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양태자의 유럽야화<42>
지난 몇 세기 전에 여인들이 남장한 채 군대에 갔었던 사실들이 최근의 연구로 나왔다. 이런 방법으로 군대에 뛰어든 여인들은 매사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야 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스트레스 속에 산 셈이다.
남장 여인들이 군대에서 들통이 나버리고 나면 두 부류가 생겼다. 하나는 추방된 경우요, 다른 하나는 오히려 인정을 받고 존경의 대상이 된 경우였다.
후자의 경우는 대개 군인으로 이미 성공적인 삶에 도달해 있었던 이들이었다. 이런 여인들이 군에서 어떻게 살아 냈는지를 다음 몇 가지 이야기에서 살펴보자.
엘레오노레 프로차스카(1785~1813)는 어떤 여인이었던가? 그녀는 독일 포츠담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일찍 죽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하사관이면서 군악대원이었지만 넉넉한 수입은 아니었다. 늘 쪼들리는 살림살이였다. 그녀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해방운동’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해방운동은 유럽을 나폴레옹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 ‘해방전쟁’에 그녀도 남장을 한 채 독일 군인으로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보기 드물게 용감하게 싸웠던 그녀는 1813년 다시 가명을 만들었다. 남자 이름인 ‘아우구스트 렌츠’를 사용하고선 소총부대에까지 들어갔다. 당시 소위였던 오토 프로이세라는 사람이 그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당시 그는 군인들을 위한 신발을 영국에 주문했던 적이 있었다. 도착했던 신발을 그는 치수에 따라 군인들에게 분배했다. 근데 모든 신발들이 그녀에게는 너무 컸다. 오토 프로이세는 아우구스트 렌츠를 위해 특별 신발을 영국에 다시 주문했다고 전했다. 그녀는 단 하나 요리 솜씨가 아주 탁월했던 것 외에는 특별한 의심이 가는 것이 없었다. 특히 그녀의 목소리가 여성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의 남장을 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도 위험한 순간이 다가와 버렸다. 산탄 사격에 의해 많이 다치게 되자 의사들이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 당장 달려왔다. 이때 그녀의 남장 사실이 드디어 들통나 버렸을 뿐만 아니라, 다쳤던 상처로 인해 그녀가 죽었다. 1813년 10월7일자 신문에 그녀의 소식이 대서특필됐다. 내용은 “한 전투에서 왕과 조국을 위해 열심히 싸우다가 한 남장 여인이 죽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엘레오노레 프로차스카다. 그녀의 장례식이 오늘 9시에 진행된다”였다. 동료 군인들이 그녀의 관을 옮겼다.
그녀의 관 뒤를 군중들이 슬퍼하면서 따라 나섰다. 이후 그녀는 영웅화됐고, 특별히 포츠담의 영웅 여인이 됐다. 그녀의 고향인 포츠담에서는 1889년 그녀의 묘 앞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드라마화도 됐고, 그녀의 삶이 시인들에게는 시의 소재로 제공됐다. 음악으로도 그녀의 치적을 기념했다. 본의 유명한 작곡가인 베토벤이 이 여인을 소재로 무대 음악을 작곡했을 정도였다.
그 다음은 안나 뤼링(1796~1866)을 보자. 그녀도 남장 군인으로 살다가 오히려 유명하게 된 여인이었다. 독일 브레멘의 목공소 장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군인들의 행진을 거리에서 구경하는 날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녀가 이렇게 환호하는 이유는 벌써 군인이 되고 싶다는 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스타를 보고 환호하듯이, 그녀도 이미 사모하는 군인이 있었다. 위에 소개했던 남장 군인 엘레오노레 프로차스카였다. 이런 꿈을 가슴에 늘 품고 있었던 그녀는 마침내 남동생의 옷을 입고 1814년 2월 고향인 브레멘을 떠났다. 남자이름 에두아르트 쿠르제라는 이름으로 군인 집단에 가입했다.
그녀는 이런 저런 전투에 참여하면서 군인으로서 많은 업적을 쌓아갔다. 그런데 그만 그녀도 남장이 들켜버렸다. 어찌 되겠는가? 추방당한다고 여기고 있었던 그녀에게 의외의 손길이 다가왔다. 남장이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군에 계속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업적이 컸다고 판단했던 장성이 그녀를 군에 머물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공적을 치적하기까지 했다. 이후 그녀는 장성들과 동료들에게 최고의 대접과 존경을 받았다. 끝으로는 공로상까지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베를린 사람들은 용감하게 싸운 군인으로 인정 받은 이 브레멘 여인을 영웅처럼 대접하면서 환영했다.
1821년 그녀는 칼이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1832년 남편이 죽고 난 다음 고독과 가난에 젖어 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소식이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먼저 고향 브레멘시가 그녀를 잊지 않았다. 브레멘시는 그녀의 군인 업적을 인정해 1860년부터 연금을 받게 해줬다. 오늘날 브레멘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안나 뤼링-길’까지 있다. 그녀가 그만큼 남장군인으로 유명하다는 의미의 한 표징이다. 우리가 세종대왕을 기리면서 세종로라는 이름을 쓰듯이 말이다.
남장한 여인들 중에는 지방의 용병으로 출전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대개 그들이 상처를 입거나 전사하고 나서 들통났다.
크리스티안 다비드스를 보자. 그녀는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1667년에 리카르도 벨쉬와 결혼해 아이 셋을 낳았다. 4년 뒤 남편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녀는 남장을 하고 사라진 남편을 찾아 나섰다. 남자의 이름으로 배타는 곳에서 일을 하면서 드디어 13년만에 남편을 찾았다. 그 이후에도 그녀의 남장은 계속됐다. 그러다 그녀의 여성이 발각된 것은 전쟁에 참여했다가 많이 다치면서였다. 그래서 위생병이 그녀를 치료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1712년까지 군인으로 근무할 수 있었고, 그는 군인 연금까지 받는 약속을 받아낼 정도였다. 1739년 그녀의 장례식은 군인들의 행렬 속에서 엄중히 진행됐다.
밀레나 무스학은 반대의 경우를 보고했다. 즉 위의 여인들이 나폴레옹에 ‘대항’해서 싸웠다면, 나폴레옹을 ‘위해서’ 싸운 남장 여인의 경우다. 이런 남장 여인 중 하나가 테레제다. 그녀도 여성임이 결국 들통났지만 군대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때 참여했던 또 한 여인은 마리 쉐링크로 나폴레옹이 그녀에게 훈장까지 수여했다는 유명한 얘기도 남아 있다. 또 어떤 여인들은 마도로스를 겸하면서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결과로 훗날 궁중에 초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연금까지도 받았다. 루드빅히 14세는 남장 군인인 여인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한 적이 있었다. 이런 여인들은 나중에 ‘왕과 조국을 위해 멋지게 싸운 여인들’로 대개 정부의 홍보용으로 이용됐다.
위의 사례들과는 반대로 만약에 남장 여인들이 군대에서 별 성과 없는 삶을 살았을 경우는 아주 엄한 벌을 받았다. 이들은 즉각 관례 규정을 어긴 것으로 간주됐다. 심할 경우 거리의 강도와 같은 죄목으로 다뤄졌고, 때로는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특히 “여자는 남자들의 옷을 입어선 안 된다. 남자는 여자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모세 5장, 22, 5)라는 성서 구절이 이때 판단의 근거로 작용했다.
어쨌든 영웅으로 대접 받았던 위의 남장여인들은 두터운 시대 족쇄를 뚫고 나온 여인들이었고, 남자들과 대결했던 용감하고 장한 여인들이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추방을 당했다면 비극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행히 그녀들의 용감성이 오히려 인정됐기에 독일 거리의 이름으로까지 지금 남아 있을 정도이지 않는가?
비교종교학 박사 [email protected]
지난 몇 세기 전에 여인들이 남장한 채 군대에 갔었던 사실들이 최근의 연구로 나왔다. 이런 방법으로 군대에 뛰어든 여인들은 매사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야 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스트레스 속에 산 셈이다.
남장 여인들이 군대에서 들통이 나버리고 나면 두 부류가 생겼다. 하나는 추방된 경우요, 다른 하나는 오히려 인정을 받고 존경의 대상이 된 경우였다.
후자의 경우는 대개 군인으로 이미 성공적인 삶에 도달해 있었던 이들이었다. 이런 여인들이 군에서 어떻게 살아 냈는지를 다음 몇 가지 이야기에서 살펴보자.
엘레오노레 프로차스카(1785~1813)는 어떤 여인이었던가? 그녀는 독일 포츠담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일찍 죽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하사관이면서 군악대원이었지만 넉넉한 수입은 아니었다. 늘 쪼들리는 살림살이였다. 그녀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해방운동’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해방운동은 유럽을 나폴레옹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 ‘해방전쟁’에 그녀도 남장을 한 채 독일 군인으로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보기 드물게 용감하게 싸웠던 그녀는 1813년 다시 가명을 만들었다. 남자 이름인 ‘아우구스트 렌츠’를 사용하고선 소총부대에까지 들어갔다. 당시 소위였던 오토 프로이세라는 사람이 그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당시 그는 군인들을 위한 신발을 영국에 주문했던 적이 있었다. 도착했던 신발을 그는 치수에 따라 군인들에게 분배했다. 근데 모든 신발들이 그녀에게는 너무 컸다. 오토 프로이세는 아우구스트 렌츠를 위해 특별 신발을 영국에 다시 주문했다고 전했다. 그녀는 단 하나 요리 솜씨가 아주 탁월했던 것 외에는 특별한 의심이 가는 것이 없었다. 특히 그녀의 목소리가 여성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의 남장을 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도 위험한 순간이 다가와 버렸다. 산탄 사격에 의해 많이 다치게 되자 의사들이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 당장 달려왔다. 이때 그녀의 남장 사실이 드디어 들통나 버렸을 뿐만 아니라, 다쳤던 상처로 인해 그녀가 죽었다. 1813년 10월7일자 신문에 그녀의 소식이 대서특필됐다. 내용은 “한 전투에서 왕과 조국을 위해 열심히 싸우다가 한 남장 여인이 죽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엘레오노레 프로차스카다. 그녀의 장례식이 오늘 9시에 진행된다”였다. 동료 군인들이 그녀의 관을 옮겼다.
그녀의 관 뒤를 군중들이 슬퍼하면서 따라 나섰다. 이후 그녀는 영웅화됐고, 특별히 포츠담의 영웅 여인이 됐다. 그녀의 고향인 포츠담에서는 1889년 그녀의 묘 앞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드라마화도 됐고, 그녀의 삶이 시인들에게는 시의 소재로 제공됐다. 음악으로도 그녀의 치적을 기념했다. 본의 유명한 작곡가인 베토벤이 이 여인을 소재로 무대 음악을 작곡했을 정도였다.
그 다음은 안나 뤼링(1796~1866)을 보자. 그녀도 남장 군인으로 살다가 오히려 유명하게 된 여인이었다. 독일 브레멘의 목공소 장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군인들의 행진을 거리에서 구경하는 날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녀가 이렇게 환호하는 이유는 벌써 군인이 되고 싶다는 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스타를 보고 환호하듯이, 그녀도 이미 사모하는 군인이 있었다. 위에 소개했던 남장 군인 엘레오노레 프로차스카였다. 이런 꿈을 가슴에 늘 품고 있었던 그녀는 마침내 남동생의 옷을 입고 1814년 2월 고향인 브레멘을 떠났다. 남자이름 에두아르트 쿠르제라는 이름으로 군인 집단에 가입했다.
그녀는 이런 저런 전투에 참여하면서 군인으로서 많은 업적을 쌓아갔다. 그런데 그만 그녀도 남장이 들켜버렸다. 어찌 되겠는가? 추방당한다고 여기고 있었던 그녀에게 의외의 손길이 다가왔다. 남장이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군에 계속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업적이 컸다고 판단했던 장성이 그녀를 군에 머물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공적을 치적하기까지 했다. 이후 그녀는 장성들과 동료들에게 최고의 대접과 존경을 받았다. 끝으로는 공로상까지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베를린 사람들은 용감하게 싸운 군인으로 인정 받은 이 브레멘 여인을 영웅처럼 대접하면서 환영했다.
1821년 그녀는 칼이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1832년 남편이 죽고 난 다음 고독과 가난에 젖어 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소식이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먼저 고향 브레멘시가 그녀를 잊지 않았다. 브레멘시는 그녀의 군인 업적을 인정해 1860년부터 연금을 받게 해줬다. 오늘날 브레멘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안나 뤼링-길’까지 있다. 그녀가 그만큼 남장군인으로 유명하다는 의미의 한 표징이다. 우리가 세종대왕을 기리면서 세종로라는 이름을 쓰듯이 말이다.
남장한 여인들 중에는 지방의 용병으로 출전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대개 그들이 상처를 입거나 전사하고 나서 들통났다.
크리스티안 다비드스를 보자. 그녀는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1667년에 리카르도 벨쉬와 결혼해 아이 셋을 낳았다. 4년 뒤 남편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녀는 남장을 하고 사라진 남편을 찾아 나섰다. 남자의 이름으로 배타는 곳에서 일을 하면서 드디어 13년만에 남편을 찾았다. 그 이후에도 그녀의 남장은 계속됐다. 그러다 그녀의 여성이 발각된 것은 전쟁에 참여했다가 많이 다치면서였다. 그래서 위생병이 그녀를 치료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1712년까지 군인으로 근무할 수 있었고, 그는 군인 연금까지 받는 약속을 받아낼 정도였다. 1739년 그녀의 장례식은 군인들의 행렬 속에서 엄중히 진행됐다.
밀레나 무스학은 반대의 경우를 보고했다. 즉 위의 여인들이 나폴레옹에 ‘대항’해서 싸웠다면, 나폴레옹을 ‘위해서’ 싸운 남장 여인의 경우다. 이런 남장 여인 중 하나가 테레제다. 그녀도 여성임이 결국 들통났지만 군대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때 참여했던 또 한 여인은 마리 쉐링크로 나폴레옹이 그녀에게 훈장까지 수여했다는 유명한 얘기도 남아 있다. 또 어떤 여인들은 마도로스를 겸하면서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결과로 훗날 궁중에 초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연금까지도 받았다. 루드빅히 14세는 남장 군인인 여인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한 적이 있었다. 이런 여인들은 나중에 ‘왕과 조국을 위해 멋지게 싸운 여인들’로 대개 정부의 홍보용으로 이용됐다.
위의 사례들과는 반대로 만약에 남장 여인들이 군대에서 별 성과 없는 삶을 살았을 경우는 아주 엄한 벌을 받았다. 이들은 즉각 관례 규정을 어긴 것으로 간주됐다. 심할 경우 거리의 강도와 같은 죄목으로 다뤄졌고, 때로는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특히 “여자는 남자들의 옷을 입어선 안 된다. 남자는 여자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모세 5장, 22, 5)라는 성서 구절이 이때 판단의 근거로 작용했다.
어쨌든 영웅으로 대접 받았던 위의 남장여인들은 두터운 시대 족쇄를 뚫고 나온 여인들이었고, 남자들과 대결했던 용감하고 장한 여인들이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추방을 당했다면 비극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행히 그녀들의 용감성이 오히려 인정됐기에 독일 거리의 이름으로까지 지금 남아 있을 정도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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