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② 김구, 트루먼에 美정보총책 통해 비밀서한 “한국 독립 보장 요청"

기사등록 2015/08/13 13:28:17

최종수정 2016/12/28 15:27:13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백범 김구가 해방 무렵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백악관의 대응을 소상히 알려주는 극비문서 전문과 관련 문서들이 12일 확인됐다. 뉴시스가 입수한 문서들은 1970년대 비밀 해제된 것으로 김구 주석의 편지를 직접 전달한 윌리엄스 도노번 장군(OSS 총책임자)의 메모랜덤과 트루먼 대통령의 조치 등을 담고 있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방 사흘 뒤인 1945년 8월18일 협조를 당부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트루먼은 참모진과 숙의 끝에 임정이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8월25일 답장을 하지 않기로 공식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도노반 장군이 김구 서한을 전달하며 OSS 양식으로 백악관 비서실에 보낸 문서. 2015.08.12.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robin@newsis.com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백범 김구가 해방 무렵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백악관의 대응을 소상히 알려주는 극비문서 전문과 관련 문서들이 12일 확인됐다. 뉴시스가 입수한 문서들은 1970년대 비밀 해제된 것으로 김구 주석의 편지를 직접 전달한 윌리엄스 도노번 장군(OSS 총책임자)의 메모랜덤과 트루먼 대통령의 조치 등을 담고 있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방 사흘 뒤인 1945년 8월18일 협조를 당부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트루먼은 참모진과 숙의 끝에 임정이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8월25일 답장을 하지 않기로 공식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도노반 장군이 김구 서한을 전달하며 OSS 양식으로 백악관 비서실에 보낸 문서. 2015.08.12.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email protected]
도노반 장군 김구 밀사역 맡아…"임시정부 불용" 트루먼 무시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백범 김구가 해방 무렵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백악관의 대응을 소상히 알려주는 극비 전문 등 관련 문서들이 70년만에 확인됐다.

 뉴시스가 12일 확인한 문서들은 1970년대 비밀 해제된 것으로 김구 주석이 한국의 독립 보장을 요청하는 서한을 직접 전달한 윌리엄스 도노반 장군의 문서와 트루먼 대통령의 조치 등을 담고 있다. 도노반 장군은 당시 미 정보기관 CIA의 원형인 OSS의 총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구 주석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낸 것은 광복 사흘 뒤인 1945년 8월18일이다.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광복군은 그해 5월부터 한반도에 특수대원들을 잠입시키기 위해 OSS의 지원 아래 중국에서 미국과 합동훈련을 벌이고 있었다. 대원들이 국내에서 지하공작을 전개하다가, 광복군과 미군이 상륙할 때 항일세력을 총궐기시켜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작전이었다.

 김구 주석은 8월7일 광복군 OSS 대원들이 훈련하는 중국 시안(西安)에서 도노반 장군을 만나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는 협정을 맺고 모국에 개선하는 부푼 희망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이 단행되면서 일본이 너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계획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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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백범 김구가 해방 무렵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백악관의 대응을 소상히 알려주는 극비문서 전문과 관련 문서들이 12일 확인됐다. 뉴시스가 입수한 문서들은 1970년대 비밀 해제된 것으로 김구 주석의 편지를 직접 전달한 윌리엄스 도노번 장군(OSS 총책임자)의 메모랜덤과 트루먼 대통령의 조치 등을 담고 있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방 사흘 뒤인 1945년 8월18일 협조를 당부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트루먼은 참모진과 숙의 끝에 임정이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8월25일 답장을 하지 않기로 공식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도노반 장군. 2015.08.12. <사진=www.en.wikipeia.org>  [email protected]
 김구 주석은 차선책을 강구했다. 도노반 장군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국이 독립국이 될 수 있도록 협조를 당부하는 서한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존재감을 트루먼이 인식한다면 해방 전부터 제기된 신탁통치안을 잠재울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김구 주석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한 서한의 구체적인 내용과 백악관의 조치는 그간 베일에 가려 있었다. 도노반 장군은 김구 주석의 서한을 '대통령을 위한 메모랜덤'이라는 보고서로 백악관에 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구 주석은 이 서한에서 “일본의 항복과 전쟁의 종식을 맞아 미국 국민들과 함께 한국 국민들도 오늘의 승리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의 적은 격퇴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50년 간 끈질기게 항거해온 일본의 압제로부터 자유가 쟁취되었습니다…한국 국민들은 우리의 적을 무찌른 미 합중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진정어린 감사를 표합니다"라고 사의를 표했다.

 이어 "자유와 평화를 얻은 한국 국민들은 독립된 국가와 핵심적인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중대한 일을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귀하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으로 확신하며, 한국의 독립이 극동의 평화를 위한 열쇠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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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백범 김구가 해방 무렵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백악관의 대응을 소상히 알려주는 극비문서 전문과 관련 문서들이 12일 확인됐다. 뉴시스가 입수한 문서들은 1970년대 비밀 해제된 것으로 김구 주석의 편지를 직접 전달한 윌리엄스 도노번 장군(OSS 총책임자)의 메모랜덤과 트루먼 대통령의 조치 등을 담고 있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방 사흘 뒤인 1945년 8월18일 협조를 당부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트루먼은 참모진과 숙의 끝에 임정이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8월25일 답장을 하지 않기로 공식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트루먼이 도노반에게 보내는 결정 서한. 2015.08.12.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email protected]
 김구 주석은 "우리는 미 합중국 정부와 국민들의 이해와 협조를 진심으로 바라며 지난 몇 달 간 중국에서 진행된 양국 간의 적극적인 협조가 증진되기를 기대합니다. 미 합중국이 모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희생을 통해 얻은 민주 세계의 평화를 영원히 보장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거듭 신뢰감을 피력했다.

 김구 주석은 "삼천만 한국 국민들을 대표하여 귀국 정부와 국민들의 공감과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마음과 행동을 다해 귀국 정부와 국민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영구한 평화를 유지하는데 힘쓸 것입니다. 대통령 각하에게 따뜻한 개인적인 인사를 전합니다"라고 마무리 지었다.

 김구 주석은 미 합중국 대통령에게 마음 절절한 편지를 전달했지만 트루먼의 반응은 냉담했다. 편지를 받고 일주일이 지난 8월25일 답장을 하지 않기로 공식 결정한 것이다.

 트루먼이 한국의 잠재력을 알지 못하고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의례적인 답신조차 보내지 않은 것은 공식 반응이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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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백범 김구가 해방 무렵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백악관의 대응을 소상히 알려주는 극비문서 전문과 관련 문서들이 12일 확인됐다. 뉴시스가 입수한 문서들은 1970년대 비밀 해제된 것으로 김구 주석의 편지를 직접 전달한 윌리엄스 도노번 장군(OSS 총책임자)의 메모랜덤과 트루먼 대통령의 조치 등을 담고 있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방 사흘 뒤인 1945년 8월18일 협조를 당부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트루먼은 참모진과 숙의 끝에 임정이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8월25일 답장을 하지 않기로 공식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국무부가 작성한 대통령 메모랜덤. 2015.08.12.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email protected]
 당시만 해도 트루먼은 요동치는 전후 세계 질서를 이끌어나갈 지도자의 소양을 쌓지 못한 상황이었다. 미 대통령 사상 최초로 4선 당선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정치적 선택으로 운좋게 부통령이 된 그는 취임 88일만인 4월 루즈벨트의 급서로 일약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원자탄 개발계획 '맨해튼 프로젝트'를 대통령이 되고서야 보고받을 정도로 존재감이 약했다. 대통령직을 물려받고 7월 포츠담 회담에 전임 루즈벨트의 참모를 대동한 가운데 그들의 조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김구 주석의 서한에 대한 결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1945년 8월22일자 '대통령 보고용 메모랜덤'이라는 간략한 4개 문장의 국무부 문서는 사실상 참모진이 대통령의 의중을 대신했음을 시사한다.

 - 도노반 소장이 전달한 한국 임시정부 주석(Chairman)으로 서명한 김구의 메시지와 관련해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국무부(Mr. Bohlen)에 몇가지 질문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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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백범 김구가 해방 무렵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백악관의 대응을 소상히 알려주는 극비문서 전문과 관련 문서들이 12일 확인됐다. 뉴시스가 입수한 문서들은 1970년대 비밀 해제된 것으로 김구 주석의 편지를 직접 전달한 윌리엄스 도노번 장군(OSS 총책임자)의 메모랜덤과 트루먼 대통령의 조치 등을 담고 있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방 사흘 뒤인 1945년 8월18일 협조를 당부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트루먼은 참모진과 숙의 끝에 임정이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8월25일 답장을 하지 않기로 공식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한국의 독립 보장을 요청하는 김구의 서한을 도노반 장군이 소개한 문서. 2015.08.12.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email protected]
 - 도노반 장군은 김구가 한국 내에서 활동할 공작원 양성과 관련, 함께 일을 했으며 그가 한국 임시정부 주석이라고 밝힘.

 - 김구의 메시지에 대통령이 답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임.

 - 국무부는 도노반 장군이 자신의 요원들로 하여금 미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정부를 자처하는 임원의 메시지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내용의 회신 초안을 준비함.

 트루먼은 메모랜덤 하단엔 '오케이(OK)'라고 쓰고 서명했다. 이어 8월25일 짧은 회신을 도노번 장군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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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백범 김구가 해방 무렵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백악관의 대응을 소상히 알려주는 극비문서 전문과 관련 문서들이 12일 확인됐다. 뉴시스가 입수한 문서들은 1970년대 비밀 해제된 것으로 김구 주석의 편지를 직접 전달한 윌리엄스 도노번 장군(OSS 총책임자)의 메모랜덤과 트루먼 대통령의 조치 등을 담고 있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방 사흘 뒤인 1945년 8월18일 협조를 당부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트루먼은 참모진과 숙의 끝에 임정이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8월25일 답장을 하지 않기로 공식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5.08.12.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email protected]
 "친애하는 도노반 장군, 본인은 1945년 8월18일자 한국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의 수장이라고 소개한 김구씨(Mr. Kim Ku)의 메시지에 답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지 않은 '자체 정부'의 대표가 보낸 메시지를 본인에게 전달하는 채널로 귀하의 요원들이 행동한 것이 부적절함을 인식한 귀하에게 사의를 표합니다."

 김구 주석이 트루먼의 '핫라인'으로 기대해 마지 않았던 도노반 장군은 사실 그리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대통령 독대는 커녕, 백악관 비서를 통해 김구 주석의 서한을 간접 전달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는 1945년 8월18일 백악관 비서실에 서한을 전달하며 "미스 콘웨이 귀하,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담긴 메모랜덤을 첨부합니다. 이것을 대통령에게 전달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별도의 OSS 공식 레터를 첨부했다.

 도노반 장군의 어설픈 밀사(?)역은 트루먼을 비롯한 백악관 실세의 반감을 가져왔고 오비이락이었는지 몰라도 9월 OSS 해체로 이어진다. 뉴욕 변호사 출신으로 전쟁영웅이었던 도노반 장군은 쓸쓸히 전역했다. OSS의 기능은 국무부와 국방부로 분산 이관됐다가 뒤늦게 중앙정보부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트루먼이 1947년 국가보안법에 서명, 오늘의 CIA가 창설됐다.

 재미 언론인 문기성 씨는 "이상의 문서들은 미국이 전후 한반도에 대한 구상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말해준다"며 "미국이 소련과 파워게임을 벌이다 전후 유럽 부흥에 매진하기 위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기는 방식으로 협상을 결렬시킨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분석했다.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조국을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 대결로 치닫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노구를 이끌고 남북을 오가며 통합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남한은 1948년 8월 단독 정부를 수립했고, 9월 북한도 정부를 수립, 분단의 길로 치달았다.

 김구는 그해 11월 미·소 양군이 철군하면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는 등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6월26일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을 맞고 향년 74세로 서거했다. 일본도 감히 손을 못댄 '한국의 호랑이' 백범이 허망하게도 같은 민족의 총에 스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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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② 김구, 트루먼에 美정보총책 통해 비밀서한 “한국 독립 보장 요청"

기사등록 2015/08/13 13:28:17 최초수정 2016/12/28 15:2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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