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도 잘알았다,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했다는 역사적 사실”

기사등록 2014/02/02 18:09:39

최종수정 2016/12/28 12:13:43

【서울=뉴시스】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 ‘역사의 아버지’라는 헤로도투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역사를 쓴다’고 했다.

 이 말은 기억이 역사가 된다는 사실과 함께 기억은 한시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일정 조건에서는 등가(等價)의 위치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질과 왜곡이 있을 수 있어 기록만이 연속성과 균질성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기록만이 ‘역사화’ 되어 시·공간적 절대화가 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기록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단순히 기록만으로 남아있다는 사실보다는, 이 기록이 만일 진실이 아닐 경우 이의 확산을 차단하고 정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데 있다.

 즉, 그 기록을 통해 새로운 의미나 가치가 부연되기도 하지만, 반면 잘못되거나 정확하지 않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이의 제기를 통해 정정을 하게 할 수 있고, 직접 진실을 기록으로 남기게 할 수도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갖는 것이 된다.

 그런데 어떤 기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수정이나 정정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객관적 증거, 즉 기록이나 직접적인 증언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새 자료를 대비하여 정·반·합의 결론을 도출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는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08년 발행 역술(재판) ‘찬미가’와 1945년 자필 ‘1907년 작’ 가사 기록, 이 두 기록으로 하여 윤치호 애국가 작사는 ‘역사’가 되었다. 이 두 자료간의 보완성은 전자의 판권 ‘譯述’ 표기를 12편의 찬송가는 ‘역’(譯), 즉 번역이고 제14장(애국가) 외 2편은 술(述), 즉 ‘지음’이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후자의 ‘작’(作)이 제공해 준다. 그리고 작사 시점이 1907년이란 절대 연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자료는 ‘윤치호 작사’ 사실을 역사화 하는 ‘하나의 자료’인 것이다.

 문제는 이 보완관계 간에는 약 40여년이란 비교적 긴 간격이 있다. 상호 관계의 긴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논점에서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보완 자료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가능하면 40여년이란 기간 안에 산출된 사적 기록이나 단행본류가 아닌 신문·잡지 같은 일반 자료라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바로 40년의 공백을 자료를 통해 긴밀성을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다.

 지금까지 윤치호 작사 자료는 30여 종에 이른다. 1908년부터 1945년 사이에 산출된 자료 중 현재 확인된 것은 다음의 6종이다.

 ①1909년 이기재 소장(所藏) 창가집, 윤치호 작사로 표기 ②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애국가 4절 작사자 ‘윤티호’로 표기 ③1915년 ‘경기도경무부보고’ 기록 ‘윤치호 舊作 애국가’로 표기 ④1925년 동아일보, ‘동해물과···’를 ‘윤치호 애국가’로 표기 ⑤1920년대 김종만 소장 노래책, 애국가 ‘윤 선생 치호’로 표기 ⑥1931년 한석원 편 ‘세계명작가곡집 무궁화’ 윤치호 표기

 이 중에 1910년 신한민보 소재 ‘국민가(國民歌)’ 기록은 많은 시사점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미주 지역에서 발행되었고, 많은 이들이 구독했던 신한민보에 게재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윤치호의 활동이 없는 공간과 기간에 발표된 것이란 점에서 적어도 임의성이 없다는 점도 주의를 표할만하다. 그래서 이글은 이 자료만을 살펴 가치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신한민보 소재 ‘국민가’에 대하여

 신한민보 1910년 9월21일자는 애국가를 ‘국민가’라는 곡명으로 하여 전4절 가사를 수록했고, 작사자를 ‘윤티호’로 명기한 자료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가사는 ‘찬미가’와는 다르게 구 표기법인 ‘아래 아’자를 쓰고 있고, 4절에서 ‘님군을 섬기며’(현 ‘충성을 다하여’)가 ‘민족을 모으고’로 상황에 맞게 개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4절에서 ‘긔상’을 1908년 ‘찬미가’와 같게 쓰고 있어 근본적으로 ‘찬미가’가 텍스트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는 이 텍스트가 국내외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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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절. 남산 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둘은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절. 가을 하날 공활한데 구름 업시 높고/ 말근 달은 우리 가삼 일편단심일세

 4절. 이 긔상과 이 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우나 즐거오나 나라사랑하세.

 이 기록은 작사된 지 3년, ‘찬미가’ 재판이 발행된 지 2년4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전 4절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표기법과 일부 자구의 의도적 개작에서 ‘찬미가’를 옆에 놓고 그대로 모사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전 4절을 숙지한 상황에서 옮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숙지하고 일부 자구를 수정하고 ‘국민가’라는 곡명을 단 사람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지게 된다. 또한 굳이 이 신한민보에 이 시기에 발표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도 마찬가지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 신한민보의 발행 배경부터 살펴본다.

 ◇국민회와 신한민보와 ‘국민가’

 인터넷에서 ‘신한민보’를 검색하면 “안창호가 국권회복을 위해 미국에서 창간한 공립신보의 후신···”으로 설명되는 기사가 많다. 그리고 1909년 2월10일, “어느 한 단체에 소속된 신문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신문”이란 창간사를 내어 민족 전체의 대변지임을 주장하며 샌프란시스코 ‘대한국민회’ 기관지로 출발했다고 했다.

 원래는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와 대동보국회 기관지 대동공보가 통합하고, 공립신보의 지령을 이어받아 창간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은 최정익이고 이어 박용만·이항우 등으로 바뀌었다. 초기에는 전체 4면으로, 1~3면은 순국문판, 4면은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매주 수요일에 발행했으며 3·1운동 기간에는 격일간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주로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에 관한 논설과 기사를 실었고, 국내 소식과 미국동포 소식을 주로 다루었다.

 1909년 10월27일 제156호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을 보도했고, 1910년 3월30일 제178호는 안중근 처형을 애도하는 글을 실었다. 이런 호수는 국내에도 배포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국내 반입을 금지했고, 1909년 3월26일자를 압수한 것을 시작으로 다음해까지 무려 54회나 발매금지 및 압수를 하였다. 1915년 3월11일부터는 이대위가 고안한 ‘인터 타입’의 식자기로 조판을 하였다. 재정난으로 자주 휴간하다가 1922년 대한국민회가 분리되자 그 해 4월10일부터 8월10일까지 휴간을 했다. 그 뒤 속간하여 미국 내 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멕시코 동포사회에도 영향을 주는 신문이 되었다.

 결국 신한민보는 공립신보와 대동공보의 통합에 의해 창간된 신문이고,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가 통합한 대한국민회가 발행한 기관지인 것이다. 창간된 지 1년7개월 만에 게재된 애국가 가사 4절을 ‘국민가’라고 표기한 이유를 짐작 할 수 있다. 즉, 이 신문의 발행 단체인 ‘국민회’(國民會 Kook Min Hur Foundation)가 당시 ‘애국가’라는 명칭이 일반화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회가(會歌) ‘국민가’로 삼기 위해 처음 발표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시기 이전 국내외 매체에서 독립가나 애국가류를 수록할 때는 가사를 처음 발표하는 경우에는 가사만 수록하고 작사자를 반드시 밝히는 형태였고, 다른 기사 내용 일부로 언급되거나 가사를 소개할 때는 작사자를 표기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면 1896년부터 독립신문이 많은 애국가를 소개했는데, 이때 ‘평양 김종섭 애국가’와 같이 반드시 전체 가사와 작사자의 직함 또는 주소를 표기하였다. 그러나 1899 독립신문 배재학당 방학예식 기사에서처럼 가사 일부나 곡명만을 언급할 때는 작사자를 밝히지 않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러므로 신한민보 ‘국민가’ 발표는 전자의 경우로 가사 4절만 독립적으로 수록하고 작사자를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이러함에서 오늘의 애국가는 ‘찬미가’에서 Patriotic Hymn(애국적 찬가)으로, 신한민보에서 ‘국민가’로 그 기능과 곡명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살핀대로 3년 전에 작사된 가사 4절을 숙지하고, ‘국민회 회가’의 필요성과 노래의 기능을 인식하여 신한민보에 발표한 이는 누구인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국민회 창립 배경과 이 시기 정황을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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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공립협회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장정(國民會章程)을 제정하며 결성된 단체이다. 이 국민회 창립의 추체는 상항친목회를 기반으로 1905년 공립협회를 세우고, 1907년 귀국한 안창호와 미주지역에서 확고한 기반을 닦은 박용만, 그리고 국민회를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낸 이대위 세 명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국내에서 일진회 송병준 등이 대한제국을 일본과 합병시키는데 찬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상황으로 교민사회가 긴장한 상태이다. 그래서 창립 첫 해에 멕시코와 시베리아에 대표단을 보내 그 곳에 조직을 확장하여 모두 116개의 지방총회를 조직하고, 5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이를 안창호는 국내와 중국 등지에서 지휘했던 것이다.

 한편 1908년 9월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윤치호를 대리교장으로 초빙하여 함께 하였다. 그런데 이때 윤치호는 이미 1906년 개성에 실업교육을 목표로 개교한 한영서원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작사한 제14장을 가르쳤으며 이를 ‘찬미가’로 발행하여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시키고 있었다. 이로부터 2개월 후 대성학교에서 대리교장으로 안창호와 함께 교육을 하게 된 것이다.

 ◇‘국민가’로 개칭 배경

 이런 사정에서 안창호는 윤치호의 제14장 작사 사실과 ‘찬미가’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당시 대성학교에서 수학을 담당했던 채필근(1885∼1973)이 안창호로부터 “애국가는 윤치호가 지은 것이다”(신앙생활 1955년 5월호)라고 하였다는 증언에서 확인이 된다. 결국 안창호는 이때 숙지한 제14장을 국민회를 조직하며 그 회가로 사용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일부 개작하여 기관지 신한민보를 통해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국민가’ 발표가 국민회가 창립되고 신한민보가 창간된 1909년이 아니고 이듬해 9월이냐가 주목된다. 1910년 7월3일은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애국동맹단을 조직하고 외교선전과 군사인재 양성 등 9개조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7월5일에는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대진공진단’을 조직하고, 7월6일에는 시클라멘트에서 ‘애국동맹단’ 9개항을 통과시켜 일제침략 정책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그리고 7월 9일에는 외교선전과 군인양성을 급선무로 하는 통고문을 지방회에 발송하고, 고종과 일본 천황에게 한일병탄조약을 반대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렇게 국내의 한일병탄조약 체결을 앞두고 긴박하게 활동하던 때였으므로 국민회의 결속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조직 강화를 위해 ‘국민가’를 필요로 하여 발표한 것이다. 이런 노래의 필요성과 기능을 인식한 이는 안창호였고, 그래서 ‘민족을 모흐며’라는 주체적인 자구로 개작을 하여 발표했던 것이다.

 그런데 ‘국민가’가 발표되는 9월 중순께에 안창호는 미주 지역에 없었다. 중국과 연해주 등지에서 이갑과 같은 망명인사들의 활동을 독려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안창호에 의해 미리 준비된 것이었거나 간접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정황상으로 안창호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이 시기 전후 국민회와 신한민보 운영을 주도한 이가 안창호였기에 설령 안창호에 의하지 않았더라도 이 노래가 윤치호 작사로 발표된 것이 잘못된 것이라며 안창호나 그 주변에서 이를 정정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 신한민보의 존재나 국내외에서 윤치호가 작사하지 않은 것을, 만에 하나 3년 동안 알려져 안창호가 작사한 것이었다면 이를 용인할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도 그렇다. 여기서 안창호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의 하나인 주요한이 안창호의 작사설을 강하게 부정하며 한 말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神話的)인 설이다”(경향신문 1955년 4월19일자)를 대입하면 더욱 명료하다.

 ◇윤치호 작사, 안창호는 정확히 알았다

 다만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안창호야 말로 애국가를 가장 사랑하고 그 기능을 애국적으로 활용한 인물이란 사실이다. 이런 인식의 배경은 1902년 미국유학 체험에서부터라고 본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안창호의 국가(애국가)에 대한 인식은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1910년 사이의 활동에서 확인이 된다. 즉 ①1905~1907년 귀국 전까지 미주지역에서 활동할 당시 학교에서 조회시간에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부르는 것을 주목하였다 ②1907년 초 귀국하며 일본에서 유길준에게 이런 사정을 표하고 애국가 작사를 의뢰하나 사양하여 얻지 못했다 ③귀국하여 이미 1902년 고종의 명에 의해 윤용선의 주도로 ‘대한제국애국가’가 제작되어 제정 반포된 사실을 알게 된다. 안창호는 1902년 미국에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공식 애국가가 불려지는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④그래서 귀국하여 서서만리현에 있는 의무균명학교에서 연설하면서 이 학교에서부터 아침 수업 전에 ‘국기배례 및 애국가 화창’을 하자고 제안하였고, 이는 1907년 3월2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⑤이후 대성학교를 개교하고 ‘대한제국애국가’의 권위적이고 구태의연함을 알고 애국가 짓고 부르기 운동을 하였다. 이는 당시 대성학교 학생 창가집 ‘묘가휘집(妙歌彙集)’과 ‘창가휘집(唱歌彙集)’에 6종의 애국가가 수록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⑥이 과정에서 안창호는 윤치호 작사 제14장(국민가/애국가)을 주목하여 활용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윤치호 애국가(찬미가 제14장) 작사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 당시 미주 지역에서 사진판으로 전달되어 단편적으로 언급된 1910년 신한민보 발표 ‘국민가’를 조명해 보았다. 그 결과 이 신문 기록 ‘국민가 윤치호’는 안창호의 의도에 의해 ‘국민회’의 회가로 전용된 것임을 확인했고, 그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누구보다 먼저,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이 안창호임을 확인하였다. 이런 사실로 하여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사실은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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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도 잘알았다,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했다는 역사적 사실”

기사등록 2014/02/02 18:09:39 최초수정 2016/12/28 12: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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