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이병철 회장은 대구시 북부 침산동에 위치한 공장 건설 현장을 거의 매일같이 찾았다. 호언장담했으니 직접 현장도 살펴야 했다.
모직 공장은 입지 조건이 까다로웠다. 무엇보다 기온·습도·수질이 중요한 조건이었는데, 대구는 사계절의 기온 차가 유난히 심한 지역이었다.
시공 과정에 들어가면서부터 공장 안의 온도와 습도를 세심하게 신경 써야했다.
“여러분, 양복지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는 날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더 이상 외화를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손으로 그런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공장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우리나라 기술자의 체면이 땅에 떨어집니다. 여러분, 한국인의 긍지를 가지고 일합시다.”
이병철 회장은 직원들을 격려하는 한편, 경영진에게 기숙사 환경을 최상급으로 갖추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공장이 가동하면 1000명이 넘는 여직원들이 기숙사에 머물 예정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기숙사에 스팀 난방을 설치하고 목욕실, 세탁실, 다리미실, 휴게실 등의 최고급 부대시설도 만들도록 지시했다.
복도에는 회나무를 깔아서 자연 친화적인 느낌이 나도록 배려했다.
공장 곳곳에 좋은 나무를 사다 심었고, 연못과 분수까지 마련했다. 공장이라고 해서 삭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은 ‘정원 공장’을 만들 생각이었다. 나중에 기숙사가 완성되자 사람들이 모직 공장을 ‘제일 공원’이라고 불렀다.
일부 임원들은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쓴다며 투덜대기도 했다. 하루는 전무로 있던 이창업이 이병철 회장에게 한마디 했다.
“공장도 완공하기 전에 기숙사부터 짓고 정원까지 꾸미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들 합니다.”
“그래요? 나는 우리가 여직원들에게 단순히 일자리만 제공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직원들이 기숙사 생활을 통해 교양을 높이고 정서도 함양해서 마음껏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최신식 기숙사면 충분한데, 정원을 만들고 꽃까지 심어야 했을까요? 사람들이 사치고 낭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런데 말입니다. 여직원들이 먹고 잘 자리만 제공하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일하는 환경이 나쁘면 작업에도 싫증이 나기 쉽습니다. 공장 생활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아주 단조롭지요. 자칫하면 여직원들의 정서가 메마르고 정신 건강도 좋지 않을 텐데…. 이 전무라면 그런 회사에 딸을 보내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이건 자선 사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자선 사업가는 아닙니다. 노동력이 저하되거나 직장을 이탈하는 이 생길 경우엔 결국 손해를 보는 건 회사입니다.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일할 수 있을 때 작업 능률도 오르고 직장에 대한 애착도 생깁니다.”
“그 비용이 자그마치 3만 환입니다. 사원 기숙사에 이런 거금을 투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창업도 지지 않았다.
“돈이 들긴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본다면 그게 다 사회에 대한 봉사가 되는 겁니다. 여직원들의 능률이 오르면 그만큼 생산비가 저렴해지고, 따라서 제품의 생산 원가도 낮아질 것이 아니겠어요?”
이병철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공장 건물 중 가장 먼저 완공한 것도 진심(眞心), 선심(善心), 숙심(淑心)이라는 이름의 여직원 기숙사였다.
국내 최고의 기숙사 시설에 봉급도 최고 대우!
제일모직은 국산 양복지를 만들어 보이겠다는 이병철 회장 뿐 아니라 대한민국 여공들에게도 꿈의 공장이었다. 신문에 여공 모집 공고가 나면 공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병철 회장의 열의와 공장장인 김재명이 이끄는 3교대 철야 작업의 결과로 공사를 빠르게 마무리하여 제일제당처럼 6개월 만에 준공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온 기술자들도 “한국인을 다시 보았다”라는 찬사와 함께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1956년 5월 2일, 시범 생산을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초췌했다. 몇 개월 동안 동분서주한 탓에 7킬로그램이나 몸무게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과연 어떤 원단이 나올까?’
옷감을 만져보고 난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영국산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국산품 중에서는 최고였다. 제일모직이 만들어낸 이 제품의 이름은 바로 ‘골덴텍스’!
이 회장은 직접 양복점을 냈다. 서울 을지로에 있던 제일모직 사옥 1층에 ‘장미라사’ 간판이 걸렸다. 이병철 회장이 좋아하는 꽃인 ‘장미’에 유럽의 양복지를 뜻하는 ‘라사’라는 말을 합친 것이었다. 이런 철저한 준비 끝에 제일모직은 한 해 약 50만 벌의 양복지를 생산해냈다.
제품을 출시하고 얼마 뒤, 임원 회의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생각보다 판매가 부진합니다.”
당시 골덴텍스의 양복 한 벌 감은 1만 2000원 안팎이었다. 6만 원이 넘는 마카오 양복지의 5분의 1 가격에 지나지 않는, 엄청나게 싼 가격이었다. 골덴텍스의 품질은 결코 마카오 양복지에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좋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국산품보다는 역시 외제’라는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모두 머리를 짜내어 이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을 고심했다.
며칠 뒤, “외래품을 능가하는 골덴텍스 양복지”라는 광고 문구가 신문에 등장했다.
“외제를 능가하는 제품이라고?”
광고를 본 사람들이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차츰 골덴텍스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 이 무렵 이병철은 일부러 골덴텍스로 만든 양복만 입고 다녔다.
“역시 사장님이 입는 영국제는 다르군요.”
“양복감을 만드신다더니 왜 사장님은 영국산을 입습니까?”
이병철 회장과 만나는 정부의 고급 관리와 재계 인사는 소문난 마카오 신사인 그가 여전히 영국제 순모로 만든 양복을 입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이런 이야기를 듣는 일이 많았다.
“고맙습니다. 우리 골덴텍스가 영국제만큼 좋다는 이야기로 알아듣겠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빙그레 웃으며 양복 안쪽에 적힌 ‘MADE IN KOREA’ 문구를 보여주었다. 이토록 훌륭한 품질의 옷감이 바로 제일모직 양복지라는 걸 알렸다. 직원들도 스스로 광고 모델이 되어 적극적으로 홍보전을 펼쳤다.
그러나 제일모직 골덴텍스는 첫해에 5억 환이나 적자를 보았다.
“사람들의 인식만 탓해서는 안 됩니다. 영국산보다 잘 만드는 것이 결국 우리가 살 길입니다.”
혼수품으로도 골덴텍스가 인기를 끌었다. 얼마나 잘 팔리던지 골덴텍스의 상표를 도용한 상품이 시중에 유통될 정도였다.
골덴텍스가 잘 팔리자 ‘경남모직’, ‘한국모방’, ‘대한모방’ 등 새로운 양복지 회사가 생겨났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모방직, 섬유 산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골덴텍스는 시장의 70퍼센트를 점유하여 제일모직은 우리나라 섬유 산업을 선도하는 회사가 되었다. 제일모직은 마침내 우리 땅에서 외제 양복지를 몰아내고 국민 의복 생활에 새바람을 불어넣었으며, 국가적으로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외화를 절약할 수 있었다.
국산화를 통한 완전 자급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서자 정부는 1958년 1월방의 외국산 수입을 대대적으로 금지했다.
수입 품목을 책정하는 과정에서 연간 소비량이 6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외제 모방으로 인해 막대한 외화
를 유출했기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으로 전국 납세액의 4퍼센트를 내는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이병철은 평생을 두고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자랑스러워했다. 엄청난 수익을 걷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제일모직에는 정부 관계자들과 해외 귀빈들도 찾아왔다. 대통령 이승만도 공장이 설립되었을 때 제일모직을 방문했다. 이승만은 이병철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고, 평소에도 아들 같은 이병철의 기업가 자질을 높이 샀다. 그는 시설을 둘러보고는 깊이 감동했다.
“이런 멋진 공장을 세워주어서 고맙네. 국민들이 이제 더 이상 수입 모직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것이야말로 애국이야.”
그리고 제일모직의 성공을 기원하며 휘호를 직접 적어주었다. ‘의피창생(依被蒼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는 뜻)’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대로 제일모직은 이병철과 삼성그룹, 한국의 산업계, 나아가서 세계 산업계에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모직의 원조국인 런던에 골덴텍스를 수출하기도 했고 1970년대 섬유 업계에서 수출을 주도했다.
섬유 산업이 어려움에 처한 1980년대에 패션 산업의 문을 연 것도 제일모직이었다. 갤럭시 등 유명 브랜드를 만들어 국내 1위 패션 업체로 자리 매김했고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1위 기업이 되겠다는 목표로 화학 소재 산업과 전자 소재 산업에 뛰어들었다.
현재 제일모직은 사람이 입는 옷을 넘어 전자 제품이 입는 옷까지 만들고 있다. 전문 용어로는 ‘하우징(housing)’이라고 부른다. 최근 매출액만 보면 현재 하우징, 전자 소재 분야가 의복류보다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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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직 공장은 입지 조건이 까다로웠다. 무엇보다 기온·습도·수질이 중요한 조건이었는데, 대구는 사계절의 기온 차가 유난히 심한 지역이었다.
시공 과정에 들어가면서부터 공장 안의 온도와 습도를 세심하게 신경 써야했다.
“여러분, 양복지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는 날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더 이상 외화를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손으로 그런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공장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우리나라 기술자의 체면이 땅에 떨어집니다. 여러분, 한국인의 긍지를 가지고 일합시다.”
이병철 회장은 직원들을 격려하는 한편, 경영진에게 기숙사 환경을 최상급으로 갖추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공장이 가동하면 1000명이 넘는 여직원들이 기숙사에 머물 예정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기숙사에 스팀 난방을 설치하고 목욕실, 세탁실, 다리미실, 휴게실 등의 최고급 부대시설도 만들도록 지시했다.
복도에는 회나무를 깔아서 자연 친화적인 느낌이 나도록 배려했다.
공장 곳곳에 좋은 나무를 사다 심었고, 연못과 분수까지 마련했다. 공장이라고 해서 삭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은 ‘정원 공장’을 만들 생각이었다. 나중에 기숙사가 완성되자 사람들이 모직 공장을 ‘제일 공원’이라고 불렀다.
일부 임원들은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쓴다며 투덜대기도 했다. 하루는 전무로 있던 이창업이 이병철 회장에게 한마디 했다.
“공장도 완공하기 전에 기숙사부터 짓고 정원까지 꾸미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들 합니다.”
“그래요? 나는 우리가 여직원들에게 단순히 일자리만 제공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직원들이 기숙사 생활을 통해 교양을 높이고 정서도 함양해서 마음껏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최신식 기숙사면 충분한데, 정원을 만들고 꽃까지 심어야 했을까요? 사람들이 사치고 낭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런데 말입니다. 여직원들이 먹고 잘 자리만 제공하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일하는 환경이 나쁘면 작업에도 싫증이 나기 쉽습니다. 공장 생활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아주 단조롭지요. 자칫하면 여직원들의 정서가 메마르고 정신 건강도 좋지 않을 텐데…. 이 전무라면 그런 회사에 딸을 보내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이건 자선 사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자선 사업가는 아닙니다. 노동력이 저하되거나 직장을 이탈하는 이 생길 경우엔 결국 손해를 보는 건 회사입니다.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일할 수 있을 때 작업 능률도 오르고 직장에 대한 애착도 생깁니다.”
“그 비용이 자그마치 3만 환입니다. 사원 기숙사에 이런 거금을 투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창업도 지지 않았다.
“돈이 들긴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본다면 그게 다 사회에 대한 봉사가 되는 겁니다. 여직원들의 능률이 오르면 그만큼 생산비가 저렴해지고, 따라서 제품의 생산 원가도 낮아질 것이 아니겠어요?”
이병철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공장 건물 중 가장 먼저 완공한 것도 진심(眞心), 선심(善心), 숙심(淑心)이라는 이름의 여직원 기숙사였다.
국내 최고의 기숙사 시설에 봉급도 최고 대우!
제일모직은 국산 양복지를 만들어 보이겠다는 이병철 회장 뿐 아니라 대한민국 여공들에게도 꿈의 공장이었다. 신문에 여공 모집 공고가 나면 공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병철 회장의 열의와 공장장인 김재명이 이끄는 3교대 철야 작업의 결과로 공사를 빠르게 마무리하여 제일제당처럼 6개월 만에 준공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온 기술자들도 “한국인을 다시 보았다”라는 찬사와 함께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1956년 5월 2일, 시범 생산을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초췌했다. 몇 개월 동안 동분서주한 탓에 7킬로그램이나 몸무게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과연 어떤 원단이 나올까?’
옷감을 만져보고 난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영국산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국산품 중에서는 최고였다. 제일모직이 만들어낸 이 제품의 이름은 바로 ‘골덴텍스’!
이 회장은 직접 양복점을 냈다. 서울 을지로에 있던 제일모직 사옥 1층에 ‘장미라사’ 간판이 걸렸다. 이병철 회장이 좋아하는 꽃인 ‘장미’에 유럽의 양복지를 뜻하는 ‘라사’라는 말을 합친 것이었다. 이런 철저한 준비 끝에 제일모직은 한 해 약 50만 벌의 양복지를 생산해냈다.
제품을 출시하고 얼마 뒤, 임원 회의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생각보다 판매가 부진합니다.”
당시 골덴텍스의 양복 한 벌 감은 1만 2000원 안팎이었다. 6만 원이 넘는 마카오 양복지의 5분의 1 가격에 지나지 않는, 엄청나게 싼 가격이었다. 골덴텍스의 품질은 결코 마카오 양복지에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좋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국산품보다는 역시 외제’라는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모두 머리를 짜내어 이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을 고심했다.
며칠 뒤, “외래품을 능가하는 골덴텍스 양복지”라는 광고 문구가 신문에 등장했다.
“외제를 능가하는 제품이라고?”
광고를 본 사람들이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차츰 골덴텍스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 이 무렵 이병철은 일부러 골덴텍스로 만든 양복만 입고 다녔다.
“역시 사장님이 입는 영국제는 다르군요.”
“양복감을 만드신다더니 왜 사장님은 영국산을 입습니까?”
이병철 회장과 만나는 정부의 고급 관리와 재계 인사는 소문난 마카오 신사인 그가 여전히 영국제 순모로 만든 양복을 입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이런 이야기를 듣는 일이 많았다.
“고맙습니다. 우리 골덴텍스가 영국제만큼 좋다는 이야기로 알아듣겠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빙그레 웃으며 양복 안쪽에 적힌 ‘MADE IN KOREA’ 문구를 보여주었다. 이토록 훌륭한 품질의 옷감이 바로 제일모직 양복지라는 걸 알렸다. 직원들도 스스로 광고 모델이 되어 적극적으로 홍보전을 펼쳤다.
그러나 제일모직 골덴텍스는 첫해에 5억 환이나 적자를 보았다.
“사람들의 인식만 탓해서는 안 됩니다. 영국산보다 잘 만드는 것이 결국 우리가 살 길입니다.”
혼수품으로도 골덴텍스가 인기를 끌었다. 얼마나 잘 팔리던지 골덴텍스의 상표를 도용한 상품이 시중에 유통될 정도였다.
골덴텍스가 잘 팔리자 ‘경남모직’, ‘한국모방’, ‘대한모방’ 등 새로운 양복지 회사가 생겨났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모방직, 섬유 산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골덴텍스는 시장의 70퍼센트를 점유하여 제일모직은 우리나라 섬유 산업을 선도하는 회사가 되었다. 제일모직은 마침내 우리 땅에서 외제 양복지를 몰아내고 국민 의복 생활에 새바람을 불어넣었으며, 국가적으로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외화를 절약할 수 있었다.
국산화를 통한 완전 자급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서자 정부는 1958년 1월방의 외국산 수입을 대대적으로 금지했다.
수입 품목을 책정하는 과정에서 연간 소비량이 6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외제 모방으로 인해 막대한 외화
를 유출했기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으로 전국 납세액의 4퍼센트를 내는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이병철은 평생을 두고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자랑스러워했다. 엄청난 수익을 걷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제일모직에는 정부 관계자들과 해외 귀빈들도 찾아왔다. 대통령 이승만도 공장이 설립되었을 때 제일모직을 방문했다. 이승만은 이병철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고, 평소에도 아들 같은 이병철의 기업가 자질을 높이 샀다. 그는 시설을 둘러보고는 깊이 감동했다.
“이런 멋진 공장을 세워주어서 고맙네. 국민들이 이제 더 이상 수입 모직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것이야말로 애국이야.”
그리고 제일모직의 성공을 기원하며 휘호를 직접 적어주었다. ‘의피창생(依被蒼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는 뜻)’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대로 제일모직은 이병철과 삼성그룹, 한국의 산업계, 나아가서 세계 산업계에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모직의 원조국인 런던에 골덴텍스를 수출하기도 했고 1970년대 섬유 업계에서 수출을 주도했다.
섬유 산업이 어려움에 처한 1980년대에 패션 산업의 문을 연 것도 제일모직이었다. 갤럭시 등 유명 브랜드를 만들어 국내 1위 패션 업체로 자리 매김했고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1위 기업이 되겠다는 목표로 화학 소재 산업과 전자 소재 산업에 뛰어들었다.
현재 제일모직은 사람이 입는 옷을 넘어 전자 제품이 입는 옷까지 만들고 있다. 전문 용어로는 ‘하우징(housing)’이라고 부른다. 최근 매출액만 보면 현재 하우징, 전자 소재 분야가 의복류보다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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