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김연갑의 '애국가' <4>
지난해 문화재청은 안익태(安益泰 1906~1964) 친필 애국가 악보를 근대문화재로 지정했다. 근·현대 음악사 유물 중 역사적 가치가 있음을 평가한 결과이다.
자필 악보는 관현악 총보(總譜)와 피아노 반주가 붙은 합창보로, 안익태의 유족들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사료다. 관현악 총보에는 '대한국애국가(大韓國愛國歌)'라는 곡의 원래 제목이 붙어 있고, 합창보에는 '애국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이 중 '애국가' 가사는 한글로 2절까지 적혀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치 평가를 한 애국가를 국가로 헌법에 명문화 하지도 않았고, 이 악보의 국내 유입 과정도 정리되어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안익태의 애국가 작곡과 관련하여 확정하지 못한 것은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작곡 시기이고 또 하나는 악보의 국내 유입 시기이다. 그런데 작곡 시기는 1936년에서 1935년 11월로 안익태의 직접 기술이 확인되어 밝혀졌다. 그러나 안익태 악보가 국내에 언제 유입되어 연주되고, 악보로 출판되었는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상 공식적인 해방 후 최초의 애국가 방송인 1945년 8월16일 오후 5시 경성방송(현 KBS)에서 연주된 애국가는 과연 어떤 곡인지를 규명해야하고, 해방공간 북한에서도 연주되었다는 곡은 어떤 것인지를 규명해야 하므로 애국가 역사를 정립하는데 의미가 있다. 만일 국내 유입이 8월16일 이후라면 방송에 나간 애국가 곡조는 올드랭사인 곡이고, 북한이 중경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안익태 곡조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국내 유입 시점이 문제로 남는다.
1935년 11월 하순, 안익태는 4년여 만에 후렴을 완료하여 애국가 작곡을 끝냈다. 김경래(金景來)가 쓴 전기『안익태와 애국가』(성광문화사 1978)는 “어느 날 아침 꿈결에 귓전을 스쳐 지나가는 가느다란 멜로디를 오선보에 옮겨 마지막 후렴 부를 완성했다. 이에 대해 선생은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다’라고 감격했다”고 기술했다. 당연히 5년을 고심한 결과이기에 지나친 표현이 아닌 것이다.
애국가는 이렇게 30세의 안익태에 의해 조국을 떠난 외지 미국과 독일에서 작곡되었다. 이런 사실은 당시로서나 오늘의 시점에서나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암흑의 시대에 ‘대한국애국가’라는 곡명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조국애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것이고, 그래서 또 다른 차원의 독립운동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애국가는 조국을 위해 바친 한 청년 음악가의 애국열정의 결정체 이며, 당시 조국 광복을 위해 타국에서 풍찬노숙하던 애국지사들에게 큰 빛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겐 언젠가 복국(復國)될 조국에 바쳐질 ‘조국찬가’였을 것이다.
때문에 “살기등등한 일제 말엽, 봉선화도 부를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애국가를 작곡하여…그 가락을 ‘코리아 판타지’에 담아 전 세계를 누비며 연주한 안익태 애국심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을 것이며…”라고 한 평가는 단지 공치사가 아니다. 시인 모윤숙이 다음과 같이 애국가 작곡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짚어준 것도 당연한 것이다.
“눌리고 질식된 그 시대에 서로 붙들고 마음 합할 곡조도 몰라 제국 일본의 ’기미가요‘를 불렀을 때 선생은 숨어사는 조국의 흐느낌과 불붙는 항거의 절규를 들었고, 헤어졌던 겨레 손잡고 불러볼 고독한 동해물과 백두산을 껴안았습니다.” (월간음악 1980. 3)
민족사적 배경과 의미를 갖고 탄생한 애국가는 A장조(가장조), 4분의 4박자, 느리고 장중한 분위기의 악상으로 모두 16마디 4절의 유절형식과 a-b-c-d의 구조로 된 두 토막 형식이다.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키(key)는 한국인이 음악성이 높은 것을 감안하여 높은 E음으로 조성했다.
이로써 악보가 출간되었다. 안익태는 피아노 반주부를 포함한 악보를 제일 먼저 황사성 목사에게 보내고, 이어 시카고에 유학 중이던 이유선에게도 보내며 교포들에게 널리 연주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황 목사는 악보를 받아 이를 부인 김옥석과 함께 출판용으로 정리하여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명의로 출판을 의뢰했다. 그리고 즉시 몇몇 한인교회와 교민신문인 신한민보에도 보냈다. 이렇게 악보 출판을 마친 황 목사는 대한인국민회 요인들을 초청하여 부인의 피아노 반주와 자신의 독창으로 사택에서 간소한 개창식을 거행했다.
한편 대한인국민회는 1935년 12월, 교민 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20센트의 정가를 붙여 판매용으로 악보집 대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HYMN; AEA KOOK KA)를 발매했다. 미국의 유명한 악보 출판사인 필라델피아 엘칸 보겔(Elkan Vogel)사를 통해서다. 이 악보는 교포사회의 교회에 먼저 배포되었다.
“미국 음악대학에서 유학 시 안익태가 현행 ‘애국가’ 곡을 부쳐와 재미 교포들에게 가르치라고 해서 시카고 교포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쳤다.”
지난해 문화재청은 안익태(安益泰 1906~1964) 친필 애국가 악보를 근대문화재로 지정했다. 근·현대 음악사 유물 중 역사적 가치가 있음을 평가한 결과이다.
자필 악보는 관현악 총보(總譜)와 피아노 반주가 붙은 합창보로, 안익태의 유족들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사료다. 관현악 총보에는 '대한국애국가(大韓國愛國歌)'라는 곡의 원래 제목이 붙어 있고, 합창보에는 '애국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이 중 '애국가' 가사는 한글로 2절까지 적혀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치 평가를 한 애국가를 국가로 헌법에 명문화 하지도 않았고, 이 악보의 국내 유입 과정도 정리되어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안익태의 애국가 작곡과 관련하여 확정하지 못한 것은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작곡 시기이고 또 하나는 악보의 국내 유입 시기이다. 그런데 작곡 시기는 1936년에서 1935년 11월로 안익태의 직접 기술이 확인되어 밝혀졌다. 그러나 안익태 악보가 국내에 언제 유입되어 연주되고, 악보로 출판되었는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상 공식적인 해방 후 최초의 애국가 방송인 1945년 8월16일 오후 5시 경성방송(현 KBS)에서 연주된 애국가는 과연 어떤 곡인지를 규명해야하고, 해방공간 북한에서도 연주되었다는 곡은 어떤 것인지를 규명해야 하므로 애국가 역사를 정립하는데 의미가 있다. 만일 국내 유입이 8월16일 이후라면 방송에 나간 애국가 곡조는 올드랭사인 곡이고, 북한이 중경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안익태 곡조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국내 유입 시점이 문제로 남는다.
1935년 11월 하순, 안익태는 4년여 만에 후렴을 완료하여 애국가 작곡을 끝냈다. 김경래(金景來)가 쓴 전기『안익태와 애국가』(성광문화사 1978)는 “어느 날 아침 꿈결에 귓전을 스쳐 지나가는 가느다란 멜로디를 오선보에 옮겨 마지막 후렴 부를 완성했다. 이에 대해 선생은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다’라고 감격했다”고 기술했다. 당연히 5년을 고심한 결과이기에 지나친 표현이 아닌 것이다.
애국가는 이렇게 30세의 안익태에 의해 조국을 떠난 외지 미국과 독일에서 작곡되었다. 이런 사실은 당시로서나 오늘의 시점에서나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암흑의 시대에 ‘대한국애국가’라는 곡명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조국애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것이고, 그래서 또 다른 차원의 독립운동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애국가는 조국을 위해 바친 한 청년 음악가의 애국열정의 결정체 이며, 당시 조국 광복을 위해 타국에서 풍찬노숙하던 애국지사들에게 큰 빛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겐 언젠가 복국(復國)될 조국에 바쳐질 ‘조국찬가’였을 것이다.
때문에 “살기등등한 일제 말엽, 봉선화도 부를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애국가를 작곡하여…그 가락을 ‘코리아 판타지’에 담아 전 세계를 누비며 연주한 안익태 애국심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을 것이며…”라고 한 평가는 단지 공치사가 아니다. 시인 모윤숙이 다음과 같이 애국가 작곡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짚어준 것도 당연한 것이다.
“눌리고 질식된 그 시대에 서로 붙들고 마음 합할 곡조도 몰라 제국 일본의 ’기미가요‘를 불렀을 때 선생은 숨어사는 조국의 흐느낌과 불붙는 항거의 절규를 들었고, 헤어졌던 겨레 손잡고 불러볼 고독한 동해물과 백두산을 껴안았습니다.” (월간음악 1980. 3)
민족사적 배경과 의미를 갖고 탄생한 애국가는 A장조(가장조), 4분의 4박자, 느리고 장중한 분위기의 악상으로 모두 16마디 4절의 유절형식과 a-b-c-d의 구조로 된 두 토막 형식이다.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키(key)는 한국인이 음악성이 높은 것을 감안하여 높은 E음으로 조성했다.
이로써 악보가 출간되었다. 안익태는 피아노 반주부를 포함한 악보를 제일 먼저 황사성 목사에게 보내고, 이어 시카고에 유학 중이던 이유선에게도 보내며 교포들에게 널리 연주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황 목사는 악보를 받아 이를 부인 김옥석과 함께 출판용으로 정리하여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명의로 출판을 의뢰했다. 그리고 즉시 몇몇 한인교회와 교민신문인 신한민보에도 보냈다. 이렇게 악보 출판을 마친 황 목사는 대한인국민회 요인들을 초청하여 부인의 피아노 반주와 자신의 독창으로 사택에서 간소한 개창식을 거행했다.
한편 대한인국민회는 1935년 12월, 교민 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20센트의 정가를 붙여 판매용으로 악보집 대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HYMN; AEA KOOK KA)를 발매했다. 미국의 유명한 악보 출판사인 필라델피아 엘칸 보겔(Elkan Vogel)사를 통해서다. 이 악보는 교포사회의 교회에 먼저 배포되었다.
“미국 음악대학에서 유학 시 안익태가 현행 ‘애국가’ 곡을 부쳐와 재미 교포들에게 가르치라고 해서 시카고 교포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쳤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칼리지 음악과에 유학하고 있던 박태준(朴泰俊 1900~1986)의 회고이다. 그런데 애국가 작곡이 어떤 의미인가를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동 중이던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이시영, 이범석 같은 요인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公報) 제69호 1940년 2월1일자에는 미주 대한인국민회가 안익태 작곡 애국가 악보와 함께 그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음을 기록하고, 이를 허가했다고 부연했다. 이 대한인국민회는 1912년 11월 샌프란시코에서 국외 한인사회 통합을 목표로 결성, 중앙총회를 최고기관으로 하여 독립운동 지원과 교민 지위향상을 꾀한 단체이다.
“애국가 신곡보 허가(愛國歌 新曲譜 許可)-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 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대한민국 22년 12월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
이로해서 이 시점부터 임시정부는 안익태 곡을 사용했음을 알게 하고, 1941년 임시정부 성립식에서 국가로 연주했던 것이다. 이는 장준하가 1944년 가을 일본군에서 탈출,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했을 때 광복군들이 이미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 증언이 재확인된다. 그래서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환국 비행기에서 한반도가 보이자 울먹이며 부른 애국가도, 12월19일 임시정부의 개선 환영식에서 부른 것도 이 곡조였다.
이렇게 악보는 미주지역 교민사회와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먼저 불려 해방을 기다리게 되었다. 드디어 1945년 8월15일 정오, 중앙방송의 중대 방송에서 시모무라 총재가 “삼가 천황 폐하의 방송을 마칩니다”라며 항복 방송을 끝내는 순간에도 이 땅에는 기미가요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이튿 날 오후 1시 방송을 탄 첫 애국가도 올드랭사인 곡이었다.
결국 안익태 악보가 공개적으로 전해진 것은 3개월이 지난 1945년 11월이었다. 11월21일자〈예술통신〉을 통해서 확인되는데, 제44호에는 두 쪽에 걸쳐 안익태 작곡 애국가 악보와 관련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는 “현금(現今) 모든 우리의 의식(儀式)에서 혹은 학교에서 불러오고 있는〈애국가〉‘동해물은…’ 그 곡조 자체가 이별을 노래하는 스코틀랜드의 민요에서 따온 것이어서 아는 이로서는 적지 않이 유감으로 생각하게 하나 해방 이래 졸지에 누가 끄집어 내었는지 벌써 국가(國歌)인체 상당히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한층 걱정을 사고 있다”고 하며 유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최근 미국에서 귀국한 김호(金乎)씨가 벌써 미국에서는 이 모순을 덜기 위하여 가사는 종전대로 두고 곡만은 4부로 전혀 창의적으로 지은 아름답고 웅대한 악보를 갖고 오시어 본 통신에 전하여 주시었다. 그런데 미국서는 모든 국가 의식에 조선을 대표하는 때는 벌써 이 곡을 쓰고 있고, 특히 조선어방송 시간에도 쓰고 있다.”
이 기사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하나는 이승만 박사가 태평양전쟁 발발 뒤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을 통해 조선인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 방송을 할 때 안익태 작곡 애국가가 타이틀 뮤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둘은 악보는 북미 국민회를 주도한 리들리(Reedlay) 그룹 대표로 1937년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한 김호(1884~1968)에 의해 1945년 11월 중순 국내 통신사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셋은 올드랭사인 곡조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는데 안익태의 곡이 소개되면서 ‘아름답고 웅대하다’라는 평가로 환영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통신의 기사가 발행된 지 60여년이 지난 뒤에 글쓴이에 의해 발굴되어 확인되었다. 이렇게 하여 국내 악보의 유입 시점, 오늘의 확산 계기를 밝힌 것이다.
통신을 통해 알려진 애국가는 영남교육(1946년 1월호) 같은 잡지들에 게재되어 확산되었고, 판매용 악보로도 발행되고, 연주회로 이어졌다. 12월 16~17일 양일간 이화여전(梨花女專)이 주최한 해방기념음악회에서 공식 초연되었다. 해방일보 14일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화고등학교에서는 해방의 축전과 아울러 38도 이북에 있는 학도들의 학자 출자금을 각출하고자-중략-명치좌에서 대 음악회를 하게 되는데 그 회순은 다음과 같다. 신 작품: ‘애국가’ 초연 안익태 작곡….”
신나라레코드 김기순 회장은 “35년 동안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수 없이 불려왔던 명치좌(후에 시공관으로 개칭)에서 국내 공식 초연된 것이다. 그리고 악보집 출판은 1946년 5월 <조선관악연구원>에서, 음반은 9월 고려레코드에서 SP로 발매되었다”고 밝혔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안익태의 애국가 악보는 1945년 11월 국내에 유입되고, 첫 연주는 12월, 악보집 출판은 1946년 5월 <조선관악연구원>에서, 음반은 9월 고려레코드에서 SP로 발매되어 오늘에 이르게 했다. 역시 모든 것이 관(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애국심의 발로로 전개되었다. 이제 국가 기관이 이 같은 자료와 사실들을 검토하여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고 애국가의 역사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email protected]
“애국가 신곡보 허가(愛國歌 新曲譜 許可)-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 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대한민국 22년 12월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
이로해서 이 시점부터 임시정부는 안익태 곡을 사용했음을 알게 하고, 1941년 임시정부 성립식에서 국가로 연주했던 것이다. 이는 장준하가 1944년 가을 일본군에서 탈출,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했을 때 광복군들이 이미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 증언이 재확인된다. 그래서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환국 비행기에서 한반도가 보이자 울먹이며 부른 애국가도, 12월19일 임시정부의 개선 환영식에서 부른 것도 이 곡조였다.
이렇게 악보는 미주지역 교민사회와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먼저 불려 해방을 기다리게 되었다. 드디어 1945년 8월15일 정오, 중앙방송의 중대 방송에서 시모무라 총재가 “삼가 천황 폐하의 방송을 마칩니다”라며 항복 방송을 끝내는 순간에도 이 땅에는 기미가요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이튿 날 오후 1시 방송을 탄 첫 애국가도 올드랭사인 곡이었다.
결국 안익태 악보가 공개적으로 전해진 것은 3개월이 지난 1945년 11월이었다. 11월21일자〈예술통신〉을 통해서 확인되는데, 제44호에는 두 쪽에 걸쳐 안익태 작곡 애국가 악보와 관련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는 “현금(現今) 모든 우리의 의식(儀式)에서 혹은 학교에서 불러오고 있는〈애국가〉‘동해물은…’ 그 곡조 자체가 이별을 노래하는 스코틀랜드의 민요에서 따온 것이어서 아는 이로서는 적지 않이 유감으로 생각하게 하나 해방 이래 졸지에 누가 끄집어 내었는지 벌써 국가(國歌)인체 상당히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한층 걱정을 사고 있다”고 하며 유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최근 미국에서 귀국한 김호(金乎)씨가 벌써 미국에서는 이 모순을 덜기 위하여 가사는 종전대로 두고 곡만은 4부로 전혀 창의적으로 지은 아름답고 웅대한 악보를 갖고 오시어 본 통신에 전하여 주시었다. 그런데 미국서는 모든 국가 의식에 조선을 대표하는 때는 벌써 이 곡을 쓰고 있고, 특히 조선어방송 시간에도 쓰고 있다.”
이 기사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하나는 이승만 박사가 태평양전쟁 발발 뒤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을 통해 조선인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 방송을 할 때 안익태 작곡 애국가가 타이틀 뮤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둘은 악보는 북미 국민회를 주도한 리들리(Reedlay) 그룹 대표로 1937년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한 김호(1884~1968)에 의해 1945년 11월 중순 국내 통신사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셋은 올드랭사인 곡조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는데 안익태의 곡이 소개되면서 ‘아름답고 웅대하다’라는 평가로 환영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통신의 기사가 발행된 지 60여년이 지난 뒤에 글쓴이에 의해 발굴되어 확인되었다. 이렇게 하여 국내 악보의 유입 시점, 오늘의 확산 계기를 밝힌 것이다.
통신을 통해 알려진 애국가는 영남교육(1946년 1월호) 같은 잡지들에 게재되어 확산되었고, 판매용 악보로도 발행되고, 연주회로 이어졌다. 12월 16~17일 양일간 이화여전(梨花女專)이 주최한 해방기념음악회에서 공식 초연되었다. 해방일보 14일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화고등학교에서는 해방의 축전과 아울러 38도 이북에 있는 학도들의 학자 출자금을 각출하고자-중략-명치좌에서 대 음악회를 하게 되는데 그 회순은 다음과 같다. 신 작품: ‘애국가’ 초연 안익태 작곡….”
신나라레코드 김기순 회장은 “35년 동안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수 없이 불려왔던 명치좌(후에 시공관으로 개칭)에서 국내 공식 초연된 것이다. 그리고 악보집 출판은 1946년 5월 <조선관악연구원>에서, 음반은 9월 고려레코드에서 SP로 발매되었다”고 밝혔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안익태의 애국가 악보는 1945년 11월 국내에 유입되고, 첫 연주는 12월, 악보집 출판은 1946년 5월 <조선관악연구원>에서, 음반은 9월 고려레코드에서 SP로 발매되어 오늘에 이르게 했다. 역시 모든 것이 관(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애국심의 발로로 전개되었다. 이제 국가 기관이 이 같은 자료와 사실들을 검토하여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고 애국가의 역사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