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아이즈]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 지낸 지청천 전 의원 일가

기사등록 2011/09/05 11:38:50

최종수정 2016/12/27 22:41:55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케네디, 루스벨트, 애덤스, 부시, 태프트….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명가다. 우리나라에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을만한 업적을 쌓은 가문이 없을까. 뉴시스는 한국의 정치명가 기획기사 여섯 번째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지청천 일가편을 게재한다.  

 백산 지청천 전 의원은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내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이다. 지 전 의원 일가 역시 아들 지달수·지정계, 딸 지복영 지사가 모두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 가족’이다.  

 1888년 2월 서울에서 태어난 지 전 의원은 5살 때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모친은 지 전 의원이 8살일 때 일본인에게 동전을 받자 “나라를 침노하는 천한 일본인의 돈은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꾸짖을 정도로 꼿꼿하고 강직한 성품이었다.  

 지 전 의원은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재종숙인 지석영 선생의 영향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어 황성기독청년회(YMCA의 전신)에서 활동한 뒤 한국무관학교를 거쳐 관비로 일본에 유학,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근대 군사지식을 쌓았다.  

 3·1운동 등으로 전국에 독립운동 열기가 들끓었던 1919년 지 전 의원은 일본군에서 탈출,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소였던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을 맡으며 독립운동대열에 동참했다.

 그는 일본군에서 탈출하기 위해 식음을 끊고 일부러 몸을 상하게 하고서야 요양을 핑계로 일본을 떠날 수 있었다.

  지 전 의원은 후에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장을 거쳐 교장을 맡았다. 그는 교장시절 개교식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자.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라고 독립운동 의지를 고취시켰다.

 그는 이후 서로군정서를 이끌며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합세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여단장을 맡아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1924년 정의부가 조직됐을 때는 중앙위원과 산하 의용군 총사령관에 선임돼 국내 진격전을 벌였고, 30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편성해 총사령관을 지냈다.  

 31년에는 중국군과 함께 ‘한중연합군’을 결성해 만주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자전자령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후 임시정부에 합류한 지 전 의원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40년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총사령관을 맡았다. 광복군은 중국 등 외국의 연합군과 협력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선전, 암호문 해독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지 전 의원은 미군의 반대로 46년 4월28일에야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후 그는 조국재건의 원동력은 청년이라는 신념으로 ‘대동청년단’을 창설했다.

 47년 제헌국회의원이, 정부 수립 후에는 현재의 특임장관격인 무임소장관이 됐다. 이후 지 전 의원은 2대 국회의원과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국회 전원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무위원장, 국방위원장 등을 지냈다.

 57년 향년 70세의 나이로 서거할 때까지 끊임없이 조국 재건과 발전에 진력했다.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1920년생인 지 전 의원의 딸 지복영 애국지사 역시 스무 살이던 40년 임시정부 광복군에 가입, 오광심·김정숙·조순옥 등과 여성대원으로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지 지사는 당시에 대해 생전에 가진 인터뷰에서 “아버지에게 ‘저라도 필요하면 써 주십시오’라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잘 생각했다. 조국 독립하는데 남자, 여자 가리겠느냐. ‘한국의 잔다르크’가 되거라’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지 지사는 1942년 광복군 징집위원회 위원 겸 비서, 45년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다. 77년 건국포장,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수여받았다. 2007년 4월18일 향년 87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지 전 의원의 아들 지달수, 지정계 지사 역시 항일운동가였다. 지 전 의원의 맏아들인 독립운동가 지달수 지사는 부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중국 검성중학교를 마친 후 독립군에 입대했다.

 이후 40년 광복군에 참여해 지대장 공진권, 유해준 등과 함께 지하조직망을 굳혔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지달수 지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지정계 지사는 귀국 후 국방경비대를 거쳐 국군으로 편입됐고, 1946년 좌익계열이 벌인 여순반란사건 때 소위로 교전 중 전사했다.  

 지복영 지사의 아들이자 지청천 전 의원의 외손자인 이준식씨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내며 을사오적 등 친일인사 400여 명의 후손이 보유한 재산 환수 작업을 진행했다.

 이씨는 지난 2월 모친 지복영 여사가 보관해오던 지 전 의원의 ‘자유일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자유일기에는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백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지 전 의원은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연회에 불참한 이유에 대해 ‘만민이 기아 지경인데 30억원 비용을 들여서 거행함은 찬성할 수 없다’고 밝혔고, ‘법망이 해이돼 제2의 장개석 정부를 답습하는 것 같다. 이는 애국자, 혁명가를 기피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용인법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지 전 의원은 충주 지씨 시조 지경의 31대손으로, 종두법을 최초로 도입한 조선 후기의 의사·문신·국문학자 공윤 지석영 선생과 문인화가 백련 지운영 선생의 7촌 조카다.

 지석영 선생은 구한말의 의사·문신·국어학자로, 1879년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배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종두법을 실시했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에서 종두를 관장하게 됐고 김홍집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승지, 동래부사를 지냈다.

 이후 학부대신에게 의학교의 설립을 제의,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교장으로서 1902년 첫 의학교 졸업생 19명을 탄생시키는 등 끊임없이 의학교육에 헌신했다.

 지 선생은 우리나라의 개화를 위해서는 어려운 한문이 아니라 알기 쉬운 한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주시경 선생 등과 함께 가로쓰기를 주장했다.

 그는 이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모든 공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다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지석영 선생의 형 백련 지운영 선생 역시 일본에 끊임없이 항거해 온 항일투사였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여항문인 강위의 문하에서 시문을 배운 지 선생은 갑신정변 후에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하 일본에 건너갔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유배를 당했다.

 그는 1895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은둔해 시와 그림에 몰두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충주 지씨는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 960년에 귀화한 지경(903~1003)을 시조로 한다. 지경은 귀화 후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를 지냈다. 지경의 6세손인 지종해가 고려 때 충주백에 봉해진 후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충주 지씨에는 유독 무관이 많았다. 조선시대에 문과 10명, 무과 39명, 사마시 31명, 역과 1명, 음양과 14명, 율과 5명 등 100명의 과거 급제자를 냈다.  

 지청천 전 의원은 충주 지씨 양중공 지세함의 10대손이며, 고려의 명장 충의군 지용기 장군의 15대손이다. 조선조 병조참판을 지낸 지영해, 절제사를 지낸 지봉원, 서흥부사를 지낸 지계최 등도 충주 지씨다.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43호(9월12~19일자 추석합본)에 실린 것입니다.
button by close ad
button by close ad

[뉴시스아이즈]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 지낸 지청천 전 의원 일가

기사등록 2011/09/05 11:38:50 최초수정 2016/12/27 22:41:55

이시간 뉴스

많이 본 기사

기사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