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철수 후 주한미군사고문단 남겨
소련군도 철수 후 대규모 군사고문단 잔류
38선 충돌 격화, 전쟁 경고 무시 비극 불러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30. 전쟁의 전주곡 (마지막회)
1948년 8월과 9월 38선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공식 선포되면서 3년간의 미·소 군정의 시대가 끝났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그은 38선이 ‘분단선’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46년 남과 북에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할 목적으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분단과 남북의 충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48년 유엔에서 사실상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결정되자 김구(金九)는 “38선을 국제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동족상잔을 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러한 우려는 1948년 4월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제처장을 지낸 유진오(兪鎭午)를 비롯해 문학가 이병기·김기림·정지용·염상섭, 학계의 이순택·최호진·신남철 등 당시 지성계를 대표하는 문화인 108인이 발표한 성명에 잘 나타난다.
“(단독선거는) 38선의 실질적 고정화요, 전제로 하는 최악의 거조인지라 국토양단의 법리화요, 민족분열의 구체화인 것도 분명한 일이다. 그리하여 그 후로 오는 사태는 저절로 민족 상호의 혈투가 있을 뿐이니 내쟁(內爭) 같은 국제전쟁이요, 외전(外戰) 같은 동족전쟁이다. 동족의 피로써 물들이는 동포의 상잔만이 아니라 동포의 상식(相食)만이 아니라 실로 어부의 득을 위하여 우리 부자의, 숙질의, 형제의, 자매의 피와 살과 뼈를 바수어 바치는 혈제의 참극일 뿐이니 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남과 북에 각기 분단 정부가 수립되면 “민족상호의 혈투”가 있을 것이고, 그 전쟁은 내전(內戰) 같은 국제전쟁이자, 국제전 같은 내전일 것이란 경고였다. 실제로 분단 정부 수립 후 1949년 1월부터 10월까지 38선에서는 500회 이상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고, 특히 5월에는 최초로 남북의 연대급 병력이 충돌하는 개성 송악산 292전투가 벌어졌다.
1949년의 38선 충돌은 미소 양군의 철군과 맞물려 시작됐다. 남한 주둔 미군은 1948년 9월부터 철수를 시작해 1949년 6월 철수를 완료했다. 북한 주둔 소련군도 1948년 12월 철수했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은 군사고문단을 남겨 국군과 인민군의 훈련을 계속 담당했다. 1949년 6월 27일 작성된 미국 국방부의 비망록에 따르면 소련은 2000명의 고문단을, 미국은 495명의 고문단 요원을 남겼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정식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초대 주한 미국대사로 존 무초(John J. Muccio) 대사가 부임했고, 1948년 12월에는 한미원조협정이 체결됐다. 북한과 소련 사이에도 정식 국교 수립이 이뤄져 초대 북한 주재 소련대사로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수석대표로 활동한 스티코프(Terenty F. Shtykov) 가 부임했고, 1949년 3월에는 ‘조소경제문화교류협정’이 체결됐다.
이어 북한은 1949년 4월 중국 베이징에 조선노동당 대표단을 파견해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조선인 사단을 북한 정부에 전속 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마오쩌둥(모택동)은 “우리 인민해방군에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3개 사단이 있다. 현재 2개 사단은 동북의 선양(瀋陽)과 창춘(長春)에 주둔 중”이라며 “동북에 있는 2개 사단은 요구하는 시점에 맞춰 장비와 함께 조선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인 부대는 7월부터 차례로 북한으로 들어가 최종적으로 10개 연대 규모로 편성됐다. 이에 따라 남북 간의 병력과 화력 면에서 국군이 인민군보다 우위에 있거나 대등한 수준에서 인민군 우세로 역전됐다. 인민군의 군사력 증강이 대규모로 신속하게 이뤄진 것이다.
김구는 남북 충돌을 우려해 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견해였다. 그는 1949년 초 유엔한국위원단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한에 상반된 정권과 군대를 만듦으로써 전쟁의 씨앗을 뿌린 미소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철수하는 것은 “남의 동리(洞里)에 와서 싸움을 붙여놓고 슬쩍 나가버리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해 6월 김구는 현역군인 안두희(安斗熙)에 의해 암살됐다.
김구 암살 직후 김규식(金奎植)은 미국 대사관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문정관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 간의 전쟁을 회피할 길이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전쟁 발발 가능성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1950년 6월 24일 오전 ‘적의 공격이 임박해 보인다’라는 상황 보고도 있었지만 군 수뇌부는 이를 무시했다.
1948년 정부수립 전후부터 당대의 많은 지식인이 전쟁의 위기를 직감하고 있었고, 군 내부에서도 계속해서 경고가 있었지만, 전쟁을 막지 못했다.
밀고 밀리는 3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남과 북은 치유하기 어려운 ‘적대 의식’을 남긴 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로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해방 당시 지리적 경계선이던 38선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정치적 분단선으로 변모되었고, 3년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군사적, 심리적 분단선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고 분단 75년이 지났지만 38선에서 군사분계선으로 바뀐 채 여전히 분단선은 유지되고 있다.
남과 북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선언’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통해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 체제를 종식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해나가기로 합의”했지만, 한반도 평화로 가는 여정에는 여전히 풀어야 할 난제가 산적해 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