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진현철 기자 =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재위 1776~1800)가 아들을 많이 낳기를 바라며 이름을 바꿨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안대회(49) 성균관대 한국한문학 교수는 최근 ‘문헌과 해석’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산’으로 알려진 정조의 이름은 1796년 8월11일 ‘규장전운(奎章全韻)’이라는 한자의 소리 사전 발간을 계기로 기존의 ‘산(示+示)’의 독음에서 ‘성(셩)’으로 바뀌었고, 사후에도 이 독음으로 읽힌 것 같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정조가 1792년 3월 이덕무에게 편찬을 명령한 규장전운이 거의 완성돼 인쇄에 들어갈 때 수록된 ‘성(氵+省)’이라는 글자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다 자기 이름인 ‘산(示+示)’이라는 글자를 집어넣었다”며 “‘산(示+示)’이라는 글자는 이후 발음이 ‘성(셩)’으로 바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근거는 19세기 저명한 중인 문사인 옥산(玉山) 장지완(1806~?)의 ‘비연외초(斐然外抄)’다. 정조의 이름이 본래 ‘산(算)’으로 읽혔지만, 고증을 거친 규장전운 발간을 계기로 ‘성’으로 바로잡았다고 쓰여 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또 국왕이 즉위하면 임금의 어명과 똑같은 글자는 사용하지 못하고 인명과 지명·관직명을 고쳤다는 것을 언급하며 ‘산(示+示)’이 ‘산(算)’의 옛 글자임을 들어 산학(算學)을 주학(籌學), 산원(算員)을 계사(計士)로 바꾸고, 평안도와 충청도 고을인 이산(理山)과 이산(尼山)을 각각 초산(楚山)과 이성(尼城)으로 바꿨다는 것 등도 제시했다.
당초 규장전운에 ‘산(示+示)’ 대신 집어넣을 ‘성(氵+省)’이라는 글자는 서약봉(1558~1631)의 이름이다. 서성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경화세족인 대구 서씨의 중흥조로 후손이 번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 교수는 “이는 아들을 많이 낳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며 “당시 자식이 귀한 정조가 자손이 번성한 서성의 이름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 유일한 동기”라고 판단했다.
정조는 당시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왕비 청풍 김씨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했고, 의빈 성씨 소생인 문효세자는 요절했다. 아들은 늦게 수빈 박씨에게서 순조(1790~1834)만을 두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정조는 손자 익종과 증손자 헌종에서 대가 끊어졌다.
<사진> 장지완 필사 초본 ‘비연외초’
[email protected]
안대회(49) 성균관대 한국한문학 교수는 최근 ‘문헌과 해석’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산’으로 알려진 정조의 이름은 1796년 8월11일 ‘규장전운(奎章全韻)’이라는 한자의 소리 사전 발간을 계기로 기존의 ‘산(示+示)’의 독음에서 ‘성(셩)’으로 바뀌었고, 사후에도 이 독음으로 읽힌 것 같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정조가 1792년 3월 이덕무에게 편찬을 명령한 규장전운이 거의 완성돼 인쇄에 들어갈 때 수록된 ‘성(氵+省)’이라는 글자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다 자기 이름인 ‘산(示+示)’이라는 글자를 집어넣었다”며 “‘산(示+示)’이라는 글자는 이후 발음이 ‘성(셩)’으로 바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근거는 19세기 저명한 중인 문사인 옥산(玉山) 장지완(1806~?)의 ‘비연외초(斐然外抄)’다. 정조의 이름이 본래 ‘산(算)’으로 읽혔지만, 고증을 거친 규장전운 발간을 계기로 ‘성’으로 바로잡았다고 쓰여 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또 국왕이 즉위하면 임금의 어명과 똑같은 글자는 사용하지 못하고 인명과 지명·관직명을 고쳤다는 것을 언급하며 ‘산(示+示)’이 ‘산(算)’의 옛 글자임을 들어 산학(算學)을 주학(籌學), 산원(算員)을 계사(計士)로 바꾸고, 평안도와 충청도 고을인 이산(理山)과 이산(尼山)을 각각 초산(楚山)과 이성(尼城)으로 바꿨다는 것 등도 제시했다.
당초 규장전운에 ‘산(示+示)’ 대신 집어넣을 ‘성(氵+省)’이라는 글자는 서약봉(1558~1631)의 이름이다. 서성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경화세족인 대구 서씨의 중흥조로 후손이 번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 교수는 “이는 아들을 많이 낳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며 “당시 자식이 귀한 정조가 자손이 번성한 서성의 이름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 유일한 동기”라고 판단했다.
정조는 당시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왕비 청풍 김씨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했고, 의빈 성씨 소생인 문효세자는 요절했다. 아들은 늦게 수빈 박씨에게서 순조(1790~1834)만을 두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정조는 손자 익종과 증손자 헌종에서 대가 끊어졌다.
<사진> 장지완 필사 초본 ‘비연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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