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배달로 2남3녀 키운 文대통령 모친…"돈이 최고 아니다"

기사등록 2019/10/29 19:30:01

강한옥 여사, 29일 오후 향년 92세의 일기로 별세

【서울=뉴시스】 청와대는 4일 페이스북 페이지에 지난 여름 청와대에 찾은 문재인 대통령 어머니와 청와대 본관을 소개시켜주는 문 대통령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2017.10.04. (사진=청와대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청와대는 4일 페이스북 페이지에 지난 여름 청와대에 찾은 문재인 대통령 어머니와 청와대 본관을 소개시켜주는 문 대통령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2017.10.04. (사진=청와대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홍지은 기자 = "가난하지만 기본은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이 제게는 나침반이 됐다."

모친 강한옥 여사의 가르침은 문재인 대통령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끌던 연탄 리어카 뒤에서 고사리손으로 힘을 보탰던 문 대통령은 뼈저리게 가난했던 당시의 경험을 잊을 수 없었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29일 오후, 향년 92세의 일기로 별세한 모친 강 여사는 북한 함경남도 흥남에서 6남매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문 대통령 부친이자 남편 고(故) 문용형(1978년 작고)씨를 만나 결혼한 후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당시 월남했다.

함경남도 흥남 솔안마을 출신인 아버지는 친척들과 함께 피난했지만, 어머니 쪽에서는 아무도 내려오지 못했다. 흥남 성천강(城川江)을 가로지를 수 있는 만세교와 군자교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막았기 때문이다. 모친의 동네는 성천강 바로 건너였다. 그렇게 어머니는 외로운 실향민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 남쪽에 발을 디딘 곳은 경남 거제 장승포항이었다. 새하얀 눈만 볼 수 있었던 고향 흥남과 달리 상록수림과 푸른 보리밭이 펼쳐진 남쪽의 풍경에 모친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으로 수학여행을 가본 것 빼고는 남쪽으로 온 적이 없었던 모친에게 거제의 푸르름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기는 정말 따뜻한 남쪽 나라구나" 라는 것이 거제에 대한 모친의 첫인상이었다고 문 대통령은 회고했다.

문 대통령 부모는 빈털터리 상태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부친은 포로수용소에서 노무 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공무원으로 흥남시청에서 농업계장·과장을 지냈던 과거 경력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1953년 1월 거제 허름한 시골집 한 칸방에서 세들어 살던 당시 문 대통령이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턱없이 부족했던 수입 탓에 모친은 문 대통령을 등에 업고 계란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피난살이가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세상천지에 기댈 데가 없어서 도망가지 못했노라"고 모친은 농담처럼 말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당시를 "뿌리 잃은 고단한 삶이었다"고 회고했다.
 
문 대통령이 초등학교 입학 전 부모님은 부산 영도로 이사해 장사를 시작했다. 부산 영도는 모친이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그러나 부친의 장사 실패로 문 대통령 가족은 빚더미에 시달려야만 했고, 가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유일하게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모친은 좌판 장사, 작은 구멍가게 운영, 연탄 배달 등 막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좁고 가파른 신선동 언덕길을 오르다 실수로 리어카가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질 때도 자신의 안전보다 깨진 연탄을 더 안타까워했던 게 어머니였다.

생활고 때문에 이른 새벽 암표 장사를 해보려고 어린 문 대통령을 데리고 부산역에 나왔지만 아들 앞에서 끝내 불법을 저지르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까지 있었다.

가난했지만 모친은 자식들의 교육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문 대통령은 "부모님은 교육열이 특별히 높은 분들이었다"며 "어떻게든 월사금을 마련하셨다"고 했다. 또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내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며 "그냥 믿고 맡겨주셨다"고 회고했다.

개인 과외를 받을 형편이 안됐던 문 대통령은 집에서 주로 혼자 공부했다. 모친은 옆에서 문 대통령이 잠들 때까지 밤늦도록 앉아있었다고 한다. 어려운 사법고시의 관문을 넘어 인권변호사로까지 발을 디딜 수 있게 한 큰 힘에는 모친이 있었다.

학생운동으로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되는 호송차에 오르던 아들을 향해 "재인아! 재인아" 간절하게 외치며 뛰어오던 어머니의 아른거리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대통령은 말한다. 끝까지 자식들만 바라보고 한평생을 바쳐온 어머니의 삶이었다.

그렇게 모친은 타지에서의 한 평생을 외로움과 가난 속에서 살았다. 그런 와중에 2004년 참여정부 시절 북에 있던 어머니의 여동생(문 대통령에겐 이모)의 신청으로 이산가족에 선정된다. 당시 문 대통령은 시민사회수석으로 재임 중이었다.

제1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장의 금강산 온정각에서 푸른색 한복을 입은 이모 강병옥(당시 55세)씨를 만난 모친의 얼굴엔 오랜 세월의 그리움이 사무쳤다.

이후에도 방송에서 이산가족 상봉 영상이 나올 때면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혹시 고향에서 아는 사람이 있을까 했던 마음에서였다. 문 대통령은 "아마 평생 어머니께 제일 효도했던 게 이때 어머니를 모시고 갔던 거 아닌가 싶다"고 토로했다.

문 대통령은 "만져보면 아주 거친 손이지만 또 늘 따뜻했던 손으로 기억한다. 우리 어머니는 가족 생계를 오랜 세월 동안 책임지셨다"며 "여기 이 땅, 우리네 많은 어머니들처럼 그 긴 세월 수없이 많은 눈물과 한숨을 삼키셨다"고 어머니를 마음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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