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블랙핑크 팝업 다녀온 40대 아저씨 고백

기사등록 2022/09/01 13:07:32

최종수정 2022/09/03 07:48:54

[서울=뉴시스] 뉴진스 더현대 서울 팝업. 2022.09.0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뉴진스 더현대 서울 팝업. 2022.09.0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고백합니다. 전 걸그룹을 좋아하는 40대 유부남입니다. 서른살이 넘은 이후부터 이런 고백이 낯간지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나이 먹은 아저씨가 소녀들 위주로 결성된 걸그룹을 대놓고 좋아한다는 게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기 때문이죠. 제 아내 역시 아이돌을 좋아하고 모 보이그룹의 팬이지만, 제 걸그룹 팬심은 최대한 눌러야 했습니다. 

2세대 걸그룹 황금 트리오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가 등장한 이후 '삼촌팬'이라는 타이틀이 아저씨 팬심에게 면죄부(?)를 주기는 했어요. 그럼에도 "나 걸그룹 좋아"라고 열광하는 건 얼마 전까지도 멋쩍은 일이었죠. 전 대중음악 담당 기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걸그룹에 호의적인 태도는 공정성을 해치는 일이니 더욱 지양했습니다만….

그런데 걸그룹 천하인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난 주말 찾은 걸그룹 '뉴진스(NewJeans)'의 팝업 스토어에서 특히 느꼈습니다. 뉴진스는 그룹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HYBE)의 첫 론칭 음악 레이블이자, 민희진 대표이사가 이끄는 어도어(ADOR)가 제작한 첫 팀이죠.

데뷔하자마자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역대 걸그룹 데뷔 음반 초동 신기록(31만장)은 물론 트리플 타이틀곡 모두 여전히 음원차트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신인 아이돌로는 처음으로 여의도에 위치한 더현대 서울과 협업할 정도로 '핫'하죠. 더현대 서울은 최근 K팝 그룹 팝업 스토어를 잇따라 열며 아이돌 팬덤의 새로운 성지로 부상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뉴진스 인기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인 지난달 27일 오전 10시30분 더현대 서울이 문을 열자마자 찾았는데, 제 대기번호는 307번이었고, 3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팝업은 지난달 13일 열었고, 같은달 31일 문을 닫았습니다. 오픈 초기엔 무려 대기 번호가 1000번대에 달했고, 5시간을 기다린 뒤 입장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팝업 스토어에 입장했는데, 주눅이 들거나 주변에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비록 제가 나이 많은 축에 속해보이기는 했지만 연령대가 골고루였고, 연인끼리 찾은 경우도 꽤 많았습니다. 일부 굿즈는 벌써 품절이 돼 구할 수가 없더라고요. 20일 동안 1만7000명이 넘는 팬들이 팝업 스토어를 방문했고, 마지막날엔 영업 종료를 4시간 앞둔 시점에 입장 예약이 마감됐다고 합니다.

이젠 아이돌, 특히 걸그룹은 특정 젊은 세대만 좋아하는 시대는 끝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이돌 팬덤은 단순히 취향을 드러내는 기표(記標)가 아닙니다. 좀 과장해서 얘기하면, 이제 아이돌은 자신을 인식하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서울=뉴시스] 뉴진스. 2022.07.31. (사진 = 어도어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뉴진스. 2022.07.31. (사진 = 어도어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단숨에 4세대 대표 걸그룹으로 떠오른 뉴진스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청소년기부터 1세대 아이돌을 경험한 저 같은 K팝 고인물들에게 뉴진스의 음악과 스타일은 사실 새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1세대 걸그룹 'S.E.S' 유진의 긴 생머리가 떠올랐고, 서현진이 아이돌로 활약했던 1.5세대 걸그룹 '밀크(M.I.L.K)'의 '컴투미' 같은 이지 리스닝 곡이 연상됐으며, J팝에 영향을 받았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다만세)의 소녀적 청량함이 겹쳐졌습니다. 

모델 같은 민지·하니·다니엘·해린·혜인 다섯 멤버는 1990년대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 1980년대 아이돌을 선망하는 이들이 방에 걸어놓았을 법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뉴진스는 지금까지 K팝 걸그룹 아이돌들의 장점을 민희진 어도어 대표이사 식 감성으로 애틋하게 해석해 더 맵시 있게 만들어낸 결과물들이죠. 특히 이번 뉴진스 실물 CD 커버 등에서 내세운 CD플레이어(CDP)는 제 세대에겐 무차별적으로 향수를 자극했습니다. CDP를 붙박이장 안에 고이 간직했던 걸 다행으로 여겼으니까요.

최근 가장 핫한 DJ 겸 프로듀서 250(이호형) 등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참여한 음악도 좋아요. 세련된 동시에 담백한 팝 댄스('어텐션')·뭄바톤(Moombahton)과 일렉트로팝(ElectroPop)의 근사한 조합('하이프 보이')·통통 튀는 신스 댄스 팝('쿠키')·아련하면서도 사랑스러운 R&B('허트') 등 이번 데뷔 음반에 실린 네 곡 모두 음악적으로 명료합니다.

결국 뉴진스는 몽글몽글한 'Y2K'(190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유행한 밀레니얼) 감성과 Z세대 감성의 아련하고 낭만적인 만남이 만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하이틴의 뉴트로'라고 명명할 수 있는 비주얼 디렉팅이 영리한 한수입니다. 예전 향수를 Z세대 앞에 아무렇지 않게 배치하면서 세대 간 음악적 연대(連帶)를 심어놓는 선순환이 돋보입니다. 세대 통합 요소를 갖춘 것이 최근 걸그룹 음악의 트렌드인데 뉴진스가 선봉이 된 거죠.

[서울=뉴시스] 블랙핑크 더현대 서울 콘셉트 팝업. 2022.09.0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블랙핑크 더현대 서울 콘셉트 팝업. 2022.09.0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또 다른 4세대 걸그룹 간판 '아이브'(IVE)는 최근 발매한 세 번째 싱글 타이틀곡 '애프터 라이크'로 음원차트를 휩쓸고 있는데, 이 곡은 티아라·레인보우·나인뮤지스 등 2009~2010년에 데뷔해 활약한 K팝 2세대 걸그룹을 현재 소환 중입니다. 이 노래가 2세대 걸그룹 주요 트렌드 중 하나였던 '뽕짝 바이브'를 환기하고 있기 때문이죠. 3세대 간판 걸그룹 '트와이스' 역시 새 앨범 '비트윈 원앤투'와 타이틀곡 '톡댓톡'에 Y2K 감성을 가득 담았습니다.

물론 다양성의 시대에 모든 걸그룹이 같은 트렌드를 타는 건 아닙니다.

3세대 걸그룹의 또 다른 간판 블랙핑크는 지난달 19일 공개한 정규 2집 '본 핑크'의 선공개곡 '핑크 베놈'으로 미래 지향적인 인식을 보여줬습니다.

'핑크 베놈'이라는 제목 자체는 이질적입니다. 언뜻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분홍과 독(Venom)의 조합이라니요. '독이 든 성배'라는 표현을 빌려오자면, 독이 든 분홍잔 같은 느낌. 제니는 "사랑스러운, 즉 예쁜 독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가시가 있는 장미'의 현대 K팝적 변형이라고 할까요. 안무 역시 사랑스러운 독입니다. 화려한 외모를 지닌 지수·제니·로제·리사가 손가락으로 송곳니를 만드는 자체가 그렇죠.

공교롭게 뉴진스 팝업 스토어가 끝나갈 무렵, 같은 장소 다른 층에서 블랙핑크의 콘셉트 팝업이 열렸습니다. 뉴진스 팝업은 트렌디한 브랜드가 가득한 지하 2층에서 열렸고, 블랙핑크의 콘셉트 팝업은 개방감이 확 눈에 띄는 5층 사운즈 포레스트에 마련됐습니다.

블랙핑크가 미국 주요 대중음악 시상식 중 하나인 '2022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Video Music Awards·2022 MTV VMAs)에서 2관왕을 차지한 당일인 지난달 29일 문을 열었는데, 핑크 베놈' 뮤직비디오 콘셉트를 현실에 재현했습니다. 이 층에 올라서자마자 이번 '핑크 베놈'의 상징인 거대한 송곳니 형상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뉴어크=AP/뉴시스] 그룹 블랙핑크가 28일(현지시간) 미 뉴저지주 뉴어크의 프루덴셜 센터에서 열리는 ‘2022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VMA)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블랙핑크는 올해의 그룹, 베스트 메타버스 퍼포먼스, 베스트 K팝(리사) 등 총 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왼쪽부터 리사, 지수, 제니, 로즈. 2022.08.29.
[뉴어크=AP/뉴시스] 그룹 블랙핑크가 28일(현지시간) 미 뉴저지주 뉴어크의 프루덴셜 센터에서 열리는 ‘2022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VMA)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블랙핑크는 올해의 그룹, 베스트 메타버스 퍼포먼스, 베스트 K팝(리사) 등 총 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왼쪽부터 리사, 지수, 제니, 로즈. 2022.08.29.
오는 4일까지 진행하는데, 개방된 공간인 만큼 따로 입장료 등을 받지 않고 무료로 진행 중입니다. 굿즈 등의 판매도 없고 뮤직비디오 속 오브제들이 미술 전시품처럼 배치됐습니다. 뮤직비디오에서 거대한 송곳니가 그려있는 웅장한 벽돌을 몬스터 트럭이 박차고 나오는 순간이 제니의 장면인데, 그 벽이 전시돼 있고 그 옆에 놓인 안내문 속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최근 가장 핫한 두 그룹이 팝업을 이용하는 방식이 상반돼 눈길을 끕니다. 막 마니아를 형성하기 시작한 뉴진스는 제한된 공간의 화제성으로 입소문을 냈고, 이미 K팝 간판이 된 블랙핑크는 개방 공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번 신곡의 콘셉트를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K팝 아이돌 팝업이 새로운 건 아닙니다. 코로나19 이전에 방탄소년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색깔의 팝업이 문을 열었죠. 그런데 최근 팝업은 걸그룹의 힘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블랙핑크와 에스파 등 이제 걸그룹이 앨범을 100만장 이상 너끈히 팔아치우는 시대가 도래했고 그 만큼 팝업에도 많은 인원이 몰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니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걸그룹은 남녀노소 골고루 평이하게 좋아하고 음원차트에서 선방하는 아이돌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음원차트 성적(올 여름 내내 음원차트 10위권은 걸그룹 천하였습니다)은 물론 실물 CD 판매량도 보이그룹 이상의 성적을 내는 시대가 왔습니다.

더 이상 걸그룹은 귀엽거나 예쁜, 단순히 이성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함께 정서를 교감하고 메시지를 나누는 연대의 대상이 됐습니다. 현재 업계는 물론 대중들도 제2의 방탄소년단을 찾는데 혈안입니다. 그런데 최근 업계 내부에선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제2의 방탄소년단이 꼭 보이그룹일 필요는 없지 않냐고. 맞습니다. 더이상 걸그룹이 아닌 그냥 그룹입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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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진스·블랙핑크 팝업 다녀온 40대 아저씨 고백

기사등록 2022/09/01 13:07:32 최초수정 2022/09/03 07: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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