는 세계적인 리조트로 성장했다. 또 겐팅은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 5조원을 투자해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종합휴양시설 및 카지노를 갖춘 리조트월드 센토사를 2010년 1월 말 개장했다.
또 겐팅은 필리핀에도 진출해 필리핀 최초의 대규모 카지노리조트인 리조트월드 마닐라를 개장했다.
현재 겐팅그룹은 연간 2000만명이 넘게 방문하는 카지노리조트를 시작으로 2억평의 팜 오일농장, 8개의 호텔, 스타크루즈, 골프장, 제지회사 등을 갖춘 말레이시아 최고의 재벌로 성장했다.
림 회장은 지난 2008년 10월23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국왕과 압둘라 총리를 비롯한 장관, 중요 정치인, 외국의 저명한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대거 참석해 애도했다.
겐팅 카지노는 림 회장의 장례식이 열린 날 오전6시부터 6시간동안 카지노 영업을 전면 중단했다. 당시 필자도 우연찮게 겐팅카지노리조트에서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다.
직원들이 림 회장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라는 취지였는데 1969년 겐팅카지노가 개장하고 휴장을 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특히 림회장이 사망한 뒤 쿠알라룸푸르 일대는 하루종일 폭우가 쏟아져 말레이시아 국민들은 림 회장의 서거를 하늘도 애도한다고 해석했다. 말레이이사에 폭우가 24시간 내리는 날은 수십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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