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재의 크로스로드]도박판보다 못한 북한경제

기사등록 2013/08/13 05:00:00

최종수정 2016/12/28 07:54:01

북한 2009년 화폐개혁 단행
중소 상인 축적한 자금 박탈
재산 지키기 위한 외화 사용
북한 신용 시스템 붕괴 촉진

【서울=뉴시스】정문재 부국장 겸 경제부장 = 도박도 신용을 먹고 산다. 속임수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도박에 뛰어든다. 도박장도 마찬가지다. 도박판을 떠날 때는 칩을 반드시 현금으로 바꿔준다.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도박장에 대한 신뢰가 높다면 칩은 화폐의 지위를 확보할 수도 있다.

 19세기에 태국의 도박장에서 사용된 칩이 그랬다. 태국 도박장에서는 도자기 조각으로 만든 칩을 이용했다. 도박장이 면허 취소 등의 이유로 사업을 정리할 때면 반드시 칩을 현금으로 바꿔줬다. 도박장 직원들은 마을 곳곳을 돌며 "3일 이내에 칩을 현금으로 바꿔줄 테니 꼭 교환해 가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 정도라면 칩은 화폐나 다름없다. 신뢰만 뒷받침되면 어떤 것이라도 화폐로 기능할 수 있다. 믿음이 무너지면 화폐는 생명력을 잃고 만다. 

 화폐의 본질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많다.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인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크납(Georg Friedrich Knapp)은 화폐국정설(貨幣國定說)을 주장했다. 화폐란 국가가 법에 의해 통용을 강제한 지급수단이라는 주장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는 화폐국정설을 비판했다. 그는 "사적 계약을 통해서도 화폐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반박했다. 대표적인 예가 은행의 통화 공급이다. 은행은 대출을 통해 통화를 공급한다.

 화폐의 본질은 '신뢰'다. 신뢰를 잃으면 화폐는 죽는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를 비롯해 로마가 안정을 유지했을 때는 항상 주화가 금속 함량보다 높은 가치에 유통됐다. 나라에서 주화의 가치를 보장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세계 경제사는 신용 시스템이 지배했던 시기와 금화나 은화에 의존했던 기간으로 양분된다. 전쟁이 터지면 주로 금화나 은화를 사용한다. 전쟁은 신뢰를 죽인다. 상대방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외상거래는 자살 행위다. 금 같은 귀중품이 신뢰를 대신한다. 금이나 은의 순도와 중량만 확인하면 모든 게 끝난다. 중세 시대의 금화나 은화는 오늘날 마약 거래업자의 현금 뭉치나 다름 없었다.

 사회가 평화를 유지하면 다르다. 금이 아니라 신용시스템에 의존한다. 그게 비용도 적게 든다. 자연스레 안정적 발전으로 이어진다. 

 북한에서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달러라이제이션이란 자기 나라의 법정(法定) 통화가 있는데도 외국 화폐가 함께 사용되는 것을 가리킨다.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로서 외국 화폐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자국 통화와 외화를 함께 사용하면 달러라이제이션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자신들의 화폐인 원화와 중국 위안화가 많이 사용된다.

 위안화를 비롯한 외화는 주로 신의주 등 국경지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평양 등 전국으로 확산된 상태다. 북한 군부가 2011년 8월부터 검열 활동을 벌인 결과 평양에서도 위안화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의 달러라이제이션은 지난 2009년 말 전격적으로 시행된 화폐개혁의 '후폭풍'이다. 2000년대 들어 중국과의 교역이 늘어나자 중소상인들은 자산을 서서히 축적했다. 상인들은 화폐개혁과 함께 자신들의 자산을 몰수당한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흔히 화폐의 3대 기능으로 '교환의 매개', '계산 단위', '가치 저장' 등을 꼽는다. 달러라이제이션이 확산된다는 것은 북한 원화가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이런 돈을 갖고 있으면 재산을 불리기는커녕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가치 저장' 기능을 잃으면 '교환의 매개' 역할도 위축된다. 그 돈을 줘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화폐는 시장에서 서서히 퇴장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은 단지 총칼을 앞세워 북한 원화 사용을 강제하고 있을 뿐이다. 총칼이 보이지 않으면 위안화가 다시 길거리에 등장한다. 

 크납이 북한의 상황을 목격한다면 '화폐국도설(貨幣國盜說)'을 주장할 것 같다. 국가가 개인의 돈을 강도처럼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산을 강탈하면 국가는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런 사례를 숱하게 목격했다. 

 중세 때도 화폐 가치 보전 문제는 중대한 국가적 관심사였다. 존 로크는 "정부가 화폐가치를 조작하면 대역죄(大逆罪)를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도박판에서도 지키는 신뢰를 북한은 외면하니 딱하기 짝이 없다.

참고문헌
1) Einzig, Paul. 1949. Primitive Money in its Ethnological, Historical, and Ethnographic Aspects. New York : Pergamon Press)
2) Caffentzis, Constantine George. 1989. Clipped Coins, Abused Words, and Civil Government: John Locke’s Philosophy of Money. New York: Autonomedia. 
3) 양문수, 김석진. 2012. 북한의 달러화(Dollarization) 현상: 실태와 평가. 북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과 북한의 미래.
4) Chartalism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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