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 어떻게 잊겠어…" 恨풀지 못한채 꺼져가는 위안부 할머니들

기사등록 2011/08/14 06:00:00

최종수정 2016/12/27 22: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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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이제 70명…고령에 건강악화로 빠르게 줄어

【서울=뉴시스】신정원 기자 = 12일 오후 이옥선 할머니(84)는 경기 광주 시내의 한 마트에 들렀다. 빈 바구니를 들고 아이스크림 판매대로 간 할머니는 아이스바를 쓸어 담기 시작했다. 바구니가 30여개의 아이스크림으로 가득 차자 이 할머니는 "밤마다 속불이 나서 깜짝깜짝 놀라. 그럴 때마다 이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진정이 돼"라고 말했다.

 1940년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겪으며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였다.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 있는 할머니의 방 안 냉동실에는 지난주에 사놓은 아이스바 10개가 더 있었다. 매일 밤 그것들을 서너개씩 꺼내 먹으며 할머니는 과거와 싸우고 있었다.

 이 할머니가 일본인들에게 끌려 간 것은 1942년 7월29일. 할머니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원래는 부산 보수동에서 태어나서 15살까지 쭉 살았어. 그런데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서 학교에는 못가고 15살부터 울산에서 남의집살이를 했지. 그러다 하루는 집주인 심부름을 하러 가고 있는데 남자 둘이서 나를 납치하는 거야. 대낮에 말이야. 그렇게 중국으로 끌려 갔지. 부모님은 내가 어디 갔는지 알 길이 없었을 거야."

 그렇게 할머니는 기차에 태워져 중국 연변으로 가게 됐다. 처음에는 비행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활주로를 청소하고 비행기를 닦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위안소로 끌려가 3년을 버텼다.

 주로 장교급 군인들이 위안소를 찾았다. 그들은 위안부를 자신의 마음대로 하려고만 했다. 그럴 때마다 싸움이 났다. 위안부도 자신의 의지를 쉽게 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은 도살장이나 다름없었어.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때리고 그래도 반항하면 발로 차고. 총질을 하거나 칼질을 하기도 했지. 그러다 죽은 사람도 여럿이야. 거기에 굶어 죽고 시달려 죽고 병들어 죽고. 그렇게 죽으면 바깥에 아무렇게나 버려놨어."

 할머니 몸 이곳저곳에도 그날의 상흔이 남아있다. 오른팔에는 반항하는 자신에게 일본군이 칼을 들자 그것을 쳐내며 난 상처가 있다. 오른발등에 있는 것은 위안소에서 도망치다 잡힌 할머니의 발을 일본군 헌병이 칼로 찔러 생긴 것이다.

 이 할머니는 위안소에 갇혀 있을 때 광복을 맞았다. 일본군이 광복을 일러주지 않아 나흘 뒤에나 해방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며칠을 굶은 상태였다.

 그 후 55년을 중국 연변에서 지냈다. 그 사이 두 번의 결혼을 했고 두 자녀를 키웠다. 물론 직접 낳은 아이들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대신 두번째 남편의 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그렇게 중국에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했다.

 "내가 마루에 앉아서 계속 중얼거렸어. 나를 부산역에 데려다 놓으면 눈을 감고서라도 찾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한 대학교수를 소개시켜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부산에서 살았던 주소도 알려 주고 약도도 그려줘서 보냈지. 그래서 1997년에 가족들을 찾았어."

 1997년 이 할머니가 가족들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부모님과 12남매 중 8남매가 세상을 등진 후였다. 또 부모님이 기다리다 지쳐 할머니에 대한 사망 신고를 한 뒤였다.

 "내 조카가 그러더라고. 죽었던 큰 고모가 돌아오니까 너무나 반갑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며칠 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중풍으로 누워있는 남편을 간호해야만 했다. 그리고 2000년 남편이 숨지고 난 뒤 그 해 6월1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할머니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일본, 미국 등을 돌고 위안부 피해를 알리려고 노력해왔다.

 "일본에 가면 사람들이 나한테 '따봉'이라고 그래. 어떻게 그런 긴 이야기를 생생하게 다 할 수 있느냐고. 왜 못하겠어. 내가 직접 겪은 역사인데. 그런 아픈 역사는 잊을 수가 없지."

 이 할머니는 지난해 심장이 아파 찾아간 아산병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담당 의사가 '수술을 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고 했어. 그렇다고 이 늙은이가 수술해서 뭐 하겠어"라고 말했다. 또 신장에 염증이 생겨 매일 같이 약을 복용하고 있고 위안소에서 겪은 고생으로 양쪽 무릎에 이상이 생겨 모두 인공관절을 넣었다.

 이 할머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리 통증으로 인해 3년째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건강이 좋아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어 하지 못한 일들이 못내 아쉽다.

 ◇'살아있는 역사' 위안부피해 할머니 이제 70명뿐

 이 할머니와 같이 생존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제 70명 뿐이다. 일본군에 강제동원된 위안부 추정치 2만여명에 비하면 극소수만 남은 셈이다. 더욱이 생존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은 86세 고령으로 대부분 건강이 매년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해가 거듭될수록 생존자 수도 점점 줄고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연도별 사망자 수는 ▲2004년 7명 ▲2005년 7명 ▲2006년 6명 ▲2007년 13명 ▲2008년 15명 ▲2009년 5명에 이어 지난해 9명이다. 올 해만도 8월까지 벌써 9명이 숨을 거뒀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은 "지난 5월 한 할머니가 돌아가셔 이제 나눔의 집에는 8분이 계시다"며 "치매에 걸리시는 등 할머니들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여전히 피해 보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됐고 이제는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의 해결책이 요구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한일협정 당시 위안부에 대한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고 일본은 이와 관련한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고 맞대응했지만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해결방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는 "우리 정부가 일본 측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발언을 한 바 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과의 실무 회의 등에서 위안부 문제를 의제로 삼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매주 수요집회에 나오는 7~8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노환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며 "그래서 더욱 피해 보상 문제를 미룰 수 없다. 이미 80년을 기다려왔다"고 강조했다.

 안 소장은 "지난해 말 우리나라 여성 정신대 피해에 대한 보상액이 1인당 99엔이었던 반면 중국 정신대 300여명에 대한 보상액은 2억5000만엔에 달했다"며 "이같은 차이는 피해 국가가 보상요구에 얼마나 적극적인가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은 피해 보상 전 일본 기업의 중국 진출을 금지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며 "우리나라와 극명한 대비를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지난 5월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와 관련해 세부시정요구안을 만들었지만 일본 측에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는 미지수"라며 "일본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려는 정부의 태도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외교부와 종종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며 "외교적인 문제로 인해 아직은 일본과 본격적으로 협상할 단계가 아닌 걸로 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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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역사 어떻게 잊겠어…" 恨풀지 못한채 꺼져가는 위안부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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