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정주영 연기한 '국민 아버지' 최불암…20년 인연 재조명

기사등록 2026/10/30 16:54:00

'야망의 25시' 청년 정주영부터 '영웅시대' 천태산까지…각별했던 동행

[서울=뉴시스]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을 모델로 한 인물 천태산을 연기한 최불암. (사진 = MBC TV 캡처)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국민 아버지' 배우 최불암(87)이 29일 세상을 떠난 가운데, 생전 고(故)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나눈 20여 년의 각별한 인연이 재조명되고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3년 시작됐다. 농촌에 애착이 깊었던 정 회장은 MBC TV 드라마 '전원일기'의 열렬한 시청자였다. 정 회장은 최불암을 집으로 초대해 "지게도 못 지면서 어떻게 농사 드라마를 하느냐"며 핀잔을 줬다. 이어 "지게는 목의 힘으로 지는 것이다. 목을 당겨야 중심이 잡힌다"고 직접 가르쳤다. 최불암은 늙은 지게꾼의 목덜미가 청자처럼 갈라져 있다는 정 회장의 조언을 실제 분장에 반영하기도 했다.

정 회장의 '전원일기' 사랑은 카메오 출연 시도로 이어졌다. 정 회장은 "대본 없이 20분만 달라"며 김 회장을 우연히 만나 담소를 나누는 설정을 제안했고 제작진도 합의했다. 그러나 녹화 당일 비서실과 임원진의 만류로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최불암은 브라운관에서 직접 정 회장을 연기하기도 했다. 1983년 MBC '야망의 25시'에서 청년 정주영을 맡았고, 2004년 MBC '영웅시대'에서는 정 회장을 모델로 한 세기그룹 천태산 회장의 노년기를 연기했다. 정 회장 특유의 강원도 사투리와 말끝을 올리는 억양을 세밀히 재연했다. 그러나 100부작 기획이던 '영웅시대'가 외압설과 미화 논란 속에 70회로 조기 종영되자, 최불암은 "50대 시절만 다뤄 통일에 대한 염원이나 정계 활동 등 그분의 생각과 활약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서울=뉴시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최불암. (사진 = 뉴시스 DB, MBC TV 캡처)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정 회장의 권유는 최불암을 정치로 이끌었다. 1992년 정치가 싫어 일본으로 피신했던 최불암은 귀국 후 안양 유세장에 들렀다가 언론에 노출되며 통일국민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강부자·이주일 등과 함께였다. 최불암은 "나라가 돌아가는 틀을 넓게 볼 수 있어 연기자로서도 큰 득이 됐다"고 돌아봤다. '전원일기'에서 둘째 아들로 호흡을 맞췄던 배우 유인촌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입각했을 때는 "'공부도 안 시키고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들었냐'며 울분을 토하던 100회 특집 장면이 떠올라 애잔했다"는 소회를 남겼다. 유인촌은 30일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빈소리가 차려지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고인을 추모했다.

최불암에게 정 회장은 삶의 나침반이자 스승이었다.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됐음에도 헬기 탑승을 밀어붙였던 강원도 유세 날, 조종사가 떨고 최불암이 꽁꽁 언 김밥을 넘기지 못할 때 정 회장은 "밥이 어니까 더 꼬소하다"며 웃었다. '이봐, 해봤어?'로 대변되는 특유의 배포와 낙관주의였다.

정 회장은 '하루 서너 시간만 자고 일한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엉터리다. 난 7시간은 자야 힘을 쓴다"며 "잠 안 잔다고 자랑하는 사람과는 절대 일하지 마라. 병든 사람이거나 사기꾼"이라는 뼈 있는 조언을 건넸다. 박동규 교수의 해변시인학교를 함께 찾았을 때는 라면값을 보태달라는 청에 정 회장이 30만 원을 꺼내자, 최불암이 20만 원을 보태 "재벌 총수와 2대 3으로 돈을 냈다"며 껄껄 웃기도 했다.
[서울=뉴시스] 최불암. (사진 = tvN 스토리 '회장님네 사람들' 캡처)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2001년 정 회장의 장례식에서 추모시를 낭독했던 최불암은 생전 그를 "단순소박하면서도 치밀했던 스승"으로 회고했다. 시대를 개척한 기업인과 그 삶을 온몸으로 연기했던 배우는 20여 년의 세월을 지나 이제 역사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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