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이득수 기자 = 개그맨 세상이다. 어딜 가나 개그맨과 개그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개그맨이 이젠 정치인보다 더 힘이 있는 세상이 된 것 같다.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국회의원들도 요즘엔 개그맨과 맞장을 떠봐야 별 승산이 없다. 개그의 소재를 제공하는 직업인의 하나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개그맨들의 풍자와 우스갯소리와 풍자에 자빠지면서 속 시원해 한다. 생활의 고통과 일터에서 쌓인 울화와 열등감을 씻어내며 대리만족을 얻는다.
이런 일은 정부나 국회의원이 결코 해내지 못한다. 서민들을 웃게 하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개그맨들은 국회의원들보다 더 존경 받을 자격이 있다. 만일 총선에서 현역 국회의원과 ‘개콘(개그콘서트)’ ‘개그투나잇’ ‘웃고또웃고’에 나오는 개그맨이 대결한다면 아마도 개그맨이 당선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개그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용감하게 금단의 구역에 쳐 들어가서 근엄한 체 하는 힘 있는 자들을 저잣거리로 끌어내 알몸뚱이와 밑천이 다 드러나도록 까발리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서민들은 누적된 심신의 피로와 억압된 욕구 배설하고 다시 고단한 일터로 나갈 힘이 생긴다. 직업에 충실히 종사한 덕분에 어느 개그맨은 진짜로 정치인한테 뒤통수를 맞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50년 60년대에는 이런 개그맨의 역할을 만담가들이 해냈다. TV가 없었던, 라디오 유성기 그 시대에 최고의 대중 스타는 만담가였다. 물론 문화 수준과 시대 상황이 달랐으므로 개그맨과 만담가를 정확히 대칭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고춘자·장소팔 콤비가 벌이는 재담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재미였다.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었던 시대에 라디오를 둘러 앉아 KBS 중앙방송의 만담을 듣는 시간은 대단한 낙이었다.
어렵던 시절 우리 국민들에게 웃음을 전해주었던 만담을 보존하기 위해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 종로구 묘동 종묘 담장 옆길에 위치한 아담한 건물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한국만담보존회가 총 본산이다.
회장은 만담가로 유명했던 김용운(88)씨이고, 실무를 맡고 있는 상임부회장은 만담의 대명사인 장소팔 선생의 아들 장광팔(60)씨이다.
요즘엔 만담이 뭔지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아는 사람이라도 “아직도 만담이 존재하나”라고 의문을 가질 정도로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예전 만담가들의 인기도를 지금의 수치로 환산한다면 아마도 가수 소녀시대와 MC 강호동, 개그맨 김제동을 합친 것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았으리라.
고춘자 장소팔 김용운은 60년대에 초등학교 1, 2학년 코흘리개부터 70, 80 노인들까지 전국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에 이처럼 남녀노소에 모두에게 유명하고 폭넓은 인기가 있는 연예인이 있을는지 자신하기 어렵다. 직업이 세분화되듯이 연예인들의 인기판도도 역시 세대별 계층별 그리고 정치적 좌표에 따라 세분화 되고 따로따로인 것 같다.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개그맨들에게는 불만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만담가들을 존경해야 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만담가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개그맨들이 설 자리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만담가와 개그맨은 연기방식이 같으면서도 다르다. 만담은 오로지 대사만으로 청중을 웃겼지만, 개그맨은 대사에 슬랩스틱 등 과장된 몸동작을 가미해 웃음을 유발한다.
개그(gag)라는 영어는 익살맞은 대사, 개그맨은 익살꾼(재담꾼)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만담가가 사실상 개그맨이다. 만담가가 영어단어의 개그맨과 더 가깝다는 의미다.
만담보존회 장 부회장은 “대중문화의 총아로 각광받고 있는 개그의 뿌리가 만담이라면 만담의 원류는 조선시대의 ‘재담(才談)’”이라고 말한다.
그는 “재담의 명인으로는 정수동, 김병연(김삿갓)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과 오성 이항복이 있다”라며 “그 이전 고려조에도 재담이 있었다는 것이 고려시대에 민담과 풍속을 모은 ‘패관문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담의 최후 전수자는 고종 때 ‘가무별감(歌舞別監)’이라는 특별한 벼슬까지 지낸 박춘재 선생이며, 만담보존회는 이 분을 만담의 뿌리가 되는 인물로 친다. 박춘재 선생은 고종의 측근으로 재담으로 임금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잘 해내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경기 서도 소리의 명창이기도 한 그는 막 축음기가 발명된 지 얼마 안 돼 “재담과 서도 소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으로 레코딩을 다녀오고 이때 녹음한 음반이 간간히 발견되기도 한다.
신불출은 재담을 대신해 ‘만담’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다. 일제 때 공산주의 계열인 카프문학 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해방 직후 월북해 북한 문화계의 고위직으로 활약했으나, 6·25 직후 박헌영 등 남로당 계열을 숙청할 때 행방불명 됐다. 웃음과 독재체재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유학파인 신불출이 만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것 때문에 만담의 원조가 일본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장 부회장은 “일본에는 만자이(漫才)라는 전통 공연이 있는데 만담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무릎 꿇고 혼자서 희로애락을 풀어가는 형식이다”고 설명했다.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일본은 만자이를 매주 공영방송 NHK에서 장시간 중계한다. 중국에는 한국의 만담과 비견되는 ‘상성(相聲)’이 해마다 연말경연대회를 열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장 부회장은 “동양 3국 중에서 한국에서만 만담이 사라질 위기”라며 “문화정책 차원에서 적극 보존 사업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온 국민을 즐겁게 해주던 만담은 70년대 초반 TV가 대중화하면서 배삼룡 구봉서 권귀옥 심철호 이기동 등 기라성 같은 코미디언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서서히 물러났다. 대사만 주고받는 정적인 연기인 만담은 과장된 액션을 요구하는 TV에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인기도 급속히 코미디언 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만담은 전국 장터마당과 극장식 패키지쇼 무대를 기반으로 90년대까지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해왔다. 우리나라의 희극장르의 계보는 만담가-코미디언-개그맨으로 이어져 왔고 인물 계보는 박춘재-신불출-장소팔 고춘자 이은관-김용운으로 이어졌다.
만담 보존운동은 지난 1996년 초 당시 종로문화원을 설립한 반재식(75)씨가 전 종로문화원장이 서울시에 제안해서 가동되기 시작됐다. 반 원장은 돈화문에서 단성사까지의 돈화문로를 국악로로 지정하자는 운동을 펼쳐 성사시킨 장본인인데 이때 장소팔 선생을 만나 만담보존 운동을 권유하고 사재를 털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반 전 원장은 자신의 종로구 묘동 4층 건물의 1개 층을 내놓아 만담보존회 사무실을 마련해 주고, 서울시에 사양한 대중문화의 재생과 보존 육성의 필요성을 역설해 얼마간의 지원도 받아냈다. 지금의 보존회 사무실도 반 전 원장의 건물에 입주해 있다. 그는 희귀한 만담 음반과 대본들을 발굴하고 많은 비용을 들여 수집했다. 만담보존회와 함께 여러 권의 한국의 만담사를 엮어냈고, 만담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
한국 만담가의 상징적 존재로서 만담보존 운동을 펼치던 중 작고한 장소팔(1922~2002년) 선생은 서울 인사동 출신이다. 장 부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교 학예회 때 서유기의 손오공 역할을 맡아 연기했는데 이를 지켜본 유명 만담가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만담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신불출(월북)을 사사했다고 한다.
만담의 원조 격인 신불출은 1933년 만담 음반 ‘익살맞은 대머리’를 내 크게 히트해 일제강점기에는 최고 인기 스타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제자인 장소팔 선생은 1946년 경성방송국(현 KBS)로 데뷔해 민요만담은 명창들이 8도민요를 부르면 이를 소재로 만담을 이어가는 ‘민요만담’을 선보였다.
장 선생은 1954년 군 위문공연 때 만담 파트너인 고춘자씨(1995년 작고)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고춘자씨는 악극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장·고 콤비는 ‘속사포식’ 만담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랬다.
만담보존회는 장소팔 선생 작고 후 그의 후배인 김용운씨가 회장을 맡았다.
장 부회장은 2009년 12월에 장소팔 선생의 동상을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청계천7가 다산교 앞에 세웠다. 매주 만담교실을 열어 후진 양성과 만담소재를 개발하는 일과 함께 만담의 역사 정리 작업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정겨운 개그인 만담을 다시 접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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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54호(12월5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개그맨들의 풍자와 우스갯소리와 풍자에 자빠지면서 속 시원해 한다. 생활의 고통과 일터에서 쌓인 울화와 열등감을 씻어내며 대리만족을 얻는다.
이런 일은 정부나 국회의원이 결코 해내지 못한다. 서민들을 웃게 하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개그맨들은 국회의원들보다 더 존경 받을 자격이 있다. 만일 총선에서 현역 국회의원과 ‘개콘(개그콘서트)’ ‘개그투나잇’ ‘웃고또웃고’에 나오는 개그맨이 대결한다면 아마도 개그맨이 당선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개그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용감하게 금단의 구역에 쳐 들어가서 근엄한 체 하는 힘 있는 자들을 저잣거리로 끌어내 알몸뚱이와 밑천이 다 드러나도록 까발리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서민들은 누적된 심신의 피로와 억압된 욕구 배설하고 다시 고단한 일터로 나갈 힘이 생긴다. 직업에 충실히 종사한 덕분에 어느 개그맨은 진짜로 정치인한테 뒤통수를 맞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50년 60년대에는 이런 개그맨의 역할을 만담가들이 해냈다. TV가 없었던, 라디오 유성기 그 시대에 최고의 대중 스타는 만담가였다. 물론 문화 수준과 시대 상황이 달랐으므로 개그맨과 만담가를 정확히 대칭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고춘자·장소팔 콤비가 벌이는 재담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재미였다.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었던 시대에 라디오를 둘러 앉아 KBS 중앙방송의 만담을 듣는 시간은 대단한 낙이었다.
어렵던 시절 우리 국민들에게 웃음을 전해주었던 만담을 보존하기 위해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 종로구 묘동 종묘 담장 옆길에 위치한 아담한 건물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한국만담보존회가 총 본산이다.
회장은 만담가로 유명했던 김용운(88)씨이고, 실무를 맡고 있는 상임부회장은 만담의 대명사인 장소팔 선생의 아들 장광팔(60)씨이다.
요즘엔 만담이 뭔지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아는 사람이라도 “아직도 만담이 존재하나”라고 의문을 가질 정도로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예전 만담가들의 인기도를 지금의 수치로 환산한다면 아마도 가수 소녀시대와 MC 강호동, 개그맨 김제동을 합친 것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았으리라.
고춘자 장소팔 김용운은 60년대에 초등학교 1, 2학년 코흘리개부터 70, 80 노인들까지 전국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에 이처럼 남녀노소에 모두에게 유명하고 폭넓은 인기가 있는 연예인이 있을는지 자신하기 어렵다. 직업이 세분화되듯이 연예인들의 인기판도도 역시 세대별 계층별 그리고 정치적 좌표에 따라 세분화 되고 따로따로인 것 같다.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개그맨들에게는 불만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만담가들을 존경해야 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만담가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개그맨들이 설 자리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만담가와 개그맨은 연기방식이 같으면서도 다르다. 만담은 오로지 대사만으로 청중을 웃겼지만, 개그맨은 대사에 슬랩스틱 등 과장된 몸동작을 가미해 웃음을 유발한다.
개그(gag)라는 영어는 익살맞은 대사, 개그맨은 익살꾼(재담꾼)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만담가가 사실상 개그맨이다. 만담가가 영어단어의 개그맨과 더 가깝다는 의미다.
만담보존회 장 부회장은 “대중문화의 총아로 각광받고 있는 개그의 뿌리가 만담이라면 만담의 원류는 조선시대의 ‘재담(才談)’”이라고 말한다.
그는 “재담의 명인으로는 정수동, 김병연(김삿갓)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과 오성 이항복이 있다”라며 “그 이전 고려조에도 재담이 있었다는 것이 고려시대에 민담과 풍속을 모은 ‘패관문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담의 최후 전수자는 고종 때 ‘가무별감(歌舞別監)’이라는 특별한 벼슬까지 지낸 박춘재 선생이며, 만담보존회는 이 분을 만담의 뿌리가 되는 인물로 친다. 박춘재 선생은 고종의 측근으로 재담으로 임금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잘 해내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경기 서도 소리의 명창이기도 한 그는 막 축음기가 발명된 지 얼마 안 돼 “재담과 서도 소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으로 레코딩을 다녀오고 이때 녹음한 음반이 간간히 발견되기도 한다.
신불출은 재담을 대신해 ‘만담’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다. 일제 때 공산주의 계열인 카프문학 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해방 직후 월북해 북한 문화계의 고위직으로 활약했으나, 6·25 직후 박헌영 등 남로당 계열을 숙청할 때 행방불명 됐다. 웃음과 독재체재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유학파인 신불출이 만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것 때문에 만담의 원조가 일본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장 부회장은 “일본에는 만자이(漫才)라는 전통 공연이 있는데 만담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무릎 꿇고 혼자서 희로애락을 풀어가는 형식이다”고 설명했다.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일본은 만자이를 매주 공영방송 NHK에서 장시간 중계한다. 중국에는 한국의 만담과 비견되는 ‘상성(相聲)’이 해마다 연말경연대회를 열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장 부회장은 “동양 3국 중에서 한국에서만 만담이 사라질 위기”라며 “문화정책 차원에서 적극 보존 사업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온 국민을 즐겁게 해주던 만담은 70년대 초반 TV가 대중화하면서 배삼룡 구봉서 권귀옥 심철호 이기동 등 기라성 같은 코미디언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서서히 물러났다. 대사만 주고받는 정적인 연기인 만담은 과장된 액션을 요구하는 TV에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인기도 급속히 코미디언 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만담은 전국 장터마당과 극장식 패키지쇼 무대를 기반으로 90년대까지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해왔다. 우리나라의 희극장르의 계보는 만담가-코미디언-개그맨으로 이어져 왔고 인물 계보는 박춘재-신불출-장소팔 고춘자 이은관-김용운으로 이어졌다.
만담 보존운동은 지난 1996년 초 당시 종로문화원을 설립한 반재식(75)씨가 전 종로문화원장이 서울시에 제안해서 가동되기 시작됐다. 반 원장은 돈화문에서 단성사까지의 돈화문로를 국악로로 지정하자는 운동을 펼쳐 성사시킨 장본인인데 이때 장소팔 선생을 만나 만담보존 운동을 권유하고 사재를 털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반 전 원장은 자신의 종로구 묘동 4층 건물의 1개 층을 내놓아 만담보존회 사무실을 마련해 주고, 서울시에 사양한 대중문화의 재생과 보존 육성의 필요성을 역설해 얼마간의 지원도 받아냈다. 지금의 보존회 사무실도 반 전 원장의 건물에 입주해 있다. 그는 희귀한 만담 음반과 대본들을 발굴하고 많은 비용을 들여 수집했다. 만담보존회와 함께 여러 권의 한국의 만담사를 엮어냈고, 만담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
한국 만담가의 상징적 존재로서 만담보존 운동을 펼치던 중 작고한 장소팔(1922~2002년) 선생은 서울 인사동 출신이다. 장 부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교 학예회 때 서유기의 손오공 역할을 맡아 연기했는데 이를 지켜본 유명 만담가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만담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신불출(월북)을 사사했다고 한다.
만담의 원조 격인 신불출은 1933년 만담 음반 ‘익살맞은 대머리’를 내 크게 히트해 일제강점기에는 최고 인기 스타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제자인 장소팔 선생은 1946년 경성방송국(현 KBS)로 데뷔해 민요만담은 명창들이 8도민요를 부르면 이를 소재로 만담을 이어가는 ‘민요만담’을 선보였다.
장 선생은 1954년 군 위문공연 때 만담 파트너인 고춘자씨(1995년 작고)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고춘자씨는 악극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장·고 콤비는 ‘속사포식’ 만담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랬다.
만담보존회는 장소팔 선생 작고 후 그의 후배인 김용운씨가 회장을 맡았다.
장 부회장은 2009년 12월에 장소팔 선생의 동상을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청계천7가 다산교 앞에 세웠다. 매주 만담교실을 열어 후진 양성과 만담소재를 개발하는 일과 함께 만담의 역사 정리 작업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정겨운 개그인 만담을 다시 접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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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54호(12월5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