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182> = ‘마광수’ 하면 즉각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마광수는 벗어날 수 없다. 청록파 혜산(兮山) 박두진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 ‘윤동주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은 마광수에게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유미주의적 쾌락주의자로 굳은 마광수가 정색을 짓고 있는 근엄한 사회의 목에 방울을 달았다.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유리된 인문학계의 센세이션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산문인 동시에 시다.
시를 거두절미하면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다.
에세이로 부연하자면 ‘야한 마음을 가진 여자는 성적 욕구에 솔직한 여자이고, 성적 욕구에 솔직하다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에도 솔직해진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이성에게 사랑 받고 싶고, 이성의 눈에 쉽게 뜨이고 싶고, 이성에게 섹스어필하고 싶은 욕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고상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섹시하냐 못하냐로 결정될 뿐이다’다.
5월1일 서울 대학로에서 막을 올린 연극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마광수의 호소를 상당부분 담아내고 있다. 말단지엽은 달라도 대강은 마광수스럽다. 야하고 화려한데 즐거우면서 잔혹하기까지 하다. 외설 음란 언동이 난무하건만 극을 시종일관하는 것은 기이하게도 미스터리다.
여우 넷은 저마다 목표의식이 뚜렷하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갖추고 밖으로 관객공영에 이바지 할 기회라고 믿는 듯하다. 태도는 성실하고 몸은 튼튼하다. 이 연극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지도 감지된다.
보는 이들이 탐하는 바를 익히 알고 있는 우윳빛 이파니, 몹시 출렁이는 글래머 조수정, 부뚜막의 얌전한 고양이 이채은, 연극을 연극답게 만드는 민수진의 에로틱 하모니다. 이들 미녀 넷은 무대 위의 빈 강의실과 캠퍼스 뒷동산, 교수의 연구실에서 일을 벌인다. 긴 손톱, 뾰족 하이힐, 쥐떼, 철창, 채찍 따위로 마조히즘도 풍긴다. 극중 ‘변태’ 마광수를 위한 배려다. 언뜻언뜻 권위를 조롱하고 세태를 풍자하며 페미니즘도 내비친다. 무슨 종합선물세트 같다.
모든 연극과 마찬가지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또한 촉수 엄금이다. 5감 가운데 시·청·후·미각은 허용하되 촉각 만큼은 안 된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당당하게 훔쳐보는 것”이 관극 심리라고 마광수는 해석한다. 그래도 예서 말자니 아쉬운 남녀들이 꽤 있다. 일찍이 시 ‘가자, 장미여관으로’에서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휠링”이라고 외친 마광수다.
연극은 영화가 아니다. 언제든 수정, 보완이 가능하다. 마광수는 벌써부터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상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연극은 보다 근본적인 성적 욕구의 해방(물론 대리적, 상징적 배설행위를 통하여)을 위한 나체연극 등의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참여하여, 여배우나 남자배우와 더불어 당당한 카타르시스의 제의(祭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화부장 [email protected]
유미주의적 쾌락주의자로 굳은 마광수가 정색을 짓고 있는 근엄한 사회의 목에 방울을 달았다.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유리된 인문학계의 센세이션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산문인 동시에 시다.
시를 거두절미하면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다.
에세이로 부연하자면 ‘야한 마음을 가진 여자는 성적 욕구에 솔직한 여자이고, 성적 욕구에 솔직하다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에도 솔직해진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이성에게 사랑 받고 싶고, 이성의 눈에 쉽게 뜨이고 싶고, 이성에게 섹스어필하고 싶은 욕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고상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섹시하냐 못하냐로 결정될 뿐이다’다.
5월1일 서울 대학로에서 막을 올린 연극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마광수의 호소를 상당부분 담아내고 있다. 말단지엽은 달라도 대강은 마광수스럽다. 야하고 화려한데 즐거우면서 잔혹하기까지 하다. 외설 음란 언동이 난무하건만 극을 시종일관하는 것은 기이하게도 미스터리다.
여우 넷은 저마다 목표의식이 뚜렷하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갖추고 밖으로 관객공영에 이바지 할 기회라고 믿는 듯하다. 태도는 성실하고 몸은 튼튼하다. 이 연극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지도 감지된다.
보는 이들이 탐하는 바를 익히 알고 있는 우윳빛 이파니, 몹시 출렁이는 글래머 조수정, 부뚜막의 얌전한 고양이 이채은, 연극을 연극답게 만드는 민수진의 에로틱 하모니다. 이들 미녀 넷은 무대 위의 빈 강의실과 캠퍼스 뒷동산, 교수의 연구실에서 일을 벌인다. 긴 손톱, 뾰족 하이힐, 쥐떼, 철창, 채찍 따위로 마조히즘도 풍긴다. 극중 ‘변태’ 마광수를 위한 배려다. 언뜻언뜻 권위를 조롱하고 세태를 풍자하며 페미니즘도 내비친다. 무슨 종합선물세트 같다.
모든 연극과 마찬가지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또한 촉수 엄금이다. 5감 가운데 시·청·후·미각은 허용하되 촉각 만큼은 안 된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당당하게 훔쳐보는 것”이 관극 심리라고 마광수는 해석한다. 그래도 예서 말자니 아쉬운 남녀들이 꽤 있다. 일찍이 시 ‘가자, 장미여관으로’에서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휠링”이라고 외친 마광수다.
연극은 영화가 아니다. 언제든 수정, 보완이 가능하다. 마광수는 벌써부터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상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연극은 보다 근본적인 성적 욕구의 해방(물론 대리적, 상징적 배설행위를 통하여)을 위한 나체연극 등의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참여하여, 여배우나 남자배우와 더불어 당당한 카타르시스의 제의(祭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화부장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