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써니’(감독 강형철)에서 본드냄새에 취해 흐리멍덩한 눈으로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내뱉던 ‘본드걸’의 강렬한 연기와는 사뭇 다른 충격이다.
천우희는 경기 이천의 여자고등학교 연극부 경력이 전부일 정도로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살면서 크게 반항을 하거나 말썽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주말이면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향하는” 착한 딸이다. 굴곡 없는 삶과 단란한 가정과 달리 영화 속 천우희는 어린 나이에 세상의 편견을 견뎌냈다.
천우희는 이 영화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쫓겨나듯 다른 학교로 전학 온 ‘한공주’를 연기했다. 의지할 사람도, 마음 편히 머물 집도 없다. 그러다 알게 된 새로운 친구와 함께 노래하며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애쓰지만, 피의자 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 또 쫓겨나듯 새로운 곳으로 도망치게 된다. 덤덤한 표정에 어린 슬픈 눈빛이 폭발하는 감정연기보다 더 밀도 있게 다가온다.
심리적으로는 답답하고 힘들었다. “비슷한 일을 겪은 분들께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정직하게 나아갔다. “밑바닥에 깔렸지만 표출할 수 없는 공주의 마음이 느껴졌어요. 연기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소용돌이가 쳤고 억울하고 분노도 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시기를 지내고 나니 표정과 감정을 지울 수 있었죠. 그래도 공주는 슬퍼 보였으면 하는 바람으로요.”
“오히려 한강에서 수영하는 신이 힘들었죠. 10월쯤 촬영했는데 비도 오고 산 속이었고, 물도 얼음장같이 차가웠어요. 저도 힘들지만 대역 배우가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입술이 파랬던 게 아직도 기억 나요. 죄송했죠.”
“한공주는 전환점이 된 작품이에요. 스물여섯살 때 ‘계속 배우를 해도 될까?’ 걱정이 됐죠, 배우로서 자질이 있는지 걱정이 들면서 조급해졌고요. ‘써니’ 다음에 작품이 없었어요. 하고 싶은만큼 연기로 발현되지 않았으니 실망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자신을 탓했죠. 일로도, 성인으로도 자리 잡지 못해 고민이 너무 많았어요. 낙천적이고 여유로운 편인데 그때 처음 슬럼프를 겪었어요. 그러다 ‘한공주’를 만나며 의지가 됐어요. 많은 면에서 성숙해진 것 같아요.”
그런 공주가 이 세상과 잘 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살면서 분명히 어려운 점이 있을 거예요. 불현듯 과거가 생각이 나면 괴롭기도 하겠죠.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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