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협상에서 문제가 된 국경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간 국경이다. 그러나 예비협상 막판에 등장한 이 국경 현안이 협상 자체를 뒤흔들 정도로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국경' 때문이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속해 있고 아일랜드는 EU 회원국이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면 지금까지 있는 듯 마는 듯 했던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NI) 간 국경의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다. 물리적인 철조망은 세워지지 않더라도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데 지금과는 다른 규정과 규율이 적용되어야 한다. 무형이라도 국경선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 국경선을 아주 단단하게(하드) 세울 것이냐, 아니면 지금과 비슷하게 연하게(소프트) 세울 것이냐를 두고 양측이 대립했다. 여기서 양측은, 영국과 EU가 아니다. 아일랜드 섬의 원주인인 아일랜드 공화국과 아일랜드 북쪽을 차지하고 있지만 영국령인 북아일랜드가 그 양측이다.
아일랜드는 소프트 국경선을 원한다. 북아일랜드는 하드 국경을 세웠으면 한다. EU은 회원국인 아일랜드 입장을 그대로 받아 소프트를 요구한다. 그러면 브렉시트 협상의 맞은 편 주체인 테리사 메이 영국 보수당 정부는 북아일랜드 입장을 100퍼센트 옹호해서 하드 편인가. 그렇지 못하는 데서 국경 문제가 발생했다.
메이 총리는 월요일인 지난 4일 브뤼셀에서 장 클로드 융커 집행위원장과 화기애애하게 점심을 먹고 있다가 NI 지방정부를 좌지우지하는 아린 포스터 민주통합당(DUP) 당수의 전화를 받고서 합의안을 무르고 급거 귀국해야 했다. 하원 318석으로 과반에 7석 부족한 메이 총리는 DUP의 10석에 기대 정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포용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포스터 당수가 '신뢰와 결정적 순간 표 지원' 약정를 거둬들이면, 토리(보수당)는 노동당의 순수 좌파 제러미 코빈 당수에게 총리직을 넘겨야할 수도 있다.
포스터 당수가 문제 삼은 EU 융커 위원장과 메이 총리 간의 합의서의 구절은 "규정 제휴(regulatory alignment)'다. 아일랜드와 NI 간 국경을 이 정신에 바탕해 세운다는 것이다. 제휴의 객체는 물론 브렉시트 후 영국 대표가 참가하지 않는 가운데서 성립된 EU의 각종 규정이다.
8일 금요일 아침 일찍 메이 총리는 브뤼셀로 건너가 국경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EU의 두 대통령과 환한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이 나흘 사이에 과연 포스터 당수와 아일랜드 공화국의 레오 바라드카르 수상과 메이 총리의 3자는 국경 문제를 타결한 것일까.
세계 주요 뉴스 매체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며 고개를 갸웃뚱거렸다. 바라드카르 수상과 메이 총리는 "하드 국경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것에 대응될 수 있는 포스터 당수의 발언은 "NI의 헌법적, 경제적 UK(영국) 통합을 확보했다"는 정도다. 하드 국경이라는 말이 없는데, 이를 포기한 것일까.
그러나 UK와 통합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포스터의 민주통합당은 개신교도들로 영국 본토와의 통합을 절대적 원칙으로 삼고 있다. UK와의 통합이 위협 받는다면 아일랜드 공화국 통합파인 정적 신페인과 1998년 화해조약 이전처럼 다시 싸울 자세가 되어 있다.통합 때문에 북아일랜드에서 유혈 충돌로 30년 동안 4000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포스터 당수가 두려워하는 것은 EU 전체를 업고 소프트 국경을 통해 서서히 북아일랜드를 통합하려는 카톨릭 국가 아일랜드 공화국이 아니다.
포스터 당수와 DUP가 두려워하는 것은, 영국 본토 정부가 브렉시트 협상 타결을 위해 NI와의 통합을 기꺼이 약화시키지 않을까하는 점이다. 잉글랜드는 물론 스코틀랜드, 웨일스 지방과는 달리 아일랜드 섬에 홀로 있는 북아일랜드에만 EU의 규정이 브렉시트 후 '제휴' 수준으로 적용되다보면 , 결국 NI는 반(半)영국, 비(非)UK로 나가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냐는 두려움인 것이다.
메이 총리는 하드 국경은 없다는 말에 이어 북아일랜드와 나머지 UK 영토 사이에는 지금 없는 "새로운 규정의 장벽이 결코 세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NI와 DUP를 보고 한 말이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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