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 제인 그레이(1537-1554)의 또 다른 이름은 ‘9일의 여왕’(Neuntagekönigin)이다. 1553년에 단 9일간 영국 여왕으로 재위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은 어떠했을까. 어쩌다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인 9일간 영국 여왕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왕의 친척인 귀족을 부모로 둔 그녀는 딸 셋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특히 그녀의 엄마는 하인리히 8세의 조카였다. 그녀는 구교가 아닌 신교 집안 출신이었다. 제인의 부모는 9살인 딸을 하인리히 8세의 6번째 부인인 카테리네 파르(1512-1548)에게 보냈다. 카테리네가 제인을 궁중에서 교육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왕실 아이들과 함께 궁중 법도를 익히며 성장했던 그녀는 최고의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프랑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까지 배웠다.
하인리히8세가 죽자, 그의 아들이 왕 자리를 물려받았다. 에드워드 6세다. 그가 아직 미성년이었기에 삼촌 에드워드 세이머(1506-1552)가 조언자가 돼 함께 통치했다. 에드워드에게는 토마스(1508-1549)라는 동생이 있었다. 토마스는 에드워드 6세에게는 작은 삼촌이다. 그는 권력을 향한 갈망이 대단했다. 안면몰수하고 하인리히 8세의 6번째 첩 카테리와 결혼까지 한 사나이다. 엄밀히 따지면 형수와 한 결혼이 아닌가.
1548년 카타리네가 아이를 낳은 뒤, 산욕 때문에 며칠 뒤 죽었다. 1년 뒤에는 토마스가 사형을 당했다. 형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자리를 탈취해 자기가 조카의 보좌 역할을 하려고 음모를 세웠으나 결국 실패한 탓이다. 어떤 연유에선지 에드워드도 1552년에 조카의 후견인 자리를 박탈당했고, 끝내 사형에 처해졌다. 끝없는 궁중 음모와 암투가 전개됐으리라 여겨진다.
뒤를 이어 존 더들리(1501-1553)라는 공작이 어린 왕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존은 이 기회를 백분 활용해 큰 권력을 잡아보겠다는 욕심을 품었다. 특히 왕이 성년이 되는 날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돼 반드시 요직을 차지할 거라는 커다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지만 하늘이 그를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에드워드 6세가 폐병에 걸려 자리에 드러눕게 됐다. 존은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다는 예감을 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칠세라 비상한 계획을 꾸몄다. 왕의 배다른 여동생 마리아의 등단을 사전에 막아야 했던 것이었다. 만약 에드워드 왕이 다른 유언장 없이 죽게 될 경우 그 아버지 헨리 8세의 유언장이 효력을 발생하게 돼 있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마리아가 여왕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톨릭 신자인 마리아는 자신을 쳐 낼 것임이 산수 공식처럼 나왔다.
이 음모에 그럴듯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가 제인이라 여긴 존은 그녀를 끌어 들일 생각을 했다. 존의 공작은 먼저 제인의 부모에게 청했다. 제인과 자기 아들을 결혼시키자고. 동조한 제인의 아버지는 딸에게 결혼을 강요했다. 제인은 완강히 거절하다가 부모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거역하지 못한 16살의 그녀는 결국 존의 아들과 1553년 3월21일 결혼했다. 당시 귀족들이 늘 그러했듯 정치적 목적으로 엮어진 이 결혼도 서로가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가 결혼식 뒤 부모의 집으로 도로 갔을 정도였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두 사람은 떨어져 살았다.
존은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왕이 죽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는 제인이 왕위 상속녀가 될 때까지 왕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주치의에게 왕의 수명 연장에 최대한의 노력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존이 죽어가는 왕의 침대 곁에서 설득했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의 이복동생 마리아가 왕정을 물려받으면 영국엔 다시 가톨릭 천국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와 다른 배다른 동생 엘리자벳을 왕위 계승 서열에서 제외해 달라. 그렇게 되면 그 다음 서열이 제인이다. 그러니 이복동생 둘을 뺀다는 내용이 든 그런 유언장 하나를 당신 생전에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에드워드 왕은 존의 의견에 상응해 ‘제인 그레이가 나의 후계자’라는 유언장을 써줬다. 존은 이 유언장에 감격해 하면서 멋진 미래를 상상했다.
1553년 7월6일 에드워드6세가 죽었다. 존은 왕이 죽은 뒤에도 이 왕위 계승권이 잘못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렇지만 제인은 왕위 계승을 거절했다. 민중들이 법적 다음 서열인 마리아를 더 선호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들의 강압을 이길 수 없었다. 4일 뒤 제인의 왕위 계승문제를 마무리한 존은 왕의 죽음을 세상에 공포했다.
에드워드 왕은 권력에 눈이 어두운 존에게 종이 한 장 써주고 가는 것만 생각했지, 남겨진 이들 사이의 분란은 계산하지 못했다. 왕의 이복동생 마리아가 가만있었겠는가. 당연히 그녀가 법적 왕위 계승권을 가졌는데…. 존도 이런 마리아를 쳐내기 위해 갖은 방어를 다했고, 마리아를 영원히 없앨 궁리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리 쉽지 않았다. 민중의 지지 때문이었다. 사실 민중으로부터나, 주위 동료들로부터나 어느 정도 사랑과 신임을 받았던 존이었다면 이런 때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평소 민중과 동료들로부터 미움을 받던 자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간계를 만든 그가 지겨웠던지 그의 편들도 오히려 마리아 편으로 기울어졌다. 존은 힘을 점점 더 잃어가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야무진 꿈을 스스로 포기 해야만 했다.
시 의회는 마리아를 영국의 새 여왕으로 공포했다. 1553년 7월10일 왕위 계승을 했던 제인은 19일 마리아에게 왕권을 넘겨줬다. 9일간 통치 한 셈이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녀를 ‘9일의 여왕’이라 불렀다.
이렇게 되면서 존과 제인의 미래는 뻔해졌다. 법정에 서게 됐고, 반역자 판결을 받았다. 존은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근데 마리아는 제인을 그렇게 죽일 수 없었다. 둘은 어릴 때부터 궁중에서 함께 자란, 어찌 보면 친구 같은 관계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존이 그녀를 이용했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마리아는 제인을 사형시킬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제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었던 마리아는 제인을 고해신부에게 보냈다. 만약 그녀가 신교를 버리고 구교로 다시 넘어오기만 해도 살려줄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제인은 종교 전향에 별 관심이 없었다. 반면 마리아의 측근들은 제인을 살려둘 경우 나중에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즉 언젠가 제인이 불씨가 돼 신교가 다시 득세하게 되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당시는 신교와 구교가 피 터지게 싸우던 시대였다. 이 싸움 때문에 피비린내를 냈던 일이 유럽사에 쫙 깔려 있을 정도다. 마리아는 그녀를 살려주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봤다. 하지만 소용이 없어지면서 그녀는 1554년 2월12일 제인을 죽이고 말았다. 함께 뛰놀았던 어릴 적 친구를 그렇게 죽인 마리아의 마음도 참 아팠으리라 여겨진다.
권력에 눈이 어두운 한 사나이의 욕심에 본의 아니게 정치사에 얽혀 들어갔던 제인. 단지 9일간 왕관을 써 보고, 약 450년 전 슬프고 두려운 표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그녀 모습이 그려진다.
비교종교학 박사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18호(3월21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그녀의 생은 어떠했을까. 어쩌다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인 9일간 영국 여왕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왕의 친척인 귀족을 부모로 둔 그녀는 딸 셋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특히 그녀의 엄마는 하인리히 8세의 조카였다. 그녀는 구교가 아닌 신교 집안 출신이었다. 제인의 부모는 9살인 딸을 하인리히 8세의 6번째 부인인 카테리네 파르(1512-1548)에게 보냈다. 카테리네가 제인을 궁중에서 교육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왕실 아이들과 함께 궁중 법도를 익히며 성장했던 그녀는 최고의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프랑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까지 배웠다.
하인리히8세가 죽자, 그의 아들이 왕 자리를 물려받았다. 에드워드 6세다. 그가 아직 미성년이었기에 삼촌 에드워드 세이머(1506-1552)가 조언자가 돼 함께 통치했다. 에드워드에게는 토마스(1508-1549)라는 동생이 있었다. 토마스는 에드워드 6세에게는 작은 삼촌이다. 그는 권력을 향한 갈망이 대단했다. 안면몰수하고 하인리히 8세의 6번째 첩 카테리와 결혼까지 한 사나이다. 엄밀히 따지면 형수와 한 결혼이 아닌가.
1548년 카타리네가 아이를 낳은 뒤, 산욕 때문에 며칠 뒤 죽었다. 1년 뒤에는 토마스가 사형을 당했다. 형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자리를 탈취해 자기가 조카의 보좌 역할을 하려고 음모를 세웠으나 결국 실패한 탓이다. 어떤 연유에선지 에드워드도 1552년에 조카의 후견인 자리를 박탈당했고, 끝내 사형에 처해졌다. 끝없는 궁중 음모와 암투가 전개됐으리라 여겨진다.
뒤를 이어 존 더들리(1501-1553)라는 공작이 어린 왕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존은 이 기회를 백분 활용해 큰 권력을 잡아보겠다는 욕심을 품었다. 특히 왕이 성년이 되는 날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돼 반드시 요직을 차지할 거라는 커다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지만 하늘이 그를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에드워드 6세가 폐병에 걸려 자리에 드러눕게 됐다. 존은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다는 예감을 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칠세라 비상한 계획을 꾸몄다. 왕의 배다른 여동생 마리아의 등단을 사전에 막아야 했던 것이었다. 만약 에드워드 왕이 다른 유언장 없이 죽게 될 경우 그 아버지 헨리 8세의 유언장이 효력을 발생하게 돼 있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마리아가 여왕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톨릭 신자인 마리아는 자신을 쳐 낼 것임이 산수 공식처럼 나왔다.
이 음모에 그럴듯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가 제인이라 여긴 존은 그녀를 끌어 들일 생각을 했다. 존의 공작은 먼저 제인의 부모에게 청했다. 제인과 자기 아들을 결혼시키자고. 동조한 제인의 아버지는 딸에게 결혼을 강요했다. 제인은 완강히 거절하다가 부모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거역하지 못한 16살의 그녀는 결국 존의 아들과 1553년 3월21일 결혼했다. 당시 귀족들이 늘 그러했듯 정치적 목적으로 엮어진 이 결혼도 서로가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가 결혼식 뒤 부모의 집으로 도로 갔을 정도였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두 사람은 떨어져 살았다.
존은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왕이 죽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는 제인이 왕위 상속녀가 될 때까지 왕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주치의에게 왕의 수명 연장에 최대한의 노력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존이 죽어가는 왕의 침대 곁에서 설득했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의 이복동생 마리아가 왕정을 물려받으면 영국엔 다시 가톨릭 천국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와 다른 배다른 동생 엘리자벳을 왕위 계승 서열에서 제외해 달라. 그렇게 되면 그 다음 서열이 제인이다. 그러니 이복동생 둘을 뺀다는 내용이 든 그런 유언장 하나를 당신 생전에 써달라는 내용이었다.
에드워드 왕은 존의 의견에 상응해 ‘제인 그레이가 나의 후계자’라는 유언장을 써줬다. 존은 이 유언장에 감격해 하면서 멋진 미래를 상상했다.
1553년 7월6일 에드워드6세가 죽었다. 존은 왕이 죽은 뒤에도 이 왕위 계승권이 잘못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렇지만 제인은 왕위 계승을 거절했다. 민중들이 법적 다음 서열인 마리아를 더 선호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들의 강압을 이길 수 없었다. 4일 뒤 제인의 왕위 계승문제를 마무리한 존은 왕의 죽음을 세상에 공포했다.
에드워드 왕은 권력에 눈이 어두운 존에게 종이 한 장 써주고 가는 것만 생각했지, 남겨진 이들 사이의 분란은 계산하지 못했다. 왕의 이복동생 마리아가 가만있었겠는가. 당연히 그녀가 법적 왕위 계승권을 가졌는데…. 존도 이런 마리아를 쳐내기 위해 갖은 방어를 다했고, 마리아를 영원히 없앨 궁리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리 쉽지 않았다. 민중의 지지 때문이었다. 사실 민중으로부터나, 주위 동료들로부터나 어느 정도 사랑과 신임을 받았던 존이었다면 이런 때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평소 민중과 동료들로부터 미움을 받던 자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간계를 만든 그가 지겨웠던지 그의 편들도 오히려 마리아 편으로 기울어졌다. 존은 힘을 점점 더 잃어가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야무진 꿈을 스스로 포기 해야만 했다.
시 의회는 마리아를 영국의 새 여왕으로 공포했다. 1553년 7월10일 왕위 계승을 했던 제인은 19일 마리아에게 왕권을 넘겨줬다. 9일간 통치 한 셈이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녀를 ‘9일의 여왕’이라 불렀다.
이렇게 되면서 존과 제인의 미래는 뻔해졌다. 법정에 서게 됐고, 반역자 판결을 받았다. 존은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근데 마리아는 제인을 그렇게 죽일 수 없었다. 둘은 어릴 때부터 궁중에서 함께 자란, 어찌 보면 친구 같은 관계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존이 그녀를 이용했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마리아는 제인을 사형시킬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제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었던 마리아는 제인을 고해신부에게 보냈다. 만약 그녀가 신교를 버리고 구교로 다시 넘어오기만 해도 살려줄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제인은 종교 전향에 별 관심이 없었다. 반면 마리아의 측근들은 제인을 살려둘 경우 나중에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즉 언젠가 제인이 불씨가 돼 신교가 다시 득세하게 되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당시는 신교와 구교가 피 터지게 싸우던 시대였다. 이 싸움 때문에 피비린내를 냈던 일이 유럽사에 쫙 깔려 있을 정도다. 마리아는 그녀를 살려주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봤다. 하지만 소용이 없어지면서 그녀는 1554년 2월12일 제인을 죽이고 말았다. 함께 뛰놀았던 어릴 적 친구를 그렇게 죽인 마리아의 마음도 참 아팠으리라 여겨진다.
권력에 눈이 어두운 한 사나이의 욕심에 본의 아니게 정치사에 얽혀 들어갔던 제인. 단지 9일간 왕관을 써 보고, 약 450년 전 슬프고 두려운 표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그녀 모습이 그려진다.
비교종교학 박사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18호(3월21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