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아이즈]첫 재선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미국은…

기사등록 2012/11/12 15:24:21

최종수정 2016/12/28 01:32:34

【서울=뉴시스】이수지 기자 = 버락 오바마(51)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2012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후보인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미국을 이끈 오바마 대통령은 경합주에서 선전하면서 대선 승리에 필요한 선거인단 270명을 무난히 확보했다.

 롬니 후보는 공화당의 전통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말을 자꾸 바꾼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이 확정된 뒤 트위터를 통해 “여러분 덕분에 재선에 성공했다”며 “고맙다”라는 메시지를 지지자들에게 남겼다.

 올 대선은 ‘최악의 돈 선거’ 또는 ‘최악의 네거티브 선거’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됐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각각 상원과 하원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경합주 9곳 중 8곳에서 승리

 오바마 대통령은 개표 초반 롬니 후보에 뒤지기도 했지만 핵심 경합주인 오하이오주(선거인단 18명)에서 앞서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는 위스콘신과 또 다른 최대 경합주인 플로리다에서 이기며 승기를 굳혔다.

 미국 언론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핵심 경합주에서 선전한 것이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보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오하이오주, 위스콘신주, 버지니아주, 아이오와주, 뉴햄프셔주, 콜로라도주, 네바다주, 플로리다주 등 경합주 9곳 중 8곳에서 승리했다. 오바마와 롬니 선거 캠프는 대선을 앞두고 경합주에 TV 광고로 10억 달러에 가까운 자금을 투입했다.

 반면 롬니 후보는 경합주 중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승리하는 데 그쳤다.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자택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본 롬니 후보는 오바마 대통령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올 대선의 주요 쟁점은 경제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경기회복 지연으로 대선에서 어려움이 예상됐지만 최근 실업률이 줄어들고 신규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허리케인 샌디로 미 동부 지역에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했지만 리더십을 발휘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오바마 저격수’로 통하는 공화당의 차세대 주자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를 비롯한 공화당 인사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위기 대응을 높이 평가했다. 시리아 벵가지 미국 영사관 피격으로 미국 대사를 포함해 등 4명이 사망한 데 대해 롬니 후보는 오바마 대통령이 나약한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선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시카고에서 개표를 지켜봤던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과 롬니 후보가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이는 모두 미국을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대선에서 패했지만 선전을 한 롬니 후보와 만나 앞으로 어떻게 협력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어려운 성장 과정, 한때 ‘방탕’

 미국 45대 대통령이 된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흑인 대통령이라는 점은 중요한 사실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다른 대통령들과 전혀 다른 성장 배경이 있다. 그의 어머니 앤 던햄은 캔자스 출신 백인이고 아버지 버락 후세인 오바마 1세는 케냐 출신 흑인이다. 그가 어릴 때 부모는 이혼했고 그 후 아버지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는 어릴 때 대부분 인도네시아와 외조부모가 사는 하와이에서 살았다.

성장하면서 혼혈 때문에 힘들었던 오바마 대통령은 회고록에 내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아버지의 부재도 고민이었던 오바마 대통령은 아버지를 신화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젊었을 때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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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오바마 대통령은 뉴욕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회사에 취직했지만, 시카고 지역사회 단체에서 일했다. 1988년 하버드 법대에 입학한 오바마 대통령은 재학 중 법대 학회지 ‘하버드 로 리뷰’의 흑인 최초 편집장이 됐다.

 1990년대 초 오바마 대통령은 시카고에서 유권자 등록 운동을 벌일 당시 시카고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고 인권과 지역 개발이 전문인 한 법률 회사에서 일했다. 그는 법률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미셸 로빈슨과 만나 결혼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여가 시간에 미 연방수사국(FBI) 체육관에서 농구 경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딸 말리아와 사샤의 학교 행사와 스포츠 행사에 시간을 내서 참석하고 아내와 종종 밤에 데이트를 즐긴다.

 1996년 오바마 대통령은 일리노이주(州)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2004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관심을 끄는 기조연설로 정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그해 11월 미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대통령선거 당시 민주당 경선에서 뉴욕 상원의원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을 누르고 대선 후보가 됐고 대선 경쟁에서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까지 누르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정력적 선거운동은 강력한 웅변술과 ‘희망과 변화’라는 주제로 이뤄졌다.

 ◇‘오바마 케어’ 건강보험 개혁

 2009년 1월20일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 때 낙관적 분위기가 만연했었다. 워싱턴 국립공원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는 추운 날씨에도 약 180만 명이 몰렸다. 그의 취임 당시 지지율은 68%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임기 중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과 동시에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간섭으로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축출했다. 그는 2011년 5월 미 해군 특수부대의 파키스탄에서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재가했다. 그는 이를 강한 국가 안보 정책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당시 경제적 위기가 선결 과제였고 이 문제가 재선에도 위협이 됐다. 취임 당시 일자리 8만 개가 사라졌다. 오바마 행정부 초기 그는 831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추진했고 자동차 회사들의 대출 기한을 연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국내 의제 중 가장 중요한 업적은 ‘오바마 케어’로 알려진 건강보험개혁법이다. 이 목적은 모든 미국인에게 저렴한 보험 및 더 많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돈이 많이 드는 연방정부의 간섭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2012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부분 미국인이 보험 혜택을 받지만, 위반하면 과태료를 내야하는 이 개혁법에 손을 들어줬다.

 오바마 대통령은 매혹적 의사소통의 달인으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냉정하다는 비판도 받고 있으며 하원 지도부와의 관계도 좋지 않다. 특히 공화당 후보 미트 롬니와의 TV 대선 토론회에서 그는 제대로 준비를 못 해 그의 준비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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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302호(11월13일~19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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