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얘기, 엄우흠 '마리의 돼지의 낙타'

기사등록 2019/04/18 06:02:00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엄마가 배 속의 아기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걸 태교라고 해. 돼지가 배 속의 새끼에게 한 말도 태교라고 할 수 있지. 돼지가 마침내 임신을 한 지 열두 달 만에 새끼를 낳았어. 원래는 네 달이면 낳거든. 그리고 보통은 한 번에 열 마리 정도는 낳는데 이번에는 딱 한 마리만 낳았어. 우리 식구는 그게 기나긴 가뭄 탓이라고 생각했지. 조금 있으니까 새끼가 몸이 채 마르기도 전에 비틀거리며 일어섰어. 그런데 그 모습이 아무래도 돼지 같지가 않은 거야.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눈망울도 아주 큰 게 새끼 돼지가 아니라 무슨 송아지처럼 보였어."

엄우흠(51)의 장편소설 '마리의 돼지의 낙타'가 나왔다. 2011년 겨울부터 1년 동안 계간 '문예중앙'에서 '올드 타운'이라는 제목으로 전반부가 연재된 작품이다.

'감색 운동화 한 켤레'(1991), '푸른 광장에서 놀다'(1999) 등 전작들과 결이 다르다. 관념과 독백보다는 캐릭터의 활력이 두드러진다. 다양한 인간 군상의 흥미로운 관계를 독특한 입담으로 풀어냈다. 무동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욕망과 유희를 짚었다.

소설의 배경인 무동은 위성도시의 변두리에 자리한 근교농업 지구다. 재개발 철거민과 실직자를 비롯해 도시에서 밀려난 주변부 인생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정착해 살아가는 곳이다. 예기치 않은 우연과 인연이 맞물리며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곡절과 사연이 펼쳐진다.

자영업 실패 후 사채 빚에 몰려 무동으로 흘러든 경수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나간다. 무동 최초의 주민인 '로큰롤 고', 로큰롤 고와 결혼해 아들을 열둘 낳는 '토마토 문', 흑심을 품은 마을 남자들 때문에 사건에 휘말리는 '마리', 로큰롤 고의 밴드에 합류해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민구' 등의 사연도 실렸다.

이들의 인연은 과거에 숨어 있다가 돌연 얼굴을 드러낸다. 또 몰래 숨어 작동하며 현재를 움직인다. 유머러스한 필치로 삶의 아이러니, 다분히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냈다.

"경수 엄마는 의사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동에 당분간 더 머무르는 대신에 감자탕집은 단호하게 그만두고 24시 김밥집에서 일했다. 월급이 조금 줄기는 했지만 남편도 언젠가 다시 일을 할 것이다. 게다가 큰 빚 부담이 사라졌다. 경수 엄마는 앞으로는 조심씩 나아지기만 하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아주 가끔씩 가위에 눌리다 깬 새벽이면 그녀는 스스로가 만든 서늘한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뜻밖의 이익을 보았다면 언젠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라."

"그는 하나의 장애물을 만났을 때에는 그럭저럭 무사히 넘어가는 편이지만 두 개의 장애물을 동시에 맞닥뜨렸을 때에는 갈팡질팡하다가 자포자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날이 바로 그랬다. 음식에 대한 혹평과 말실수라는 두 개의 장애물 앞에서 그는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하지만 특유의 낙관적인 기질이 그를 하루 만에 일으켜 세웠다." 576쪽, 1만4800원,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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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얘기, 엄우흠 '마리의 돼지의 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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