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아이즈]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 일가

기사등록 2011/07/04 11:54:07

최종수정 2016/12/27 22:24:43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구한 말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사진=민주당 이종걸 의원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구한 말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사진=민주당 이종걸 의원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대명사, 오성 이항복의 11세손이자 민주당 이종걸 의원과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조부, 망국 후 막대한 재산과 온 가족의 생명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중국 여순 감옥에서 고문 끝에 숨진 인물.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인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을 일컫는 말이다. 

 미국에 케네디, 루스벨트, 애덤스, 부시, 태프트 등 대표적인 정치명가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대를 이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현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을만한 업적을 쌓은 이회영 선생 일가가 있다.

 이회영 선생은 고종 시절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아들로, 세칭 삼한갑족(三韓甲族, 신라·고려·조선 3조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리는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일원이다. 백사공파는 ‘오성과 한음’의 오성인 백사 이항복 이래 8대에 걸쳐 연이어 10명의 재상(9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다.

 이항복은 선조시절이던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했고 36살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현재의 함남 덕원)로 갔다. 이후 병조판서가 돼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고 근위병을 모집하는데 주력했다. 1599년 영의정에 올랐지만 광해군 시절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 삭탈관직됐다. 이후 북청(北靑)에 유배돼 1618년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항복의 11세손이기도 한 이회영 선생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타국으로 망명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독립투사를 양성했다는 점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이항복과 닮은 삶을 살았다. 이항복은 북청에 유배돼, 이회영은 여순감옥에서 삶을 마쳤다는 점까지도 비슷하다.

 ◇독립운동 위해 재산과 지위 모두 희생

 이회영 선생은 구한 말 일제에 나라가 넘어가자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했고, 이후 44살의 나이에 형제와 가족들을 설득, “공신의 후예로서 왜적의 노예가 될 수는 없다”며 일가 6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형인 건영, 석영, 철영 동생인 시영, 호영 가족이 모두 망명에 참여했고, 독립운동도 함께 했다. 이들이 막대한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은 당시 돈으로 40만원(현재가치 600억원 이상)이었다.

 이회영 선생 일가는 중국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이동, 1911년 민단(民團) 성격의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3500명의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냈고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무장독립투쟁을 치러냈다.

 이회영 선생은 ‘독립한국은 만인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고, 공평하게 행복을 누리며,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지배 없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이 실현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과 지위,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까지 모두 희생해야 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등 끊임없이 자금을 댔고 결국에는 상인들의 빚 독촉과 가난에 시달렸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의 저서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 따르면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씨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나와 누님은 2년 반을 중국 상인들에게 욕도 먹고 심지어는 구타도 당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이회영 선생의 여섯 형제 중 다섯은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사하거나 아사했다. 이회영 선생은 1932년 11월 66세의 나이로 중국 여순감옥에서 고문사했다. 둘째 아들인 석영은 1934년 상하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셋째 철영은 1925년에, 여섯째 호영은 1933년에, 첫째 건영은 194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시영 선생만 홀로 살아남아 귀국,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 됐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정치인 가문의 맥을 잇고 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1936년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 선생과 흥선대원군의 외손녀 조계진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6년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임관했고 1980년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지낸 후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했다. 11, 12,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정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거쳤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거쳐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사촌동생인 이종걸 의원은 이회영의 막내아들 이규동 선생의 장남이다. 경기고, 서울대를 거쳐 3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된 후 18대까지 내리 3선을 했다.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새천년민주당 대표 비서실장, 원내부총무 등을 지냈다.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저술한 이덕일 소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삼한갑족 출신이 전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굶은 채 누워있는 정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며 “이회영은 자신의 지위와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 모두 신념을 위해 바쳤다”고 기술했다.

 ▲‘우당의 딸’이규숙, 여자란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 못받아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여 만주로 건너가 일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우당 이회영 선생의 딸 이규숙에 대한 이야기는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규숙은 망국 후 만주로 떠난 이회영 일가 중 최연소자였다. 어린 시절 중국에 건너가 북경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던 그녀는 어린 시절 항일 독립운동단의 유명한 무기운반책이었다.

 아무도 북경어에 능통한 어린 여자아이의 몸에 무기가 즐비하게 붙어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촌오빠 이규준과 일본 밀정을 암살한 혐의로 중국 공안에 체포돼 1년간 고초를 겪었고 이회영 선생의 집이 불탔을 때는 이 선생의 서신 등을 찾아야 한다며 불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중국 문한군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독립운동가 장해평과 결혼한 후에는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그녀는 2009년 1월 삶을 마감한 이후까지도 독립운동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녀의 조카이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걸 의원은 “고모는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였다”며 “하지만 고모와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아버지와 남편을 뒷바라지 했던 것으로만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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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34호(7월11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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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아이즈]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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