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차길진의 시크릿 가든<93>
영혼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증언을 한다. 사람과 똑같았다, 흉측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없었다 등 제각각 다르다. 영가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죽기 직전 모습들이다. 몇 년 전 연극을 통한 ‘구명시식’ 도중, 자살한 여고생 영가가 사진에 찍혔는데 머리가 없었다. 영가를 초혼해 물어보니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졌다며 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비명에 죽은 영가도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교통사고, 화재사고 등으로 죽은 영가는 자신이 죽은 줄 모르고 사고 현장을 배회하기도 한다. 2006년 6월, 백두산 출발을 앞두고 후암 가족은 공항에 모였다. 대규모 여행단을 이끌고 잘 갔다 올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여자 영가였다. 긴 머리가 얼굴을 덮어 가슴까지 내려왔다. 추레한 옷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두 검게 그을려 있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 눈엔 선명했다. 우리 비행기에 탈까 조바심이 났다.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염을 보내자 영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일행에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일단 내 시야에서 사라져 안심됐다. 설마 우리 비행기에 탔을까 싶었는데 이륙 후 얼마 못 가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내 환자가 발생했으니 의사가 있으면 연락해달라는 것이었다. 기내 분위기는 응급환자로 회항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얼른 환자 쪽을 살피니 역시 긴 머리 영가가 있었다. 그녀는 누워있는 여자 환자의 가슴 위에 올라 타 긴 머리를 환자 얼굴 쪽으로 늘어뜨리며 킬킬 웃고 있었다.
“어서 비키세요!”라고 염으로 말하자 긴 머리 영가가 휙, 내 쪽을 째려봤다. 그 순간 긴 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드러났다. “헉!” 나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반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불에 탄 듯 심하게 일그러져 뼈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긴 머리 영가는 조선족 여자로 한국의 한 식당에서 일하다 화재로 죽었다. “돈을 많이 벌어 연길로 가겠다고 애들과 약속했습니다. 저는 꼭 연길로 가야 합니다.” 조선족 영가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위령제 때 함께 천도해 줄 테니 환자의 몸에서 나오라고 설득해, 환자의 생명도 구하고 회항 사태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영가는 일송정 휴게소에서 잘 천도했다.
여행 도중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결정타는 북한 식당을 다녀 온 뒤에 발생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환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복통, 급체, 설사를 호소하는 사람들 때문에 운영진들은 식중독까지 의심했었다고 한다.
이튿날 공항에 나가보니 아픈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 중 한 명은 극심한 복통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배가 너무 아파서 손을 따고 있었습니다.” 환자는 수지침을 잘 놓는다는 한 여성으로부터 치료를 받으려던 찰나였다.
“안 됩니다. 이 분은 함부로 손을 따면 큰일 납니다.” 나는 얼른 환자의 머리에 손으로 기를 넣어주곤 ‘비행기만 타면 괜찮아지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내가 침술치료를 막은 건 환자가 신기(神氣)있는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치과의사도 무속인의 치료는 꺼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기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침이나 칼 등 쇠를 대서는 안 된다. 잘못하다 몸주 신에게 화를 당할 수 있다.
복통의 주범은 최근에 굶어 죽은 여자 탈북자 영가였다. 그녀는 한국에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했지만 중국에서 굶어 죽자, 북한 식당에 머물며 그곳에 온 한국 관광객의 몸에 빙의해서라도 한국에 가려고 했던 것.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떠나십시오”라고 말하자 영가는 “계룡산에 가고 싶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고향이 그곳입니다”라며 간절히 애원했다. 복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를 보자 마음이 약해져 예정에 없던 영가를 모시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보왕 삼매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아라’ 하셨느니라.” 그 해 여름 산신일, 유성 후암 정사에서 탈북자 여자 영가를 천도하며 파란만장했던 백두산 여행을 회상했다.
좁은 잠실 법당에서 구명시식을 할 때 종종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는 사람들의 고백을 듣는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법당. 아무리 한 여름이라도 에어컨을 켜고 구명시식을 하지 않는다. 영가들이 에어컨 바람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명시식 중에 덥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것은 법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영가들의 차가운 기운 때문이다.
수십 년 전, 한 쌍의 신혼부부가 알프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신랑이 빙하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신부가 슬피 울자 한 늙은 목동이 “저 빙하는 50년 후에 녹을 것입니다”라고 알려줬다. 그때부터 그녀는 50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50년이 지난 어느 날. 목동의 말대로 남편을 삼킨 빙하가 녹았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70세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계곡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그녀는 계곡물에 떠내려 온 남자 시체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여보’라고 외쳤다. 70대의 아내와 20대 남편이 50년 만에 재회하는 순간이었다.
이 얘기에 담긴 또 다른 사실은 빙하에 파묻힌 시신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지난 1991년 알프스에서는 기원전 3300년 전의 미라가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그러니 빙하 속 시신과의 50년만의 재회는 거의 기적 같은 스토리인 셈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퇴직했지만 당시 모 건설회사 본부장이었던 사람이 구명시식을 올리던 날이었다. 갑자기 법당 안에 엄청나게 싸늘한 냉기가 흐르면서 냉동 인간을 방불케 하는 남자 영가가 나타났다. 피부에 하얀 성에가 뒤덮였을 뿐 아니라, 심하게 다쳤는지 피와 얼음이 엉겨 붙어 있어 끔찍했다.
도저히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영가가 아니라는 생각에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자, 영가는 “여기는 네팔 근처 히말라야 산맥의 깊은 크레바스 속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크레바스(Crevasse)’란 빙하의 지각 변동으로 생긴 깊은 균열. 하지만 영가의 행색은 산악인이 아니었다. 평범한 회사원 복장인 그가 웬일로 히말라야의 크레바스 속에 빠져 있단 말인가.
이유는 회사 선배가 동남아 국적의 비행기를 타고 네팔로 가던 중, 절벽과 정면충돌해 추락하는 대형사고로 실종된 것. 사망한 것이 확실했지만 끝내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바로 그 선배가 영가가 돼 구명시식에 나타난 것이었다. 영가는 후배인 그가 재판에서 증언을 열심히 해주는 덕에 보상금 문제가 잘 해결돼 가족들에게 먼저 간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시신을 수습하고 싶다는 후배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수천 미터 깊이의 크레바스 속에 있어 찾기 힘들다’면서 ‘언제쯤 지독한 추위와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며 내게 하소연했다. 나는 영가가 너무 딱해 이제부터 크레바스가 아닌 법당에 머물라고 했더니, 그 순간 히말라야 빙하의 냉기가 법당 안 온도를 뚝 떨어뜨렸다.
이후 회사 후배는 모든 소원이 하나씩 이뤄졌다. 아들도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고, 퇴직해서 시작한 사업은 경기 침체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했다. 지금도 더운 여름날 밤 구명시식을 할 때면 히말라야 냉기를 안고 온 영가가 생각난다. 언젠가 그의 시신도 50년 뒤 계곡물에 떠내려 온 시신처럼 누군가에게 발견돼 장례를 치를 수 있기를 기도한다.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www.hooam.com
영혼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증언을 한다. 사람과 똑같았다, 흉측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없었다 등 제각각 다르다. 영가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죽기 직전 모습들이다. 몇 년 전 연극을 통한 ‘구명시식’ 도중, 자살한 여고생 영가가 사진에 찍혔는데 머리가 없었다. 영가를 초혼해 물어보니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졌다며 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비명에 죽은 영가도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교통사고, 화재사고 등으로 죽은 영가는 자신이 죽은 줄 모르고 사고 현장을 배회하기도 한다. 2006년 6월, 백두산 출발을 앞두고 후암 가족은 공항에 모였다. 대규모 여행단을 이끌고 잘 갔다 올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여자 영가였다. 긴 머리가 얼굴을 덮어 가슴까지 내려왔다. 추레한 옷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두 검게 그을려 있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 눈엔 선명했다. 우리 비행기에 탈까 조바심이 났다.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염을 보내자 영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일행에겐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일단 내 시야에서 사라져 안심됐다. 설마 우리 비행기에 탔을까 싶었는데 이륙 후 얼마 못 가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내 환자가 발생했으니 의사가 있으면 연락해달라는 것이었다. 기내 분위기는 응급환자로 회항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얼른 환자 쪽을 살피니 역시 긴 머리 영가가 있었다. 그녀는 누워있는 여자 환자의 가슴 위에 올라 타 긴 머리를 환자 얼굴 쪽으로 늘어뜨리며 킬킬 웃고 있었다.
“어서 비키세요!”라고 염으로 말하자 긴 머리 영가가 휙, 내 쪽을 째려봤다. 그 순간 긴 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드러났다. “헉!” 나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반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불에 탄 듯 심하게 일그러져 뼈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긴 머리 영가는 조선족 여자로 한국의 한 식당에서 일하다 화재로 죽었다. “돈을 많이 벌어 연길로 가겠다고 애들과 약속했습니다. 저는 꼭 연길로 가야 합니다.” 조선족 영가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위령제 때 함께 천도해 줄 테니 환자의 몸에서 나오라고 설득해, 환자의 생명도 구하고 회항 사태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영가는 일송정 휴게소에서 잘 천도했다.
여행 도중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결정타는 북한 식당을 다녀 온 뒤에 발생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환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복통, 급체, 설사를 호소하는 사람들 때문에 운영진들은 식중독까지 의심했었다고 한다.
이튿날 공항에 나가보니 아픈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 중 한 명은 극심한 복통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배가 너무 아파서 손을 따고 있었습니다.” 환자는 수지침을 잘 놓는다는 한 여성으로부터 치료를 받으려던 찰나였다.
“안 됩니다. 이 분은 함부로 손을 따면 큰일 납니다.” 나는 얼른 환자의 머리에 손으로 기를 넣어주곤 ‘비행기만 타면 괜찮아지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내가 침술치료를 막은 건 환자가 신기(神氣)있는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치과의사도 무속인의 치료는 꺼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기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침이나 칼 등 쇠를 대서는 안 된다. 잘못하다 몸주 신에게 화를 당할 수 있다.
복통의 주범은 최근에 굶어 죽은 여자 탈북자 영가였다. 그녀는 한국에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했지만 중국에서 굶어 죽자, 북한 식당에 머물며 그곳에 온 한국 관광객의 몸에 빙의해서라도 한국에 가려고 했던 것.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떠나십시오”라고 말하자 영가는 “계룡산에 가고 싶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고향이 그곳입니다”라며 간절히 애원했다. 복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를 보자 마음이 약해져 예정에 없던 영가를 모시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보왕 삼매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아라’ 하셨느니라.” 그 해 여름 산신일, 유성 후암 정사에서 탈북자 여자 영가를 천도하며 파란만장했던 백두산 여행을 회상했다.
좁은 잠실 법당에서 구명시식을 할 때 종종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는 사람들의 고백을 듣는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법당. 아무리 한 여름이라도 에어컨을 켜고 구명시식을 하지 않는다. 영가들이 에어컨 바람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명시식 중에 덥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것은 법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영가들의 차가운 기운 때문이다.
수십 년 전, 한 쌍의 신혼부부가 알프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신랑이 빙하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신부가 슬피 울자 한 늙은 목동이 “저 빙하는 50년 후에 녹을 것입니다”라고 알려줬다. 그때부터 그녀는 50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50년이 지난 어느 날. 목동의 말대로 남편을 삼킨 빙하가 녹았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70세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계곡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그녀는 계곡물에 떠내려 온 남자 시체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여보’라고 외쳤다. 70대의 아내와 20대 남편이 50년 만에 재회하는 순간이었다.
이 얘기에 담긴 또 다른 사실은 빙하에 파묻힌 시신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지난 1991년 알프스에서는 기원전 3300년 전의 미라가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그러니 빙하 속 시신과의 50년만의 재회는 거의 기적 같은 스토리인 셈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퇴직했지만 당시 모 건설회사 본부장이었던 사람이 구명시식을 올리던 날이었다. 갑자기 법당 안에 엄청나게 싸늘한 냉기가 흐르면서 냉동 인간을 방불케 하는 남자 영가가 나타났다. 피부에 하얀 성에가 뒤덮였을 뿐 아니라, 심하게 다쳤는지 피와 얼음이 엉겨 붙어 있어 끔찍했다.
도저히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영가가 아니라는 생각에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자, 영가는 “여기는 네팔 근처 히말라야 산맥의 깊은 크레바스 속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크레바스(Crevasse)’란 빙하의 지각 변동으로 생긴 깊은 균열. 하지만 영가의 행색은 산악인이 아니었다. 평범한 회사원 복장인 그가 웬일로 히말라야의 크레바스 속에 빠져 있단 말인가.
이유는 회사 선배가 동남아 국적의 비행기를 타고 네팔로 가던 중, 절벽과 정면충돌해 추락하는 대형사고로 실종된 것. 사망한 것이 확실했지만 끝내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바로 그 선배가 영가가 돼 구명시식에 나타난 것이었다. 영가는 후배인 그가 재판에서 증언을 열심히 해주는 덕에 보상금 문제가 잘 해결돼 가족들에게 먼저 간 미안함을 덜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시신을 수습하고 싶다는 후배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수천 미터 깊이의 크레바스 속에 있어 찾기 힘들다’면서 ‘언제쯤 지독한 추위와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며 내게 하소연했다. 나는 영가가 너무 딱해 이제부터 크레바스가 아닌 법당에 머물라고 했더니, 그 순간 히말라야 빙하의 냉기가 법당 안 온도를 뚝 떨어뜨렸다.
이후 회사 후배는 모든 소원이 하나씩 이뤄졌다. 아들도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고, 퇴직해서 시작한 사업은 경기 침체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했다. 지금도 더운 여름날 밤 구명시식을 할 때면 히말라야 냉기를 안고 온 영가가 생각난다. 언젠가 그의 시신도 50년 뒤 계곡물에 떠내려 온 시신처럼 누군가에게 발견돼 장례를 치를 수 있기를 기도한다.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www.hoo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