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쌓기로 이남서 ‘지하선거’ 실시
김일성, 당·내각·군 수반 차지
계파별 안배로 초대 내각 구성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2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해 38선 이남에서는 이른바 ‘지하선거’라는 또 하나의 선거가 진행됐다. 월북한 남조선노동당 지도부의 지시로 남쪽에 남아 있던 남로당원들 주도로 이뤄진 간접선거였다.
1948년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헌법을 공포하고, 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를 결정했다. 북한은 이미 4월에 헌법 제정을 마친 상태였다. 이 회의에서 김두봉 부위원장이 회의장 정면에 걸린 태극기를 ‘공화국기’와 교체해 걸었다. 한반도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북한은 38선 이남에서 실시된 첫 총선거(5.10 총선거)가 이북지역에서는 실시되지 못한 것을 의식한 듯 이북지역뿐만 아니라 이남 지역에서도 대의원 선출을 시도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수는 인구 5만에 1명 정도로 하고 남북이 각각 인구비례에 의하여 북한이 240명, 남한이 360명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이남에서는 공공연히 직접 총선거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대의원 한 사람에 대하여 선거인 세 사람(‘인민대표’)을 비밀리에 선출해 360명의 3배, 즉 1080명을 선출하고, 이들을 해주에 소집해 360명의 정식 대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를 위해 남조선노동당을 비롯해 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의 정당·사회단체의 당원과 회원들이 각각 자기들이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선거용지(연판장)에 도장이나 지장을 받았다. 미리 지명된 지역별 ‘인민대표’ 명단에 찬성하는 의미로 확인을 받은 것이다.
경찰은 적극적으로 ‘지하선거’ 단속에 나서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 사이에 수천 명의 관계자를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용지에는 감옥에 복역 중인 사람의 날인도 있었고, 어린아이 이름까지도 있었다. 대구형무소에서는 형무소 간수가 수형자들에게 선거용지를 돌려 수백 명의 날인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기도 했다.
남로당 관계자들은 이렇게 수합된 선거용지를 ‘지하선거’의 증거로 해주로 보냈고, 일부는 경찰에 압수됐다. 남로당은 1948년에 ‘단정단선반대투쟁’(‘2.7 구국투쟁’), ‘지하선거’ 등을 주도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조직들이 드러나 사실상 붕괴했다.
이렇게 선출된 이남 지역의 ‘인민대표’들은 월북해 8월 21일~25일 사이에 해주에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최고인민회의에 보낼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북지역 대의원은 8월 5일까지 후보자 등록을 마쳤는데, 일부 선거구에서는 입후보자 조정이 되지 않아 복수 추천됐다.
이후 각 선거구별로 후보자 연설이 진행된 후 8월 25일에 이북 전역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실시됐다. 선거는 우익세력의 방해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각 직장, 마을별로 투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고, 환자를 비롯해 투표장에 나오기 어려운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는 선거선전원들이 투표함을 갖고 개별 방문을 함으로써 투표율을 높였다.
북한은 이 선거에서 유권자의 99.7%가 참가하고 98.4%가 찬성함으로써 212명의 대의원이 선출됐다고 발표했다. 선거 결과 정당별로 보면 북조선노동당이 120명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선거가 종료된 후 정부 수립 선포까지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북한은 9월 2일~10일간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를 개최하고, 9월 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실시를 결정했다.
다음 날에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 명단이 발표됐다. 초대 내각은 남쪽과 북쪽 출신이 반반으로 구성됐지만, 남로당 출신은 1/4 정도의 지분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이로써 김일성 수상은 당·정·군의 최고지위를 모두 차지했다. 회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에는 정부 정강 발표와 미·소 양군 철퇴 요청서 채택이 이뤄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각 지역에서 경축대회가 열렸던 것처럼 평양을 비롯한 각 도·시·군에서도 ‘인공수립경축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남과 북에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패전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편의적으로 그어진 38선이 정치적 분단선이 돼 버린 것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