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지금으로부터 꼭 110년 전인 1912년 4월10일 정오. 세계 최대 크기의 호화로운 여객선이 승무원 883명을 포함한 2223명의 승객을 태우고 목적지인 뉴욕을 향해 영국 남부의 유서 깊은 항구인 사우스햄튼을 출항한다.
배가 진수되고 난 후에 처음으로 나서는 항해였다. 북대서양 항로를 운영하는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 선사의 주문으로 1909년 3월31일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건조를 시작해 1911년 5월31일 진수했다. 건조 비용으로는 당시 화폐가치로 750만 달러(현재가치로 한화 약 2600억원)를 투입했다.
4대의 엘리베이터와 함께 총 11개층으로 건조된 배의 주요 제원은 배수량 5만2310톤, 선체 길이 269m, 선폭 28m, 최대 출력 5만9000마력, 최대 통신 거리 3200㎞, 최대 탑승 인원 3547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여객선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건조 후에는 ‘불침선(The Unsinkable)’으로 불리기도 했다. 배의 길이는B747 점보 여객기 4대, 넓이는 FIFA 공인 축구장 3개의 크기에 해당한다.
2223명의 승객 중 1등석 승객은 329명, 2등석은 285명, 3등석은 710명이 탑승했다. 요금은 매우 비싸서 1등석이 현재 가치로 편도 약 420만~1억2000만원(2개 밖에 없는 가장 비싼 스위트 룸 기준), 2등석은 약 150만원, 3등석은 약 40만원~100만원 정도였다. 실제로 가장 비싼 티켓을 산 사람은 7000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1등석 티켓을 구입한 여성 승객이었다.
1등석 승객을 위한 편의 시설은 요즘의 최상급 호텔을 능가했다.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피트니스 센터에는 전문 코치, 노 젓기 머신·벤치 프레스 등 근력운동기구를 비롯해 고정식 유산소 운동용 자전거. 승마용 전동 낙타/전동 말 등의 기구와 수영장, 스쿼시 코트, 야외 산책로를 갖추고 있었다. 그 외의 시설로 로터키 탕, 전동식 욕조, 사우나실, 개인용 마사지 룸, 이발소,리셉션 장, 연회장과 무도장, 바, 도서관, 집필실, 라운지, 루이16세 스타일로 장식한 초호화 레스토랑과 카페 등이 있었다. 레스토랑은 한 번에 137명에게 풀코스 요리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레스토랑은 주말 비는 시간 동안 예배당으로 사용됐다.
2등석 승객은 394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용 레스토랑, 바, 이발소, 도서관, 흡연실, 3개의 별도 야외 산책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3등석 승객은 보통 한 선실을 4~10명이 사용했고 소음과 진동이 심한 부위에 위치했으나 4개의 공용 휴게 공간이 있는 등 다른 여객선에 비해서는 눈에 띄게 좋은 시설을 제공했다.
이 여객선의 이름은 그 유명한 ‘RMS 타이타닉 호’다. 사우스햄튼을 떠난 타이타닉 호는 같은 날 오후 6시30분 프랑스의 셀부르, 오후 11시30분에는 아일랜드의 퀸스타운에 잠시 기항한 후 북쪽으로 항로를 잡는다.
이후 3일간은 순조롭게 대서양을 항해했다. 그러나 운명의 날인 4월14일 오후 11시40분, 타이타닉 호는 뒤늦게 발견한 빙산에 충돌한다. 그 후 채 3시간도 지나지 않은 4월15일 오전 2시20분, 밴드가 마지막까지 연주를 계속하는 가운데 영하 2.7도의 차가운 북대서양의 바다 속으로 완전히 침몰한다. 역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로 불리는 이 사고로 1517명이 사망한다.
타이타닉 호의 침몰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하고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한 영화(1997년 개봉)로도 유명하지만 와인과 관련해서도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타이타닉 호는 출항하면서 샴페인, 화이트 와인, 모젤 와인 등 1만여병의 와인과 2만병의 맥주·위스키 등을 비롯해 850병의 주류 그리고 2만개의 와인 잔을 배에 실었다. 레드 와인은 증기 엔진의 진동으로 침전물이 뜨기 쉽다는 이유로 최소한만 적재했다.
1등석 승객에게는 모엣 샹동·하이직 샴페인, 소테른·보르고뉴·모젤 화이트 와인, 포트·세리 등 강화 와인과 보르도의 레드 와인 등 약 10종류의 와인이 10가지 코스 요리와 함께 제공됐다. 배가 침몰한 날 저녁에는 크림 보리 수프, 굴, 연어, 치킨 필레, 소 안심, 어린 양고기 등 요리와 함께 샴페인, 화이트·레드 와인, 마데이라 와인, 프랑스산 꼬냑 등이 나왔다.
침몰 73년만인 1985년 타이타닉 호의 잔해가 북대서양의 해저에서 발견됐는데, 그 안에서 손상되지 않은 1907년산 하이직 샴페인이 나왔다. 정확히 몇 병을 인양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2004년에 그 중 6병이 아시아계 수집가에게 고가로 판매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오래된 와인은 마실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자연적으로 보관된 와인은 맛에 커다란 변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극적인 사고로 침몰한 여객선에서 나온 와인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우아한형제들 인사총괄 임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