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도매가 4만6000원선…1년 만에 1만원 가까이 ↓
올해 벼농사도 풍작…생산량도 작년과 비슷할 전망
9000억원 투입해 초과 생산량 37만t 전량 시장격리
공급 과잉 막기 버거워…수확기 재고량 50만t 예상
정부 이달 중 대응책 발표…임시방편 그칠까 우려도
[세종=뉴시스] 오종택 기자 = 올해도 벼농사는 지난해에 이어 풍년이 예상된다. 봄 가뭄과 여름철 집중호우, 태풍 등 기상재해가 잦았지만 다행히 벼농사에는 별다른 해를 입히지 않았다.
정확한 생산량은 통계청 조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작년보다 재배면적이 소폭 줄었음에도 생산량은 작년 수준과 비슷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추수철을 맞은 농민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농민단체는 트랙터로 수확을 앞둔 논을 갈아엎고, 대로변에 나락을 쌓아 불태우는 등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전례 없는 쌀값 폭락으로 올해 들어 연일 물가는 고공행진 중이지만 유독 쌀값만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농수산물유통공사(aT)의 농산물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15일 기준 쌀 20㎏ 도매가격은 4만6888원으로 1년 전(5만6380원)보다 9492원(16.8%) 하락했다.
지난해 쌀 재배면적이 20년 만에 증가하고, 생산량도 388만2000t으로 전년 대비 10.7%(37만5022t) 늘었다. 근래 보기 드문 풍작이었지만 쌀 가격은 농민들의 마음과 다르게 움직였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쌀값이 물가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불과 1년 만에 상황이 180도 바뀐 셈이다. 대부분의 물가가 고공행진하고 있지만 유독 쌀값만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쌀값 하락의 원인으로 농민들은 정부의 시장격리 조치가 제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시장격리는 정부가 일정량의 쌀을 매입하는 방법으로 유통량을 조절해 가격을 안정화하는 정책이다.
지난해 가을 본격적인 수확철을 앞두고 쌀 생산량이 증가할 것이라는 통계청의 발표가 있었지만 시장 격리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쌀값이 곤두박질쳤다는 게 농민들의 주장이다.
정부는 지난해 2월 20만t에 이어 5월 12만6000t을 매입했다. 하락세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지자 8월에는 10만t을 추가로 매입했다. 지난해 수요량(361만t) 대비 초과 생산된 쌀 27만t이 넘는 양을 모조리 사들였다.
하지만 전국 농협 쌀창고에 쌓인 구곡(묵은쌀)은 포화상태다. 농협에 따르면 8월 기준 농협 구곡 재고는 31만3000t으로 전년(15만4000t) 대비 두 배나 늘었다.
이는 최근 10년 내 최고 수준으로 정부가 세 차례에 걸쳐 43만여t을 시장 격리했음에도 재고 과잉에 따른 쌀값 하락은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범진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실장은 "정부가 쌀 과잉 생산에 따른 시장 격리를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매입 물량이나 시기에 있어서는 현장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정책 효과가 반감됐다"고 지적했다.
농민단체는 정부가 지난해 초과 생산분 이상을 시장격리 조치했지만 여전히 평년 대비 재고량이 많아 가격을 안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이다.
정부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1년 전 이맘때 쌀 20㎏ 도매가격은 5만7356원으로 2020년 5만780원 보다 12.9% 비쌌다. 평년(4만3427원)과 비교하면 무려 32.1%나 오른 상태였다.
정부가 시장격리를 서두르기에는 가격이 평년에 비해 유난히 높게 형성됐고, 이 상태로 조기 시장격리에 들어갔다면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뻔했다.
지난해 10월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로 올라서는 등 물가 폭등의 기운이 엄습하는 시기였다. 정부로서는 물가 관리 1순위 품목인 쌀값 변동 추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 단체의 요구대로 공공비축분(작년 기준 35만t) 외에 추가로 시장 격리 조치를 할 경우 예산 투입이 불가피하다. 정부가 시장 격리를 할 때는 시세를 반영해 값을 치르는데 평년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매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지난해 수확량 증가로 쌀값이 전년 대비 하락하면서 정부의 시장격리 시행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됐다. 일부 농가에서는 값을 더 쳐줄 것이란 기대에 출하를 일부러 늦춘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럴수록 재고량은 더 쌓였다.
결국 정부는 지난해 2월부터 초과 생산분을 포함한 37만t을 시장 격리하는 데 9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과잉 생산에 따른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1조원 가까운 혈세를 쓴 셈이다.
시장 격리한 구곡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매년 추가 예산이 필요하다. 결국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그 부담은 국민들의 몫이 된다. 양곡관리법에 따라 시장 격리가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에서도 정부가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제는 올해와 같은 쌀값 하락세가 수확기를 지나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농협은 매월 재고 소진물량을 감안해도 본격적인 수확철인 다음 달 구곡 재고는 15~18만t, 신곡은 33~39만t으로 총 50만t 이상의 공급 과잉을 예상하고 있다.
재고량이 계속 쌓이면 가격 안정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향후 수년 간 쌀 생산량이 소비량보다 많은 과잉 생산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이 올해 초 발간한 '농업전망 2022' 보고서에 따르면 쌀 생산량은 벼 재배면적 감소로 올해 381만5000t에서 2031년 349만1000t 수준까지 줄어든다. 같은 기간 쌀 소비량은 356만1000t에서 327만3000t으로 감소해 10년 뒤에도 쌀 생산량이 소비량보다 21만8000t 많을 것이란 예상이다.
이는 올해 예측한 공급과잉 물량 25만4000t과 비슷한 수준으로 앞으로도 매년 20만t 이상의 쌀이 남아돌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정부는 일단 쌀값 폭락에 대응해 이달 중으로 대책을 내놓는다는 방침이지만 중장기적인 대책보다는 당장의 가격 안정을 위한 임시방편에 그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농림축산식품부가 중심이 돼 이달 말 쌀 수급 안정 대책을 마련해 발표할 것"이라면서 "시장격리 조치가 필요한지, 물량은 얼마나 필요한지, 아니면 다른 수급 안정 조치가 필요한지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농촌진흥청의 올해 작황 조사결과가 나오면 이를 보고 시장 격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최대한 시기를 앞당길 것"이라며 "내년 예산안에 신규 편성한 전략작물 직불제 예산(720억원)도 국회 심의 단계에서 증액 요청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