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짱방=AP/뉴시스】문예성 기자 = "나는 평생 그 어린 소녀('네이팜탄 소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지만 지금은 평화를 위한 선물로 받아들여요' 올해로 49세가 된 베트남 '네이팜 소녀' 킴 푹은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전쟁의 참혹함을 대변해주고 반전운동의 상징이 됐던 사진, 벌거벗은 베트남 소녀가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거리를 내달리는 모습의 사진이 알려진 지 40주년을 맞아 당시 그 사진을 공개했던 미국 AP통신이 당시 사진의 주인공 푹과 그 사진의 찍은 후잉 콩 우트를 인터뷰했다.
▲ 평화의 상징이 된 소녀
지난 1976년 6월8일 베트남 남부 짱방 지역의 카오다이 사원에서 사흘째 가족과 함께 은신하고 있는 9살 소녀 푹이 '현장을 벗어나라'는 주변 병사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지 불과 몇 초 만에 사원 주변에 네이팜탄이 날아들었다.
폭탄은 하늘에서 계란처럼 떨어져 내렸고, 마을 전체가 순식간에 주황색 불길에 휩싸였다.
네이팜탄 불길은 당시 무명옷을 입은 푹의 왼쪽 팔에 옮겨붙었고, 공포의 순간이었지만 푹은 옷을 벗어던지고 울부짖으면서 필사적으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때 이 사진의 작가인 우트를 포함해 외신기자들은 셔터를 눌렀고 푹은 의식을 잃었다.
불길은 그의 얼굴에는 상처를 주지 않았지만 전신에 30%가 3도 화상을 입혔다.
사진은 유명했지만 푹은 그 뒤 다시 작은 마을에 돌아가 평범한 삶은 사는 듯 했다.
의사를 꿈꾸던 푹은 노력 끝에 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또 다른 고난이 그의 삶에 찾아왔다.
베트남 전쟁의 참혹함을 대변해주고 반전운동의 상징이 됐던 사진, 벌거벗은 베트남 소녀가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거리를 내달리는 모습의 사진이 알려진 지 40주년을 맞아 당시 그 사진을 공개했던 미국 AP통신이 당시 사진의 주인공 푹과 그 사진의 찍은 후잉 콩 우트를 인터뷰했다.
▲ 평화의 상징이 된 소녀
지난 1976년 6월8일 베트남 남부 짱방 지역의 카오다이 사원에서 사흘째 가족과 함께 은신하고 있는 9살 소녀 푹이 '현장을 벗어나라'는 주변 병사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지 불과 몇 초 만에 사원 주변에 네이팜탄이 날아들었다.
폭탄은 하늘에서 계란처럼 떨어져 내렸고, 마을 전체가 순식간에 주황색 불길에 휩싸였다.
네이팜탄 불길은 당시 무명옷을 입은 푹의 왼쪽 팔에 옮겨붙었고, 공포의 순간이었지만 푹은 옷을 벗어던지고 울부짖으면서 필사적으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때 이 사진의 작가인 우트를 포함해 외신기자들은 셔터를 눌렀고 푹은 의식을 잃었다.
불길은 그의 얼굴에는 상처를 주지 않았지만 전신에 30%가 3도 화상을 입혔다.
사진은 유명했지만 푹은 그 뒤 다시 작은 마을에 돌아가 평범한 삶은 사는 듯 했다.
의사를 꿈꾸던 푹은 노력 끝에 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또 다른 고난이 그의 삶에 찾아왔다.

네이팜탄 소녀가 갖고 있는 홍보의 위력을 느꼈던 공산당 지도자는 푹으로 하여금 대학을 그만 두게 했고 그의 고향인 카오다이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푹는 "당시 삶은 한 잔의 블랙커피와 같았다"며 "삶의 고통으로 어쩌면 그 공격에서 자신의 사촌처럼 죽어버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1982년 새로운 기회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외신기자들의 도움으로 서독에서 치료를 받게 됐다. 이어 얼마 후 그녀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베트남 총리는 그가 쿠바로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곳에서 푹은 훗날 남편이 된 베트남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40년 후인 지금 푹은 두 아들을 둔 엄마가 됐고, 토론토 인근에서 살고 있다.
▲ 퓰리처상을 받는 사진기자
그날 당시 이 장면을 남긴 사람은 당시 21세의 청년이었던 AP통신의 우트 기자다.
우트는 "당시 그 소녀를 봤을 때 나도 울었다"며 "만약 내가 그를 돕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고, 나도 생명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사진을 찍은 뒤 우트는 푹을 차에 태워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고 이틀 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푹는 "당시 삶은 한 잔의 블랙커피와 같았다"며 "삶의 고통으로 어쩌면 그 공격에서 자신의 사촌처럼 죽어버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1982년 새로운 기회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외신기자들의 도움으로 서독에서 치료를 받게 됐다. 이어 얼마 후 그녀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베트남 총리는 그가 쿠바로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곳에서 푹은 훗날 남편이 된 베트남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40년 후인 지금 푹은 두 아들을 둔 엄마가 됐고, 토론토 인근에서 살고 있다.
▲ 퓰리처상을 받는 사진기자
그날 당시 이 장면을 남긴 사람은 당시 21세의 청년이었던 AP통신의 우트 기자다.
우트는 "당시 그 소녀를 봤을 때 나도 울었다"며 "만약 내가 그를 돕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고, 나도 생명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사진을 찍은 뒤 우트는 푹을 차에 태워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고 이틀 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후 그는 사이공의 사무실로 돌아가 사진을 현상했다. 하지만 당시 나체 사진을 다루지 않는 AP통신의 엄격한 규정 때문에 송고가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베테랑 기자인 호스트 파스는 단번에 규정 이상의 가치를 지닌 사진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송고를 강행했다. 이 사진을 빛을 보게 됐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우트의 사진은 어떤 장황한 글로도 담아낼 수 없었던 베트남 전쟁의 공포, 비극과 고통을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전달했고, 우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 두 사람의 만남
1989년 당시 AP통신 로스앤젤레스 지사에서 근무하는 우트는 성인이 된 푹과 재회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푹이 우트를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단독적인 만남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트는 푹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수 없었다.
푹은 훗날 "나는 우트 아저씨가 내가 진정한 자유를 얻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며 "하지만 나는 쿠바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연락할수 없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1992년 푹은 남편과 결혼했고 모스크바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쿠바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캐나다공항에서 연료를 공급하는 동안 푹은 우트와 연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우트는 푹의 근황을 세상에 알리길 원했지만 푹은 그냥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다며 이를 거절했다.
지금까지 AP에서 근무하는 우트는 최근 다시 베트남 짱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소녀'를 도울 수 있었다는 점에 너무나 행복하다"며 "지금 나는 그를 딸"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email protected]
하지만 베테랑 기자인 호스트 파스는 단번에 규정 이상의 가치를 지닌 사진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송고를 강행했다. 이 사진을 빛을 보게 됐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우트의 사진은 어떤 장황한 글로도 담아낼 수 없었던 베트남 전쟁의 공포, 비극과 고통을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전달했고, 우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 두 사람의 만남
1989년 당시 AP통신 로스앤젤레스 지사에서 근무하는 우트는 성인이 된 푹과 재회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푹이 우트를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단독적인 만남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트는 푹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수 없었다.
푹은 훗날 "나는 우트 아저씨가 내가 진정한 자유를 얻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며 "하지만 나는 쿠바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 연락할수 없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1992년 푹은 남편과 결혼했고 모스크바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쿠바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캐나다공항에서 연료를 공급하는 동안 푹은 우트와 연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우트는 푹의 근황을 세상에 알리길 원했지만 푹은 그냥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다며 이를 거절했다.
지금까지 AP에서 근무하는 우트는 최근 다시 베트남 짱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소녀'를 도울 수 있었다는 점에 너무나 행복하다"며 "지금 나는 그를 딸"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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