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우은식 기자 = ‘180년 만의 재회.’
시몬 볼리바르, 남미 독립의 영웅이자 혁명가인 그가 180년 만에 옛 연인이자 동지인 여성 투사 마누엘라 사엔스와 주검으로 재회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은 지난 5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국립 판테온 묘지에서 두 사람의 묘소를 상징적으로 합치는 행사를 벌였다.
사엔스의 무덤이 있는 고향 에콰도르의 흙과 사엔스의 유해를 상징하는 함을 볼리바르가 묻힌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무덤에 안치하는 이장식이 진행됐다.
볼리바르가 숨진 1830년 이후 180년 만의 재회인 셈이다. 사엔스는 1856년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해 화장돼 정확한 유골을 찾기 힘들다.
사엔스는 1797년 에콰도르에서 스페인 귀족의 딸로 태어나 부유한 영국 상인과 원치 않는 결혼을 했지만, 이후 남편을 떠나 남미 독립투쟁에 참가해 명성을 드높였다.
사엔스는 이후 에콰도르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를 만났으며 암살 위험에서 그를 구출하는 등 대통령궁 입성까지 볼리바르의 동지이자 참모이면서 연인이었다.
사엔스는 볼리바르가 사망하기 전 8년 동안 그와 함께 살며 그를 마지막까지 보살피며 애틋한 연정을 이어갔다.
사엔스와 볼리바르의 사랑은 그러나 당시에 불륜으로 폄하됐으며, 볼리바르가 사망하자 사엔스는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에서 추방됐다.
추방당한 사엔스는 이후 페루에서 미국 포경선원들이 남미 여성들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대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등 어려운 말년을 보냈다.
이후 독립 투사였던 사엔스의 업적 또한 평가 절하돼 사람들에게 잊혀갔으나, 남미의 두 좌파 대통령이 남미 독립 200주년을 맞아 이들의 정신적 사랑을 재결합시키는 행사를 열게 됐다.
시몬 볼리바르(1783~1830)는 남미 독립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볼리바르의 정신을 이어받아 라틴 아메리카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21세기형 새로운 사회주의’를 내건 차베스는 볼리바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신이 이루겠다는 야심찬 꿈을 품고 있다.
볼리바르는 스페인인이다. 카라카스에서 광산업자이자 크리올료(스페인계 이민자 후손)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 유학을 통해 유럽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1810년 독립전쟁에 나선 끝에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군을 내쫓고 베네수엘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4번의 망명과 귀국을 거듭하는 등 험란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베네수엘라 독립운동 당시 아이티에서 베네수엘라로 출발할 때 볼리바르에게는 이순신 장군의 12척보다 적은 7척의 배와 250명의 군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볼리바르는 1819년 안데스 산맥을 넘어 누에바 그라나다를 해방시킨 뒤, 12월 콜롬비아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1821년에 베네수엘라를, 이듬해에는 키토(현 에콰도르)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켰고,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하나의 나라로 통합시켜 ‘대콜롬비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1824년에는 페루를 독립시켰고, 1825년 페루 북부지역이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서 볼리비아로 독립했다.
남미 통합을 위한 그의 꿈은 계속돼 1825년 남미 통일을 위한 ‘아메리카 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등의 분열책과 지방 토호들의 반발로 통합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남미는 이후 20여 나라로 쪼개지고 말았다.
1830년 볼리바르는 통합의 꿈이 좌절되자 스스로 콜롬비아 공화국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그해 12월17일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세상에 바보가 세 명 있는데 예수, 돈키호테, 그리고 바로 나다.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이다.”
그가 남긴 명언 속에 혁명가의 권력 무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밀리아노 사파타, 아우구스토 세자르 산디노, 호세 데 산 마르틴, 판초 비야, 체 게바라 등 남미의 수많은 혁명가 가운데 ‘으뜸’이자 혁명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
역사학자였던 라몬 벨라스케스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은 “볼리바르에 대한 신앙심에 가까운 열정이야말로 우리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라며 “그의 사상은 도서관에나 가야 찾아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저변을 흐르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 손을 군복 상의에 넣고 한 손은 칼 손잡이를 잡은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1825년 초상화는 베네수엘라 어디에 가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또 그를 지칭하는 ‘해방자(El Liberator)’라는 이름의 거리는 어느 도시, 어느 마을에나 있고 대부분의 도시에는 볼리바르 광장이 있다.
베네수엘라는 아예 화폐 단위 명칭으로 ‘볼리바르’를 사용하고 있다.
남미의 신문들은 매년 볼리바르의 탄생일인 7월24일에 예외 없이 그의 초상화를 1면에 게재한다.
남미통합을 주장하는 우고 차베스가 지난 1999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볼리바르의 꿈이 차베스를 통해 실현될지 주목된다.
차베스는 취임하자마자 헌법을 바꿔 베네수엘라의 국호를 그의 이름을 넣어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바꿨다.
‘180년 만의 묘지 이장식’은 남미 통합의 꿈을 가진 차베스 대통령의 야망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85호(7월19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시몬 볼리바르, 남미 독립의 영웅이자 혁명가인 그가 180년 만에 옛 연인이자 동지인 여성 투사 마누엘라 사엔스와 주검으로 재회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은 지난 5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국립 판테온 묘지에서 두 사람의 묘소를 상징적으로 합치는 행사를 벌였다.
사엔스의 무덤이 있는 고향 에콰도르의 흙과 사엔스의 유해를 상징하는 함을 볼리바르가 묻힌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무덤에 안치하는 이장식이 진행됐다.
볼리바르가 숨진 1830년 이후 180년 만의 재회인 셈이다. 사엔스는 1856년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해 화장돼 정확한 유골을 찾기 힘들다.
사엔스는 1797년 에콰도르에서 스페인 귀족의 딸로 태어나 부유한 영국 상인과 원치 않는 결혼을 했지만, 이후 남편을 떠나 남미 독립투쟁에 참가해 명성을 드높였다.
사엔스는 이후 에콰도르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를 만났으며 암살 위험에서 그를 구출하는 등 대통령궁 입성까지 볼리바르의 동지이자 참모이면서 연인이었다.
사엔스는 볼리바르가 사망하기 전 8년 동안 그와 함께 살며 그를 마지막까지 보살피며 애틋한 연정을 이어갔다.
사엔스와 볼리바르의 사랑은 그러나 당시에 불륜으로 폄하됐으며, 볼리바르가 사망하자 사엔스는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에서 추방됐다.
추방당한 사엔스는 이후 페루에서 미국 포경선원들이 남미 여성들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대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등 어려운 말년을 보냈다.
이후 독립 투사였던 사엔스의 업적 또한 평가 절하돼 사람들에게 잊혀갔으나, 남미의 두 좌파 대통령이 남미 독립 200주년을 맞아 이들의 정신적 사랑을 재결합시키는 행사를 열게 됐다.
시몬 볼리바르(1783~1830)는 남미 독립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볼리바르의 정신을 이어받아 라틴 아메리카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21세기형 새로운 사회주의’를 내건 차베스는 볼리바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신이 이루겠다는 야심찬 꿈을 품고 있다.
볼리바르는 스페인인이다. 카라카스에서 광산업자이자 크리올료(스페인계 이민자 후손)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 유학을 통해 유럽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1810년 독립전쟁에 나선 끝에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군을 내쫓고 베네수엘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4번의 망명과 귀국을 거듭하는 등 험란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베네수엘라 독립운동 당시 아이티에서 베네수엘라로 출발할 때 볼리바르에게는 이순신 장군의 12척보다 적은 7척의 배와 250명의 군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볼리바르는 1819년 안데스 산맥을 넘어 누에바 그라나다를 해방시킨 뒤, 12월 콜롬비아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1821년에 베네수엘라를, 이듬해에는 키토(현 에콰도르)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켰고,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하나의 나라로 통합시켜 ‘대콜롬비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1824년에는 페루를 독립시켰고, 1825년 페루 북부지역이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서 볼리비아로 독립했다.
남미 통합을 위한 그의 꿈은 계속돼 1825년 남미 통일을 위한 ‘아메리카 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등의 분열책과 지방 토호들의 반발로 통합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남미는 이후 20여 나라로 쪼개지고 말았다.
1830년 볼리바르는 통합의 꿈이 좌절되자 스스로 콜롬비아 공화국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그해 12월17일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세상에 바보가 세 명 있는데 예수, 돈키호테, 그리고 바로 나다.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이다.”
그가 남긴 명언 속에 혁명가의 권력 무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밀리아노 사파타, 아우구스토 세자르 산디노, 호세 데 산 마르틴, 판초 비야, 체 게바라 등 남미의 수많은 혁명가 가운데 ‘으뜸’이자 혁명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
역사학자였던 라몬 벨라스케스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은 “볼리바르에 대한 신앙심에 가까운 열정이야말로 우리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라며 “그의 사상은 도서관에나 가야 찾아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저변을 흐르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 손을 군복 상의에 넣고 한 손은 칼 손잡이를 잡은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1825년 초상화는 베네수엘라 어디에 가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또 그를 지칭하는 ‘해방자(El Liberator)’라는 이름의 거리는 어느 도시, 어느 마을에나 있고 대부분의 도시에는 볼리바르 광장이 있다.
베네수엘라는 아예 화폐 단위 명칭으로 ‘볼리바르’를 사용하고 있다.
남미의 신문들은 매년 볼리바르의 탄생일인 7월24일에 예외 없이 그의 초상화를 1면에 게재한다.
남미통합을 주장하는 우고 차베스가 지난 1999년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볼리바르의 꿈이 차베스를 통해 실현될지 주목된다.
차베스는 취임하자마자 헌법을 바꿔 베네수엘라의 국호를 그의 이름을 넣어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바꿨다.
‘180년 만의 묘지 이장식’은 남미 통합의 꿈을 가진 차베스 대통령의 야망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85호(7월19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