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 대변인으로 참여했던 김성용(93) 신부가 5·18 46주기를 나흘 앞둔 14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동지들을 추모했다.
46년 전 수습대책위원 내 강경파로 활동했던 자신을 포함한 동지 13명의 뜻을 되새기고 기억하고자 묘역을 찾은 그는 "5·18을 세상에 알린 것으로 내 몫을 다 했다. 후대가 헌법 전문 수록에 나서달라"며 말을 아꼈다.
김 신부는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광주에서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며 시민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의인의 피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수습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시민군 총기 회수에만 치중해온 직전 수습대책위의 행동과 방향을 질타했다.
나아가 5월 26일에는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을 막고자 고(故) 명노근 교수 등 수습대책위원들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벌인 당사자기도 하다.
김 신부는 5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광주의 실상을 전하기 위해 수습대책위원들과 협의하고 같은날 오후 광주를 떠났다. 광주의 실상이 전달된다면 김 추기경이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만나 계엄사의 강경대응을 완화하고 광주의 수습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였다.
항쟁 당시 마흔 중반이었던 그는 벌써 구순을 넘겨 휠체어에 앉았다. 거동이 불편한 탓에 추모탑 참배에 그친 김 신부를 대신해 동행한 위인백 한국인권교육관이사장과 김승원 홍남순변호사 기념재단 상임이사가 대신 동지들의 묘소에 헌화했다.
그는 "명분 없이 총기를 반납해야 한다는 당시 수습대책위에 반발해 뜻이 맞는 재야 인사들이 모였다. 남동성당에 모여 시국을 논하던 이들이 이제 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다"며 "46년 전 광주를 탈출해 5·18의 진상을 알린 것으로 내 소임은 끝났다. 부디 후대들이 헌법 전문 수록과 5·18 정명 운동 등에 힘차게 나서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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