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앞 성복중앙교회 '새벽만나'
영양소 고루 갖춘 한 끼 9년째 무상 제공
"학생들 끼니 거르면 안 돼"…새벽부터 준비
"성장 필요한 학생들…학교들이 마음 더 쓰길"
[서울=뉴시스]정유선 기자 = 잡채, 표고버섯튀김, 오징어숙회, 콩나물미나리무침, 토마토브로콜리샐러드, 북엇국…
이 식당에서 맛깔스러운 반찬이 가득 담긴 구첩반상의 가격은 다름 아닌 '0원'이다. 먹다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가져다 먹어도 되는 '무한리필'이다.
식사를 마친 대학생 윤모(24)씨는 빈 접시를 내보이며 "여기가 아니면 아예 아침을 먹지 않았을 텐데 덕분에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도서관에 간다"며 "매일매일 반찬이 다른데 질이 엄청 높다"고 했다.
물가 인상으로 대학들이 학식 가격을 줄줄이 인상하며 학생들의 식비 부담이 가중되는 가운데, 10년 가까이 대학생 청년들에게 무료로 아침을 제공하는 이 식당은 바로 서울의 한 교회다.
지난 26일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성복중앙교회 지하 식당을 찾았다. 고려대 캠퍼스 정문에서 10분 거리에 자리한 이 교회는 지난 2013년 2월부터 9년 넘게 '새벽만나'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통해 평일마다 청년들에게 식사를 대접해왔다.
이날도 오전 7시 식당 문이 열리자마자 학생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 오랜만이네?" 트레이닝 바지에 슬리퍼를 신는 등 편안한 차림새로 급식실을 찾은 젊은이들은 중년의 조리원들과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눈 뒤 숟가락을 들었다.
배식은 8시10분까지 1시간 10분 동안 진행된다. 교회는 이 시간에 하루 평균 70~80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고려대, 경희대, 한국외대, 동덕여대 등 인근 대학교 학생들이 주 배식 대상이지만 젊은 직장인 등의 발걸음도 적지 않다고 한다.
몇 장의 프린트물을 보며 밥을 먹던 고려대 재학생 김모(31)씨는 "일어나기 힘들어도 건강을 생각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온다"며 "어머니가 해주신 집밥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려대생 조원빈(24)씨는 "처음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많이 꺼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것 없이 밝게 인사해주셔서 좋다"고 했다.
대가 없는 베풂은 청년들에게 한 끼라도 제대로 된 밥을 먹이고 싶다는 길성운 대표목사의 바람으로 시작됐다. '새벽만나'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김문진 목사는 "학업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거나 학교 식당에서 반찬 고르기를 망설인다는 이야기 등을 듣고 교회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였다"고 전했다.
식당 일은 과거 분식집 운영 경험이 있는 김희정 권사가 주도한다. 김 권사가 새벽 2~3시에 일어나 재료 손질 등을 해놓고, 이후 출근한 나머지 봉사자 5명이 준비를 돕는다. 급식 전날 교회 내 숙직실에서 잠을 잔다는 김 권사는 "매일 메뉴가 바뀌니까 신경이 쓰여서 잠을 많이 못 잔다"면서도 "학생들이 오면 기뻐서 힘들다는 걸 잊어버린다. 아이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고 웃었다.
밥상 물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교회는 거의 모든 식재료 사용에 있어 국산을 고집한다. 조리사 전원 무보수 봉사로 아낀 인건비 덕에 음식에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권사가 영양소 균형을 맞춰 식단을 짜고 경동시장에서 직접 하나하나 따져보고 공수해온 재료로 밥상이 차려진다.
밥 한 그릇은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어느 명절 연휴, 본가에 가지 못했던 한 학생은 명절 음식이 담긴 도시락을 받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김 목사는 "여러모로 쉽지 않은 시대에 청년들이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곳에서 준비한 마음까지 받아 갔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김 목사는 최근 서울대에서 '부실 학식' 논란이 불거지는 등 물가 인상의 여파가 경제적으로 곤궁한 학생들에게까지 미치는 상황에 대해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학교도 운영 과정에서 어려운 부분이 있겠지만 학생을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대상이 아니라 성장하는 존재로 본다면 좀 더 마음을 쓰는 게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밥을 먹고 힘을 냈던 학생들은 시간이 흐른 후 후원으로 은혜를 갚는다고 한다. 교회를 통해 후배들을 향한 내리사랑이 이어지는 셈이다. 김 목사는 "교인뿐 아니라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이용자분들의 후원 사례도 많아 재정적 어려움 없이 진행됐던 것 같다"고 전했다.
교회 안팎으로 애정을 받는 '새벽만나'는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김 목사는 "좀 더 많은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다"면서, 너무 많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엔 "그런 일이 한번 일어나봤으면 좋겠다. 교회 내 다른 분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