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5주년] ⑳연안파 입국 후 신민당 창당 독자 세력화

기사등록 2020/05/17 06:00:00

평양과 서울에 각각 신민당 창당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해 북로당으로 개편

북로당과 인민군의 한 축을 형성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20. 연안파와 소련파 사람들

해방 직전 중국 옌안(延安)에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8년 김원봉(金元鳳) 주도로 조직된 조선의용대가 충칭(中京) 임시정부와 합작을 선언하자 여기서 이탈해 옌안에서 독자적인 정치, 군사조직을 만든 것이다.

해방되자 이들은 9월 초 근거지인 옌안 나가평(羅家坪)을 출발해 11월에 선양(瀋陽)에 도착했다. 조선의용군 무정(武丁) 사령관은 이곳에서 모든 지휘관과 대원을 모아놓고 대회를 열어 조선의용군을 3개 지대로 개편하고 만주 지역의 조선인을 규합해 부대를 확장하기로 했다.

당시 중국국민당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이 조선인부대들의 평양 귀환보다는 중국에 남아 활동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서울=뉴시스] 1945년 9월 초 옌안(延安) 나가평(羅家坪)을 출발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는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대원과 가족들. 앞줄 왼쪽에서 10번째가 최창익(崔昌益)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12번째 아이를 안고 있는 인물이 음악가 정율성(鄭律成)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9월 초 옌안(延安) 나가평(羅家坪)을 출발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는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대원과 가족들. 앞줄 왼쪽에서 10번째가 최창익(崔昌益)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12번째 아이를 안고 있는 인물이 음악가 정율성(鄭律成)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이에 따라 대다수 조선의용군의 부대원들이 만주 지역에 남아 활동하기로 하고,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일부 간부들만 그해 12월 13일 증기기관차를 타고 평양역에 도착했다. 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金枓奉) 주석, 최창익(崔昌益)·한빈(韓斌) 부주석, 무정 사령관, 허정숙(許貞淑)·김창만(金昌滿)·박효삼(朴孝三) 중앙위원과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김명시(金明時) 등이 이때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서울=뉴시스] 무정 조선의용군 사령관 등과 상의 없이 1945년 10월 신의주에 들어온 조선의용군의 한 부대가 ‘조선의용군 선견종대(先遣縱隊) 정치부’ 명의로 뿌린 전단. “의용군은 조선 민족의 자제병(子弟兵)”, 일본제국주의 잔재를 철저히 소멸하자” 등의 주장을 담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무정 조선의용군 사령관 등과 상의 없이 1945년 10월 신의주에 들어온 조선의용군의 한 부대가 ‘조선의용군 선견종대(先遣縱隊) 정치부’ 명의로 뿌린 전단. “의용군은 조선 민족의 자제병(子弟兵)”, 일본제국주의 잔재를 철저히 소멸하자” 등의 주장을 담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그러나 통상 ‘연안파’로 불린 이들의 평양 도착 후 행보는 엇갈렸다. 무정, 허정숙, 김창만 등은 북조선공산당에 바로 입당했고, 김두봉·최창익· 한빈 등은 조선독립동맹의 핵심인사들은 조선신민당을 창당해 독자 노선을 걸었다. 과거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서울파’로 분류되는 최창익, 한빈 등과 달리 ‘화요파’ 계열인 김명시는 ‘화요파’의 중심인물인 오빠 김형선(金炯善), 박헌영(朴憲永), 홍남표(洪南杓) 등이 활동하던 서울로 내려와 조선부녀총동맹에 참가했다.

[서울=뉴시스] 1945년 12월 중순 평양에 들어온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간부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효삼(朴孝三) 조선독립동맹 중앙위원, 한빈(韓斌) 부주석, 최창익(崔昌益) 부주석, 김두봉(金枓奉) 주석, 무정(武丁) 조선의용군 사령관. 2열 오른쪽에서 3번째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김명시(金明時)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2월 중순 평양에 들어온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간부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효삼(朴孝三) 조선독립동맹 중앙위원, 한빈(韓斌) 부주석, 최창익(崔昌益) 부주석, 김두봉(金枓奉) 주석, 무정(武丁) 조선의용군 사령관. 2열 오른쪽에서 3번째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김명시(金明時)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조선독립동맹을 모체로 1946년 2월 평양에서 조선신민당을 창당한 김두봉, 최창익 등은 이후 서울에도 경제학자 백남운(白南雲)을 영입해 남조선신민당을 조직했다. 평양의 조선신민당은 주석 김두봉, 부주석 최창익·한빈, 조직부장 이유민(李維民), 선전부장 김민산(金民山)이었고, 서울의 남조선신민당은 위원장 백남운, 부위원장 정노식(鄭魯湜), 조직부장 심운(沈雲), 선전부장 고찬보(高贊輔)였다.

신민당은 당 강령 및 정책의 기조에서 친일파·반민주주의자를 제외하고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해 조선민주공화국을 수립하여 일제와 친일파로부터 몰수한 대기업을 국영화하고 소작제를 폐지하는 등 민족경제를 재편성하려고 하였다.

이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를 당시의 북한 현실에 원용한 것으로 노동자·농민보다는 소시민·지식층·중산층에 당의 기반을 두었다. 신민당 주석 김두봉은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하자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조선신민당은 독자적 활동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북조선공산당의 대중 정당화 방침에 호응하여 1946년 8월 말 공산당과의 합동대회를 통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새로 출발하게 된다.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모습.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 형식으로 열린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는 8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여했고, 당 위원장에는 조선독립동맹 주석 출신의 김두봉(金枓奉)이 선출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모습.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 형식으로 열린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는 8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여했고, 당 위원장에는 조선독립동맹 주석 출신의 김두봉(金枓奉)이 선출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 함경남도 신흥군당 주요 당원들이 확대집행위원회를 열고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 결정에 대한 보고와 북조선노동당 강령, 규약 초안에 대해 토의를 하고 있다. 신흥군은 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는 신민당 지부의 목소리가 강했던 지역 중 하나다. 1946년 7월 29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확대연합회의에서 합당을 공식 결정한 후 8월 초부터 면~군~도당의 순서로 각 지열별로 지방당 회의가 개최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 함경남도 신흥군당 주요 당원들이 확대집행위원회를 열고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 결정에 대한 보고와 북조선노동당 강령, 규약 초안에 대해 토의를 하고 있다. 신흥군은 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는 신민당 지부의 목소리가 강했던 지역 중 하나다. 1946년 7월 29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확대연합회의에서 합당을 공식 결정한 후 8월 초부터 면~군~도당의 순서로 각 지열별로 지방당 회의가 개최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소련 민정사령부의 이그나치예프 정치국장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7월 29일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신민당 중앙위원회의 확대연합회의가 71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고, “모든 근로 인민들이 통합하기 위해서는 공산당과 신민당 양당이 모든 근로 인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하나의 노동당으로 합당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해 제출된 강령안과 규약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고 한다. 이날 두 당의 연합회의 이후 각 지방당 별로 회의가 소집됐고, 8월 28일부터 사흘간 평양에서 북로당 창립대회가 열렸다.

북한의 공식 기록에는 합당 당시 공산당이 약 27만 6000명, 신민당이 약 9만 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실제는 공식 기록의 1/5 수준이었다는 기록도 있음). 북로당의 위원장 자리는 연안파의 김두봉에게 돌아갔고, 당 중앙위원 43명 중 연안파가 18명으로 단일 계파로서는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했다. 5명으로 구성된 정치위원회에도 김두봉, 최창익이 선출됐고, 13명으로 구성된 중앙상무위원회에도 연안파는 8명이 선출됐다.

당시 ‘빨치산파’는 김일성(金日成), 김책(金策) 등 4명만이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김일성계는 당 중앙위원 중 소련파 8명, 국내파 11명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또한 연안파 중에서도 허정숙과 김창만 등은 일찌감치 김일성 지지로 변신했다.

중앙위원 구성을 보면 빨치산파, 연안파, 소련파 등 해외에서 들어온 인사들이 30명으로 국내파보다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따라서 북로당이 창립된 지 2달 뒤에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하게 되는 박헌영 등 국내파들이 북에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구조였다.

북로당 창립대회에 참석한 801명을 연령대로 보면 40세 이하가 646명(약 80%)으로 20~30대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울=뉴시스]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직후 내각 청사 앞에서 소련군 민정사령부의 주요 간부와 북조선노동당의 주요 계파를 대표하는 당 중앙위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허가이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김일성(金日成) 내각 수상, 레베데프 소련군 민정사령관, 김두봉(金枓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소련 민정부의 이그나치예프 대좌, 김책(金策) 부수상 겸 산업상. 뒷줄 왼쪽부터 주녕하(朱寧河) 교통상, 박일우(朴一禹) 내무상, 최창익(崔昌益) 재정상. 이들 중 김두봉, 최창익, 박일우가 연안파로 분류된다. 이 사진은 일반적으로 1946년 8월 말 북로당 창립 직후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뒤의 건물과 복장 등으로 볼 때 1948년 9월에 촬영된 것이 틀림없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직후 내각 청사 앞에서 소련군 민정사령부의 주요 간부와 북조선노동당의 주요 계파를 대표하는 당 중앙위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허가이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김일성(金日成) 내각 수상, 레베데프 소련군 민정사령관, 김두봉(金枓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소련 민정부의 이그나치예프 대좌, 김책(金策) 부수상 겸 산업상. 뒷줄 왼쪽부터 주녕하(朱寧河) 교통상, 박일우(朴一禹) 내무상, 최창익(崔昌益) 재정상. 이들 중 김두봉, 최창익, 박일우가 연안파로 분류된다. 이 사진은 일반적으로 1946년 8월 말 북로당 창립 직후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뒤의 건물과 복장 등으로 볼 때 1948년 9월에 촬영된 것이 틀림없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이렇듯 연안파는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까지 북조선노동당과 인민군 내에서 확고하게 한 축을 형성했다. 특히 연안파는 과거 ‘화요파’와 경쟁 관계에 있던 ‘서울파’ 인사들이 중심을 이뤄 박헌영 중심의 남로당 계열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1953년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계 인사들이 숙청될 때 앞장서 이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연안파는 1956년 김일성 중심의 지도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해 북한 역사에서 사라졌다. 현재 북한의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는 연안파 중에서 무정, 허정숙, 고찬보, 김월송(金月松, 본명 김형식) 등만이 묻혀 있다.

[서울=뉴시스] 북한의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는 연안파 계열 인사들. 무정(武丁) 전 조선의용군 사령관, 허정숙 전 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 김월송(金月松) 전 조선독립동맹 북만공작위원.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의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는 연안파 계열 인사들. 무정(武丁) 전 조선의용군 사령관, 허정숙 전 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 김월송(金月松) 전 조선독립동맹 북만공작위원.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한편, 북로당이 창당될 때 주요 간부로 부상한 정치 세력이 이른바 ‘소련파’이다. 이들은 소련 국적의 한인 2세(고려인)로,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할 때 함께 들어오거나 1945년 10월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파견됐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대일 전투에 앞서 첩보 공작을 하다 해방을 맞은 박창옥(朴昌玉), 한일무(韓一武), 10월 중순경 평양에 도착한 박영빈(朴永彬), 박길용(朴吉龍), 12월 초에 평양에 도착한 허가이, 박의완, 방학세(方學世)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특히 평양주재 소련군 사령부가 소련 정부에 공산당 조직과 정치·행정에 경험이 있는 한인을 요청해 12월 초에 평양에 도착한 20여 명의 당과 행정 관료들이 1950년대까지 북한 당과 내각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서울=뉴시스] 1948년 평양학원의 주요 간부들과 자리를 함께한 소련파의 박영빈(朴永彬). 평양학원은 1946년 2월에 설립된 북한 최초의 군사정치학교로 그는 정치반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 평양에 파견된 박영빈은 1953년 소련파의 중심 허가이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겸 조직부장이 자살하자 당 조직부장으로 임명돼 활동하다 타슈켄트로 돌아갔다. 앞줄 왼쪽 첫번째 최용건(崔庸健) 북조선인민위원회 보안국장, 두번째 박정애(朴正愛) 북조선노동당 부녀부장, 네번째가 박영빈.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현재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활동하는 최룡해의 부친인 최현(崔賢)으로 추정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평양학원의 주요 간부들과 자리를 함께한 소련파의 박영빈(朴永彬). 평양학원은 1946년 2월에 설립된 북한 최초의 군사정치학교로 그는 정치반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 평양에 파견된 박영빈은 1953년 소련파의 중심 허가이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겸 조직부장이 자살하자 당 조직부장으로 임명돼 활동하다 타슈켄트로 돌아갔다. 앞줄 왼쪽 첫번째 최용건(崔庸健) 북조선인민위원회 보안국장, 두번째 박정애(朴正愛) 북조선노동당 부녀부장, 네번째가 박영빈.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현재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활동하는 최룡해의 부친인 최현(崔賢)으로 추정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북한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는 소련파 계열 인사들. 방학세(方學世), 남일(南日), 김봉률(金奉律).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북한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는 소련파 계열 인사들. 방학세(方學世), 남일(南日), 김봉률(金奉律).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1946년 8월 북로당이 창당될 때 소련파는 8명이 중앙위원에 진출했고, 1948년에 열린 제2차 당대회에서는 총 67명의 중앙위원 중 14명이 선출됐다. 소련파들은 평양 주둔 소련군을 배경으로 북한 정권 수립에 중요 역할을 수행했지만 1953년 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허가이가 자살하고, 전쟁 이후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연안파들이 부상하면서 세력이 약화했다.

특히 1956년 8월 박창옥, 박의완 등 연안파 주도의 반김일성 움직임에 동조한 것이 문제가 돼 소련파들은 대부분 소련으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남일(후에 정무원 부총리), 김봉률(후에 인민군 대장), 방학세(후에 최고재판소 소장) 등 일부만 고위직에서 계속 활동했다.

[서울=뉴시스]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949년 평양에서 열린 박헌영 남로당 위원장과 윤레나의 결혼식(재혼)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스티코프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 김일성 내각 수상, 박헌영 부수상, 김두봉.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5.17.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949년 평양에서 열린 박헌영 남로당 위원장과 윤레나의 결혼식(재혼)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스티코프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 김일성 내각 수상, 박헌영 부수상, 김두봉.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5.17. [email protected]

1946년 8월 북로당이 창당될 때 연안파와 소련파는 북한의 핵심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고,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까지만 해도 당·정·군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의 정파를 형성할 정도로 구심점이 뚜렷하지 못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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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⑳연안파 입국 후 신민당 창당 독자 세력화

기사등록 2020/05/17 06:00:00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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