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하도겸의 ‘일본 속 우리 신불(神佛)을 찾아서’ <3>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고대사회에서 종교나 신앙의 역할은 지금보다 매우 컸을 것이다. 제정일치(祭政一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와 신앙은 지배층들의 이데올로기로써 백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신권(神權)정치 즉 왕이 신으로서의 권력을 가졌다고까지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한다. 신라 시대 때 법흥왕과 진흥왕이 이를 표방했다.
고대사회에서 종교와 신앙의 중심지는 정치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한시대의 소도가 그러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천 년을 넘게 일본 속에서 신라라는 이름을 지켜온 신사들은 그 자체로 연구대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신라에서 직접 건너온 사람들과 그 후예가 그들의 신과 조상을 기렸던 곳이 바로 신라신사다. 신라의 신들을 모신 신사는 신라에서 건너간 신라 사람들의 신앙적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 신사는 신라 이주민들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나아가 민속적으로는 제사 전후에 벌어지는 축제의 장소이기도 했다.
신라라는 이름이 천 년이나 변하지 않고 지속한 것은 신라인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집단의식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닭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라신화의 내용을 믿고 자신들이 닭의 후손이므로 현재까지도 닭을 먹지 않는 습관을 지닌 지역이 일본 내에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쓰루가 지역의 시로기(백목 : 白木)신사가 있는 시라기 마을에는 신라 도래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시조신의 탄생내력을 기려 닭도 기르지 않고 달걀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신라에서 온 후예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믿고 지키는 것이다.
신사란 고대 신앙의 변천이 말해주듯이 원시적인 자연숭배의 면도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시대 이후에는 그들의 시조를 비롯한 선조를 모신 사당으로서의 성격이 점점 강해진다. 결국, 신라인들이 그들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 바로 신라신사다. 이러한 주장이 맞는다면 이에 대한 추적은 한민족의 디아스포라(Diaspora·이주)를 연구하는데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으로 믿어진다. 다시 말해서 신라신사의 존재를 찾아내면 신라인 거주지의 자취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 말로는 신라이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시라기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시라기라는 발음에 대해 신라가 아닌 다른 한자들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 매우 많다. 앞에서 나온 시로기(백목 : 白木)를 비롯해 ‘백성(白城)’ ‘백귀(白鬼)’ ‘신로기(信露貴)’ ‘지목(志木)’ ‘백정(白井)’ ‘백석(白石)’ ‘백발(白髮)’ ‘백자(白子)’ ‘백빈(白濱)’ ‘백기(白磯)’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시라기 또는 시로기 등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일본식 한자표기다. 따라서 백성신사 역시 시라기진자로 발음되며 백목신사 역시 시로기진자로 발음되는 신라신사다.
이러한 신라신사의 일본식 표기는 일본에 수백 군데 존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래 들어 의도적으로 개명(改名)이 이뤄져 신라라는 그 원래 이름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져간다.
신라신사라고 해서 신이 모두 신라신은 아니다. 보통은 천일창(天日倉)처럼 신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나 신라인들의 선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과 같이 신라에서 이주한 사람들과는 그다지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존재도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일본인들에게 은혜를 베푼 신도 더러, 보인다. 오늘 소개할 곳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인 신라선신당이다.
신라선신당은 온조지(園城寺) 또는 미이데라(三井寺)로 불리는 천태종 본사인 연력사의 말사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시가현(滋賀縣) 오쓰시(大津市)에 있다. 이곳은 신라계 도래인 씨족으로 알려진 오토미씨(大友氏)의 거주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특히, 원성사는 국보인 대웅전격인 금당(金堂)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재와 함께 고려대장경이 소장돼 있어 우리에게도 친숙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은 원성사 경내의 암자나 다름없는 사찰로 신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보살을 모신 것이 아니라 신라선신을 모신 곳이기 때문에 선신당이라고 한다. 우리의 산신각처럼 일본 무속에서 발전한 신도(神道)와 불교가 하나가 된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일면을 볼 수 있다.
홍문천황릉(弘文天皇陵) 근처에 있는 신라선신당은 평소 내부 관람은 불가능하다. 다만, 신사의 궁사(宮事)를 겸한 스님이 절 입구에 상주하고 있어 문으로 들어가서 잘만 얘기하면 건물은 볼 수 있게 해준다. 본전 내는 자물쇠로 잠겨 있고, 그 내부의 신라명신상은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저기에 그 신상의 사진이 실려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신라명신좌상(新羅明神坐像)과 14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신라선신당 건물 역시 일본의 국보이다.
지증대사(智證大師) 원진(圓珍)이 858년에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배에서 귀국을 도와주며 호법을 약속해준 신라명신을 만났다. 이에 신라선신당을 짓게 된 것인데, 신사에서는 신라명신이 스사나오노미코토(素盞嗚命)와 이소타케루노카미(五十猛神)라고 한다. 이소타케루노카미는 스사나오노미코토의 아들이다.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이들이 신라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듯이 이 둘 모두를 일본명신이 아닌 신라명신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점을 일본인들은 외면하고 있다.
신라명신은 일본에서는 뜻밖에 꽤 유명한 신인 듯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유명한 명문대가인 미나모토씨(원씨 : 源氏)의 중시조격인 미나모토노요리요시(源賴義)가 신라명신에게 참배한 후 일본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기틀을 마련한 전투에서 대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3남으로 일본 전국시대 가장 유명한 무장집안인 다케다(武田)가문 등의 시조가 된 미나모토노요시미츠(源義光)도 신라명신당에서 성년식을 거행했다. 그리고는 신라사부로(新羅三郞)로 개명했는데 이는 신라명신께서 주신 세 번째 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처럼 원래 신라명신은 고승들의 항해 안전을 도와주며 불법을 수호해 주던 호법신이었다. 그리고 이가 일본의 중세를 이끈 원씨 전쟁의 신에서 점차 일본 호국신이 되어 간 것이다.(여성불교)
국립민속박물관 큐레이터 [email protected]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고대사회에서 종교나 신앙의 역할은 지금보다 매우 컸을 것이다. 제정일치(祭政一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와 신앙은 지배층들의 이데올로기로써 백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신권(神權)정치 즉 왕이 신으로서의 권력을 가졌다고까지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한다. 신라 시대 때 법흥왕과 진흥왕이 이를 표방했다.
고대사회에서 종교와 신앙의 중심지는 정치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한시대의 소도가 그러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천 년을 넘게 일본 속에서 신라라는 이름을 지켜온 신사들은 그 자체로 연구대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신라에서 직접 건너온 사람들과 그 후예가 그들의 신과 조상을 기렸던 곳이 바로 신라신사다. 신라의 신들을 모신 신사는 신라에서 건너간 신라 사람들의 신앙적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 신사는 신라 이주민들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나아가 민속적으로는 제사 전후에 벌어지는 축제의 장소이기도 했다.
신라라는 이름이 천 년이나 변하지 않고 지속한 것은 신라인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집단의식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닭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라신화의 내용을 믿고 자신들이 닭의 후손이므로 현재까지도 닭을 먹지 않는 습관을 지닌 지역이 일본 내에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쓰루가 지역의 시로기(백목 : 白木)신사가 있는 시라기 마을에는 신라 도래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시조신의 탄생내력을 기려 닭도 기르지 않고 달걀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신라에서 온 후예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믿고 지키는 것이다.
신사란 고대 신앙의 변천이 말해주듯이 원시적인 자연숭배의 면도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시대 이후에는 그들의 시조를 비롯한 선조를 모신 사당으로서의 성격이 점점 강해진다. 결국, 신라인들이 그들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 바로 신라신사다. 이러한 주장이 맞는다면 이에 대한 추적은 한민족의 디아스포라(Diaspora·이주)를 연구하는데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으로 믿어진다. 다시 말해서 신라신사의 존재를 찾아내면 신라인 거주지의 자취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 말로는 신라이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시라기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시라기라는 발음에 대해 신라가 아닌 다른 한자들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 매우 많다. 앞에서 나온 시로기(백목 : 白木)를 비롯해 ‘백성(白城)’ ‘백귀(白鬼)’ ‘신로기(信露貴)’ ‘지목(志木)’ ‘백정(白井)’ ‘백석(白石)’ ‘백발(白髮)’ ‘백자(白子)’ ‘백빈(白濱)’ ‘백기(白磯)’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시라기 또는 시로기 등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일본식 한자표기다. 따라서 백성신사 역시 시라기진자로 발음되며 백목신사 역시 시로기진자로 발음되는 신라신사다.
이러한 신라신사의 일본식 표기는 일본에 수백 군데 존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래 들어 의도적으로 개명(改名)이 이뤄져 신라라는 그 원래 이름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져간다.
신라신사라고 해서 신이 모두 신라신은 아니다. 보통은 천일창(天日倉)처럼 신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나 신라인들의 선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과 같이 신라에서 이주한 사람들과는 그다지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존재도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일본인들에게 은혜를 베푼 신도 더러, 보인다. 오늘 소개할 곳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인 신라선신당이다.
신라선신당은 온조지(園城寺) 또는 미이데라(三井寺)로 불리는 천태종 본사인 연력사의 말사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시가현(滋賀縣) 오쓰시(大津市)에 있다. 이곳은 신라계 도래인 씨족으로 알려진 오토미씨(大友氏)의 거주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특히, 원성사는 국보인 대웅전격인 금당(金堂)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재와 함께 고려대장경이 소장돼 있어 우리에게도 친숙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은 원성사 경내의 암자나 다름없는 사찰로 신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보살을 모신 것이 아니라 신라선신을 모신 곳이기 때문에 선신당이라고 한다. 우리의 산신각처럼 일본 무속에서 발전한 신도(神道)와 불교가 하나가 된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일면을 볼 수 있다.
홍문천황릉(弘文天皇陵) 근처에 있는 신라선신당은 평소 내부 관람은 불가능하다. 다만, 신사의 궁사(宮事)를 겸한 스님이 절 입구에 상주하고 있어 문으로 들어가서 잘만 얘기하면 건물은 볼 수 있게 해준다. 본전 내는 자물쇠로 잠겨 있고, 그 내부의 신라명신상은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저기에 그 신상의 사진이 실려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신라명신좌상(新羅明神坐像)과 14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신라선신당 건물 역시 일본의 국보이다.
지증대사(智證大師) 원진(圓珍)이 858년에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배에서 귀국을 도와주며 호법을 약속해준 신라명신을 만났다. 이에 신라선신당을 짓게 된 것인데, 신사에서는 신라명신이 스사나오노미코토(素盞嗚命)와 이소타케루노카미(五十猛神)라고 한다. 이소타케루노카미는 스사나오노미코토의 아들이다.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이들이 신라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듯이 이 둘 모두를 일본명신이 아닌 신라명신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점을 일본인들은 외면하고 있다.
신라명신은 일본에서는 뜻밖에 꽤 유명한 신인 듯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유명한 명문대가인 미나모토씨(원씨 : 源氏)의 중시조격인 미나모토노요리요시(源賴義)가 신라명신에게 참배한 후 일본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기틀을 마련한 전투에서 대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3남으로 일본 전국시대 가장 유명한 무장집안인 다케다(武田)가문 등의 시조가 된 미나모토노요시미츠(源義光)도 신라명신당에서 성년식을 거행했다. 그리고는 신라사부로(新羅三郞)로 개명했는데 이는 신라명신께서 주신 세 번째 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처럼 원래 신라명신은 고승들의 항해 안전을 도와주며 불법을 수호해 주던 호법신이었다. 그리고 이가 일본의 중세를 이끈 원씨 전쟁의 신에서 점차 일본 호국신이 되어 간 것이다.(여성불교)
국립민속박물관 큐레이터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