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떼돈 번 정미소 주인은 거의 일본인"

기사등록 2011/12/04 14:40:35

최종수정 2016/12/27 23:08:18

김중규 학예사 "시민들은 대부분 매갈이꾼과 미선공"

【군산=뉴시스】고석중 기자 = 흔히 방앗간이라고 부르는 정미소는 최근까지 부(富)의 상징이며 권력을 의미했다. 이 같은 정미소의 번영은 일제강점기에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4일 김중규 군산시 학예연구사(군산근대문화역사박물관 관리계장)로부터 근대문화유산의 보고인 전북 군산지역 정미소 거리에 얼킨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 학예사는 "한일 합방후 전군도로의 개통과 군산선 철도의 완공으로 전북의 모든 도로는 군산으로 통하게 됐고 이 길을 따라 가을이면 군산항으로 누런 황금빛의 볏가마니들이 몰려 들어왔다"고 말문을 열었다.

 여기에 군산 옥구의 일본인 농장에서 수확되는 볏가마니도 가세해 산더미처럼 쌓이면서 가장 필요한 공장이 바로 쌀을 가공하는 정미소였다는 것.

 ◇일본군 러·일 전쟁때 군산에 기계식 정미소 들여왔다.

 군산 지역에서 기계식 정미소가 처음 생긴 것은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면서였다. 당시 일본군은 전쟁에 이용될 군량미를 비밀리에 수집해 조선시대부터 쌀창고로 이용되던 군산항의 창고에 보관했다.

 일본군들은 이 쌀을 군량미로 보내기 위해 3대의 마찰식 정미기를 들여와 가공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군산에는 족답식 탈곡기 2대와 석유 발동기를 이용한 소규모 정미소가 한 곳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와 30년대 떼돈을 버는 사업으로 소문나면서 정미소는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문을 열었는데 정미소의 주인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군산에서 만석 이상을 생산하는 정미소가 14곳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5만석 이상을 생산하는 곳은 가등, 조일, 조선, 화강, 낙합, 육석 정미소 등 6곳이었다.

 이들 정미소는 생산된 쌀을 곧바로 배에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철도변이나 항구 옆에 자리잡았고 이곳을 정미소 거리라고 불렀다.

 군산의 정미소가 이처럼 호황을 누린 것은 값싼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군산은 주변의 농촌 지역에서 일본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유랑 농민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시민의 대부분은 매갈이꾼과 미선공이었다.

 매갈이간은 흙으로 만든 큰 메(맷돌)를 소를 이용해 돌리며 벼를 매통에 갈아서 왕겨만 벗기고 속겨는 벗기지 아니한 쌀을 만드는 우리 민족 전통의 방앗간을 말한다.

 이곳에서 쌀가마를 짊어지는 일을 하던 남자들을 매갈이꾼이라고 불렀다. 또 도정한 쌀을 유리판에 놓고 좋은 쌀만 가려내는 미선소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부녀자들을 미선공이라 불렀다.

 1924년의 경우 군산 전체 미선공은 2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군산의 한국인 인구가 1만4200명인 점을 보면 한국 성인 여성들 대부분이 미선공으로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미선공들의 애환은 소설 '아리랑'에서 수국이를 통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당시 미선공들은 일본인 기술자와 감독들로부터 각종 모욕과 성적 희롱을 당해 눈물 젖은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미선공들은 1920년 군산 미선공조합이라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야학을 운영하며 조직적으로 일본 자본가들에게 맞서 20년대 후반 독립운동의 맥을 잇는 용기를 보여준다.

 ◇미선공 글을 깨우치자, 야학 문열다.

 1921년 군산의 미선공을 대표해 임만춘, 이성옥 등이 문맹의 미선공들에게 글을 깨우치는 사회교육을 목적으로 미선공·매가리 조합을 조직한다.

 기금 1500여 원을 모아 나무와 기와를 날라 10여 칸의 조합사무소를 신축하고 1921년 9월20일 낙성식을 했다. 이어 10월1일부터 미선공 여성을 대상으로 야간 학교의 문을 열었다. 

 그 위치는 사립 양영학교 건물의 바로 뒤쪽으로 당시 이들 학교는 1920년대 사회 분위기였던 노동 단체들의 노동 야학 개최와 야학을 통한 연극, 학예회의 개최로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학교가 자리한 창성동의 산동네는 신문 기자와 사회운동가들이 들락거리는 곳이었고 일본 경찰의 요주의 관찰 대상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곳은 1920년대 군산의 미선공 정미소 항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군산 미선공 정미소 조합의 항쟁이 시작됐다.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가 생긴 이래 전국에서 8번째로 군산의 노동 운동가와 진보적 지식인, 노동자들이 군산부지회(1920년 8월 23일)를 만들었다.

 이후 조직이 확장되면서 일본 자본가와의 한판 투쟁을 예고했다. 미선공의 첫 파업은 평안남도 진남포와 인천에서 일어났다. 일본인 검사원의 몸수색과 성희롱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군산도 수많은 정미소가 있어 노동조합의 규모가 매우 컸다. 군산 파업은 1924년 3월16일, 군산 낙합 정미소 매갈이 직공이 처음 시작했다.

 이 파업은 정미소에서 일방적으로 임금을 80% 내리면서 시작된 가운데 파업과 해고 조합원 40명의 정미소 습격 등으로 일주일만에 임금 93% 회복이라는 완전 승리를 거둔다.

 이후 군산 정미소도 1000여 명이 동맹 파업(1926년 11월16일)으로 승리를 하게된다. 1927년에는 군산시 정미소 직원들의 총파업이 이뤄졌다.

 또 군산 조일 정미소 미선공 파업(1930년 6월21일)과 가등 정미소 미선공 100여 명 파업(1934년 1월16일) 등 투쟁이 이어져 군산은 전국적으로도 노동운동의 힘이 강한 곳으로 알려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김 학예사는 "군산시가 근대문화도시로서 장기 프로젝트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핍박과 수탈의 치욕스런 역사를 왜 보존하느냐는 반대 견해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근대문화유산들은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 속에서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에 대한 자각의 기회가 되는 한편 역사적 잘못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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