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서 활동하는 통계조사관 심층 인터뷰
3명 중 1명, 문전박대…"내일도 모레도 찾아가"
"언니는 영원한 내 둘째 언니"…소중한 인연도
"통계조사 협조, 자녀들 안정적 일자리 기반 돼"
[세종=뉴시스]임하은 기자 = "마음의 문을 여는 게 우리의 일이에요. 무조건 밀어붙여서도 안 되고, 진심을 보여주고 그 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게 가장 중요해요."
체감온도가 0도까지 떨어진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관악구 봉천역 2번 출구 인근, 아이스크림 프렌차이즈 가게를 끼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나오는 동네가 있다. 이곳은 19년 차 베테랑인 한난이(53) 통계조사관이 경제활동인구 통계를 수집하는 업무지다. 골목 진입로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르신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그의 모습에선 오랜 벗 같은 정이 묻어났다.
국민의 경제 실태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선 통계 자료 확보가 핵심이다. 국민 삶의 현장에서 통계를 수집하는 정예 요원들이 바로 통계조사관이다. 전국에 2000여명의 통계조사원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인 1000여명이 공무직(무기계약직) 조사관이다.
뉴시스는 이날 수도권에서 10년 넘게 통계조사관으로 활동한 50대 여성 통계조사관 두 명을 만났다.
3명 중 1명은 문전박대…"내일도 모레도 찾아가야"
11년 차 소정우(56) 조사관이 경활 조사를 담당하는 지역 중 한 곳은 강서구다. 이곳은 전국에서 전세사기 보증금 피해 규모가 가장 큰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소 조사관이 담당한 13가구 중 절반이 전세사기 피해를 입었다. 80살이 넘은 할머니와 어린 손녀 둘이 지내는 가구도 전세사기 피해를 비껴가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수억원의 전셋값을 날린 사람들에게, 통계를 위한 조사 기재를 부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소 조사관은 말했다.
"처음에는 아는 척도 안 하셨는데, 두 번 세 번 찾아가 인사드리니 반가워하셨어요. 그 미소를 보고 너무 좋았지만, 바로 조사기입을 요청하기엔 상황이 이른 것 같아 한 템포 더 기다리는 중이에요. 진심을 담아서 기다리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느껴요."
조사관들은 이런 안타까운 가정의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무거운 마음을 하루에도 수차례 끌어올린다. 오늘 응답을 해주지 않으면 내일이고 모레고, 낮이고 밤이고 계속 그 가구를 방문한다. 이렇게 통계의 정확도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과정 중 소 조사관은 대상포진을 얻기도 했다.
매달 15일이 낀 일주일간의 경제활동을 조사하는 경활조사와 달리 가계조사는 한 달 동안 매일 가계부를 세밀히 작성해야 하는 수고가 뒤따른다. 가계조사는 이런 특수성 때문에 응답률이 경활조사보다 낮다. 지난해 기준 가계동향조사의 불응률은 34.8%에 달한다. 3명 중 1명이 넘는 응답자들이 조사관들을 문전박대한다는 뜻이다. 응답이 상대적으로 간단한 경활조사의 불응률은 12.1%이다.
"난이 언니는 영원한 저희 둘째 언니"…소중한 인연들도
흔히 '꼽추'라고 불리는 척추후만증을 앓는 중년의 여성 박희선(가명)씨가 노모와 함께 살던 가구는 한 조사관에게 가장 뜻깊은 기억이다. 한 조사관은 그 집에 들를 때면 작은 선물을 늘 챙겼다. 낯선 이의 방문에 박씨는 처음엔 두려워했지만 꾸준히 설득한 끝에 서서히 마음을 열었고 조사에 응했다.
한 조사관은 생일날 한글에 서툰 박씨가 쓴 삐뚤삐뚤한 자필 손편지를 받았다. '메리 크리스마스'로 시작한 편지의 맺음말은 "난이 언니는 영원한 저희 둘째 언니예요" 였다.
또 다른 가정에선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세 아이를 키우는 씩씩한 며느리 윤지영(가명)씨를 만났다. 윤씨는 늦은 밤 퇴근 후 한 달간 매일 가계부를 기입하면서 스스로 뿌듯함과 보람을 느낀다며 흔쾌리 조사에 응했다.
병원진료비가 가구 지출에서 항상 큰 부분을 차지했던 윤씨네는, 알고보니 그의 남편이 지병을 앓고 있었다. 가계조사가 진행되던 6개월 사이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윤씨는 그런 가운데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고 홀로 노모와 아이들을 돌봤다. 한 조사관은 그 삶에 감동해 마음을 깊이 나누게 됐고, 윤씨는 가계조사를 쉬는 6개월 동안에도 통계를 작성해 한 조사관에게 건넸다. 한 조사관은 이 사연을 알렸고 윤씨는 통계조사에 기여한 공로로 경제부총리상을 받았다. 한 조사관은 통계조사를 하며 생긴 귀한 이런 인연을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낙상사고·폭언에도 오늘도 초인종을 눌러요"
한 조사관과 함께 입사한 19년 차 베테랑이었던 A조사관은 최근 명예퇴직했다. 평소처럼 서울 대치동에서 가구조사를 하다 세입자의 갑작스러운 밀침에 계단 낙상사고를 당할 뻔한 후로, 그에겐 트라우마가 생겼다. 문을 열도록 설득하는 게 조사관의 업무인데,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긴장과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살이 계속 빠졌고 몇 달 후 그는 일을 그만두는 길을 택했다.
"자꾸 오면 신고할 거예요"라는 말은 조사관들이 자주 듣는 멘트 3위 안에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문과 우편 등으로 '표본가구로 선정됐다'고 수차례 고지를 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부지기수다. 그때는 조사관들이 직접 간절함을 담은 손편지를 붙인다. 맞벌이 가구가 많기에 늦은 밤 다시 가구를 찾아 설득하기도 한다.
통계 자료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설계하는 근간이다. 표본으로 선정된 가구가 기입해준 수치 하나하나가 모여 정책 수립으로 이어지기에 어찌보면 조사 응답자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세우는 첫 시작점인 셈이다.
한 조사관은 말한다.
"조사에 협조해 주면 우리 자녀들이 자라 안정적인 고용 상태로 일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거든요. 통계조사 응답은 내가 당장 번거롭고 불편하지만 내 세대에서 끝나지 않아요. 마치 한 그루씩 심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 그루씩 나무를 심으면 그게 숲을 이뤄 울창해지듯, 미래의 우리나라를 위해 함께해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부디 문만 열어주세요"
한 조사관은 말한다.
"조사에 협조해 주면 우리 자녀들이 자라 안정적인 고용 상태로 일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거든요. 통계조사 응답은 내가 당장 번거롭고 불편하지만 내 세대에서 끝나지 않아요. 마치 한 그루씩 심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 그루씩 나무를 심으면 그게 숲을 이뤄 울창해지듯, 미래의 우리나라를 위해 함께해주시면 정말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