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이야기⑩]도둑도 울고 간 '구두쇠 회장댁'

기사등록 2013/05/19 06:00:00

최종수정 2016/12/28 07:28:38

【서울=뉴시스】1934년 복흥상회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서 있는 정주영 회장. 정 회장은 19세에 쌀소매상인 복흥상회에 취업해 장사하는 방법을 배웠다. (제공=아산정주영닷컴 캡쳐)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34년 복흥상회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서 있는 정주영 회장. 정 회장은 19세에 쌀소매상인 복흥상회에 취업해 장사하는 방법을 배웠다. (제공=아산정주영닷컴 캡쳐)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정주영 회장의 근검절약하는 습관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정 회장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지금은 북한 땅에 속함) 아산마을 농가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 회장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어 동생 여섯 명을 키워 분가시킨 집안의 장남이어서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농한기인 겨울에도 새벽에 삼태기를 들고 나가서 쇠똥, 개똥을 주워다가 거름으로 썼고, 멀리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도 용변이 마려우면 반드시 집으로 와서 거름에 보탰다.

 정주영 회장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시아버지의 서당 앞에 오줌통을 놓아 서당 아이들의 오줌을 받아 모았다. 서당 아이들이 다른 데다 소변을 보기라도 하면 볶은 콩을 나눠주며 달래기까지 했다.

 “열심히 절약하고 모으면 큰 부자는 못 돼도 작은 부자는 될 수 있어. 애써 번 돈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애써 농사 지은 조밭에 소를 불러들이는 거랑 같은 일이야.”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정주영 회장에게 조밭에 깨를 심는 일을 맡겼다. 깻잎 냄새를 싫어하는 소가 조밭을 덮치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부모님은 정 회장과 그의 동생들에게 열심히 일하고 착실히 절약하면 게으르고 낭비하는 사람보다 잘살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곧 아버지처럼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풍년이 들면 간신히 먹고 사는 정도요, 흉년이 들면 죽어라 일해도 콩죽과 도토리로 끼니를 이어야 했다.

 끊임없이 농토를 개간해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공사판에서 막노동으로 돈을 벌어다가 어엿한 농토를 사는 것이 수월하겠다.’ 농사는 들이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서 성과가 너무 적었다.

 ‘같은 쥐라고 해도 뒷간에 있는 쥐는 똥을 먹다 도망치고, 광에 있는 쥐는 쌀을 먹고 도망친다고 했는데 몸 튼튼하겠다, 힘 좋겠다, 일도 해 볼 만큼 해봤으니 뭐가 두렵겠는가!’

 정주영 회장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가출을 결심했다. 매일 짬을 내어들렀던 마을 이장 댁에서 본 신문 광고 하나만 믿고 처음으로 짐을 쌌다.

 그러나 뒤쫓아온 아버지에게 붙잡혀 고향으로 다시 끌려오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성공한 것이 네 번째 가출이었다.

 정 회장은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고향을 떠나기는 했지만, 객지에서도 아버지가 강조한 삶의 태도와 절약 정신만은 그대로 이어나갔다.

 부둣가 막노동을 하면서는 장작값 10전을 아끼기 위해 한겨울에도 하루에 한 번만 불을 지펴 구들장 냉기를 뺐다. 남들 다 피우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는데 배가 부르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품 팔아서 번 돈을 연기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처음으로 안정된 급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복흥상회의 쌀 배달원 자리였다. 그 시절에도 전차를 타는 데 드는 5전을 아끼려고 새벽 일찍 일어나 걸어서 출근했다.

associate_pic2
【서울=뉴시스】1972년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의 모습. 왼쪽부터 아들 몽준, 몽윤, 몽헌, 몽일. (제공=아산정주영닷컴)  [email protected]
 그러다보니 구두가 너무 빨리 닳아 징을 박아 신고 다녔고, 옷은 봄·가을로 한 벌, 신문은 일터로 배달된 것을 읽었다.

 쌀 한가마값의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반을 떼서 저축했고, 명절 때 받은 떡값은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그대로 저축했다.

 훗날 종업원 60명 규모의 회사를 차렸을 때에도 아침 밥상에는 김치 한 가지, 국 한 그릇 이상의 반찬을 허용하지 않았다.

 ◇회장님은 구두쇠

 “자네, 손님을 모시고 식당에 가서 계산하고 거스름돈을 받으면 보통 어떻게 하나?”

 “주머니에 넣지.”

 “왜?”

 “손님 보는 데서 돈을 세기 민망하니까 그렇지. 자네는 안 그러나?”

 “나도 자네처럼 주머니에 넣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 회장님은 꼭 세어보시는 거 알아?”

 “정말인가? 하여튼 지독한 양반이야. 지난번에는 내가 회장님 모시고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글쎄 그냥 지나가다 보이는 기사식당으로 쑥 들어가시더라고. 회장님 따라가니까 잘 얻어먹겠구나 하고 좋아했는데 헛물만 켰지 뭐야.”

 정주영 회장은 특별히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 아니면 여기저기 소문난 맛집을 찾아다니는 일이 없었다. 거기에 쓰는 시간과 돈이 아까웠다.

 “종이를 한 번 쓰고 버리면 어떡해?” 사무실에서 종이 한 장을 복사지로 쓸 때도 앞면과 뒷면을 모두 쓰게 하고, “저걸 다 허투루 버리는 건가?” 공사 현장에서 자갈 몇개도 허투루 버리는 걸 참지 못하고, “틈날 때마다 걷거나 정구를 치면 되지, 보약은 무슨 보약” 보약이란 건 먹어본 적이 없는 부자가 바로 정주영 회장이었다.

 83개가 넘는 사업체를 일으키고 130조 원이 넘는 매출을 내는 세계적 기업을 세웠지만 그는 누구보다 절약했다. 또 그는 양쪽 엄지발가락 자리에 구멍이 나 있는 구두를 징까지 박은 굽을 갈아가며 30년 넘게 신고 20년이 다 된 작업복을 작고하기 전까지 입고 다닐 정도로 구두쇠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치 있는 일에 쓰기에는 모자라는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왜 가치 없고 의미 없는 일에 돈을 낭비합니까? 의식주를 얼마나 잘 누리고 사느냐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얼마나 미
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associate_pic2
【서울=뉴시스】1960년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 그리고고 아들 몽윤, 몽우의 모습. (베공=아산정주영닷컴 캡쳐)  [email protected]
 ◇부창부수(夫唱婦隨)

 알고 보면 정주영만 구두쇠, 왕소금이 아니었다. 그의 부인인 변중석 여사도 변변한 패물 하나 없었다. 결혼하던 날, 하루를 빼고는 평생을 화장한 얼굴을 보인 적도 없었다.

 결혼 초기, 서울 신당동에서 쌀가게를 하던 시절엔 고향에서 상경한 시동생들과 함께 쌀도 팔고 두부도 팔면서 살림에 필요한 돈을 틈틈이 벌었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운영하던 시절엔 60명이 넘는 종업원들의 식사를 직접 머리로 이어서 공장으로 날랐다.

 ‘회장 사모님’이 된 뒤로도 밤 12시가 넘어 들어오는 남편의 목욕물을 직접 데워주고,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집에서는 늘 일복(속칭 ‘몸빼’)을 입고 있었다. 누가 찾아오면 일복 차림으로 나가서 문을 열어주다보니, 손님들이 “사모님은 어디 계시오” 하고 안주인을 따로 찾는 경우도 많았다.

 변중석 여사가 “내가 그 안주인이오” 하면 상대는 당황했고, 본인은 허허 웃어 넘겼다. 며느리를 들일 때에도 생활비를 아껴 모은 적금통장을 선물로 내밀어서 ‘검소와 절약’이라는 집안의 가풍을 전해주었다.

 또 밖에 나가면 아무도 그녀를 몰라볼 정도로 검소한 차림이었다. 시장에 갈 때도 남편이 사준 자동차는 집에 두고 식재료를 실은 용달차의 조수석에 앉았다.

 그녀가 평생을 두고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했던 것은 정주영이 한국전쟁 직후에 사준 재봉틀 하나와 장독대의 항아리 몇개뿐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이런 부인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아내가 재봉틀 1대를 유일한 재산으로 아는 점, 부자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점, 평생 변함이 없는 점들을 나는 존경한다.”

 ◇도둑도 울고 갈 집

 1980년 무렵, 현대건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탄탄하고 수익률 높은 회사가 되었다. 그런데 부부가 모두 구두쇠다보니, 집 안의 가구라고는 20년이 넘은 소파와 10년이 다 되어가는 17인치 텔레비전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여름 날이었다.

 “누구요!” 정주영 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는 잠결에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도둑들이 방 안을 뒤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꼼짝 마! 소리치면 불을 붙여버리겠어.” 도둑들이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머리에 휘발유를 부었다. 변중석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이불 속에서 떨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도둑들이 떠날 생각을 안 했다. 가만 귀를 기울여보니 도둑끼리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좀 더 찾아봐.” 도둑들이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associate_pic2
【서울=뉴시스】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부인 변중석 여사의 고희연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제공=아산정주영닷컴 캡쳐)  [email protected]
 “설마 훔쳐갈 게 없겠어? 더 깊은 데 숨겨뒀겠지.”

 참다못한 변중석 여사가 이판사판이란 생각으로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이 집이 누구 집인지 알고 들어온 모양인데, 나 소리 안 지를 테니까 우리 좋게 타협합시다.”

 도둑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었는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변중석 여사는 아들의 결혼 패물로 사다놓았던 시계와 타다놓은 월급 200만 원을 도둑들 앞에 내놓았다.

 “자, 이게 갖고 있는 전부요. 가지고 가시오.”

 그러자 도둑들이 벌컥 화를 냈다.

 “우리를 바보로 아나? 달러를 내놔. 금주발 같은 것도 있을 거 아냐?”

 변 여사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분명하게 대답했다.

 “나는 달러라는 게 있단 말만 들었지, 평생 구경 한번 못 했소. 정말 금주발에 밥을 먹는 집이 대한민국에 있기는 있소?”

 “어럽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도둑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도둑들은 한참을 뒤져도 정말로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마구잡이로 물건을 내던지며 짜증을 냈다.

 “현대 회장 집이 뭐 이래!”

 <계속>

 [email protected]
button by close ad
button by close ad

[정주영 이야기⑩]도둑도 울고 간 '구두쇠 회장댁'

기사등록 2013/05/19 06:00:00 최초수정 2016/12/28 07:28:38

이시간 뉴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