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건너 닿은 숲…박기영, 우리말로 직조한 재즈의 숨결

기사등록 2026/10/30 06:00:00

데뷔 28년 만에 첫 브랜드 콘서트 '포레스트'

기타 덜어내고 리얼 세션의 질감으로

동덕여대 강단서 '창작자' 키우는 현역

"결국 무대서 AI보다 라이브 잘해야"

"나무 하나로 숲 될 수 없듯, 연대의 음악으로"

"노래하다 무대서 마감하는 게 소원"

[서울=뉴시스] 박기영. (사진 = 엘리야 컴퍼니 제공)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목소리는 때로 침묵의 가장자리에서 더 또렷하게 도착한다. 마주 앉은 싱어송라이터 박기영의 평상시 음성은 낮고 차분했다. 웅성거리는 소음에 성대가 반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연스레 배어든 침묵의 습관이자 자기 조율의 방식이다. 하지만 그 고요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강단, 삶에 대한 성찰의 밀도는 묵직하다. 말소리는 작았으나, 그 말들이 딛고 선 사유의 뿌리는 28년이라는 성실의 세월만큼 깊었다.

어느덧 동덕여자대학교(동덕여대) 공연예술대학 실용음악과 정식 교원으로 부임한 지 두 번째 학기, 중간고사와 수시 입시의 파도가 막 지나간 대학로 교정에서 최근 그를 만났다. 하루에 100명이 넘는 입시생들의 노래를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온 감각을 곤두세워 들었던 탓에 "지방 공연을 두 번 다녀온 것보다 배로 고단했다"면서도, 그의 눈빛은 다음 세대를 마주한 음악가의 설렘으로 반짝였다.

특히 입시 심사 이틀 차, 누적된 피로 속에 엎드려 쪽잠을 청하면서도 그는 동덕여대 가을 축제 무대에 올라 교정 전체를 뒤흔들었다. "실용음악과 어디 있어!"라는 외침에 터져 나온 학생들의 함성, 같은 과 재학생인 가수 전유진과의 이례적인 사제 간 동반 무대, 그리고 학내 커뮤니티를 달군 "박기영 교수님에게 배우는 실음과가 부럽다"는 고백들은 현역 디바가 강단에 섰을 때 발생하는 가장 이상적인 온도를 증명했다.

◆학위의 벽을 허문 파격…28년 만에 완성된 '약속의 계보'

박기영의 임용은 동덕여대 공연예술대학 설립 이래 석사 학위 없이 오직 '현장 실적'과 '음악적 궤적'만으로 이뤄진 최초의 사례다. 대학 전체를 통틀어서도 모델과 김동수 교수에 이은 두 번째 파격 인사다.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전문학사 출신인 그가 강단에 서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요행이 아니었다. 백석예술대에서 5년간 초빙교수로 쌓은 교육적 검증, 데뷔 이후 28년간 8장의 정규 음반과 크로스오버, 수많은 무대를 총망라해 사흘 밤을 새우며 집대성한 방대한 실적 도서, 그리고 동료 교수들 앞에서의 치열한 모의 수업을 통과해 일궈낸 결과다.

이 파격적인 인연의 이면에는 28년의 시간을 건너뛴 운명적인 일화가 숨어 있다. 1998년 서울예대 재학 시절, 스승이었던 피아니스트 김광민 교수가 동덕여대로 자리를 옮기며 "나는 이제 간다"고 작별을 고했을 때, 박기영은 "교수님, 저희를 두고 가시면 어떡합니까"라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당시 김 교수는 무심한 듯 따뜻하게 "네가 동덕으로 오면 되지"라는 한마디를 건넸다. 그 무구한 예언은 28년이라는 세월의 나이테를 두른 뒤 정식 교원 임용이라는 결실로 화답했다.

박기영은 이 강단이 자신 개인의 영달이 아닌, 후배 음악인들을 향한 무거운 책임의 자리임을 명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대학 사회에는 현역에서 바쁘게 활동하는 음악인은 수업에 성실하지 못할 것이라는 해묵은 편견이 분명히 존재해요. 제가 제대로 버텨내지 못하면 '거봐라, 결국 저렇지 않으냐'며 문이 닫혀버리죠. 제가 이 자리를 단단하게 지켜내야만, 학위라는 형식적 틀을 넘어 필드의 경력과 열정만으로 후배 뮤지션들이 교육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서울=뉴시스] 박기영. (사진 = 엘리야 컴퍼니 제공)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마감의 영감'과 내면의 고백…가창자를 창작자로 벼려내는 수업

강단에서의 박기영은 철저하게 '실전형 프로듀서'다. 모교 은사인 정원영 교수로부터 물려받은 혹독하면서도 밀도 높은 훈련 방식을 그대로 커리큘럼에 이식했다. 오리엔테이션 첫날부터 "중간·기말고사 대신 매주 과제물과 출석, 실전으로만 평가할 것이니 버티지 못할 사람은 수강을 포기하라"고 선언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매주 한 곡씩 곡을 쓰게 했다. 자연, 만남, 부모, 그리고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주제로 던지고 그에 어울리는 영화와 책을 쉼 없이 권했다. 기술적 발성에 갇혀 있던 시선을 내면의 고백으로 돌려세우기 위함이다.

"가장 중요하게 요구한 것은 가사였어요.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자기만의 언어를 꺼낼 줄 알아야 비로소 독창적인 음악이 되거든요."

그렇게 1학기 동안 학생 한 명당 4~5곡의 완곡이 쏟아져 나왔고, 블라인드 투표를 거쳐 선발된 9곡은 방학 중 합주와 편곡을 거쳐 본교 녹음실에서 트랙으로 빚어졌다. 외부 엔지니어를 섭외해 레코딩 디렉팅과 에디팅, 믹싱, 마스터링까지 전 과정을 학생들이 체감하게 했다. 나아가 백지영 '내 귀에 캔디'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콴(KWAN) 교수와 손잡고 방송연예과, 무용과, 모델과 학생들을 결합하는 학제 간 융합 영상 프로젝트로 판을 키웠다. 매니지먼트의 권능이 해체된 시대, 학생들에게 "이 수업을 완주하면 세상에 나만의 싱글 하나를 당당히 쥐어주겠다"는 스승의 약속은 그렇게 현실이 되고 있었다.

◆스펀지의 유연성과 공백의 숙성…기교보다 '자기 목소리'

박기영의 음악적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은 '스펀지 같은 유연성'이다. 20대 소속사 분쟁으로 인한 공백, 30대 임신과 출산, 육아로 겪어야 했던 단절의 시간은 한때 회한이었으나 지금은 가장 깊은 영양분이 됐다.
[서울=뉴시스] 박기영. (사진 = 엘리야 컴퍼니 제공)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그 공백이 없었다면 과연 좋았을까? 아니에요. 그 시간들 덕분에 내면이 자랐고, 타인의 슬픔과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어요. 그 숙성의 결이 고스란히 무대와 음악에 묻어납니다. 평생 음악을 할 거라면 몇 년의 정체기는 아주 사소해요. 꼭 음악으로만 생계를 꾸려야만 훌륭한 음악가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재정적 종속에서 벗어나 있을 때 음악은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그는 입시와 오디션 경쟁에 내몰려 인위적으로 개성을 꾸며내거나 획일화된 창법을 흉내 내는 어린 학생들을 향해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억지로 만들어낸 소리는 결국 보컬의 수명을 갉아먹는다. 서정적이든, 평범하든, 자기 고유의 음색을 긍정하고 지켜내는 것만이 롱런의 유일한 바탕이라는 조언이다.

시대의 파고를 대하는 태도 역시 담대하다. 제미나이, 챗GPT, 클로드, 작곡 AI 수노(Suno)까지 두루 유료 구독하는 그는 기술을 두려워하는 대신 인간의 조건을 되묻는다.

"AI를 올바르게 부리려면 내 안에 축적된 데이터베이스와 생각이 먼저 풍요로워야 합니다. 내 것이 없으면 포털 검색과 다를 게 없죠. 학생들에게도 수노로 곡을 뽑아보고 자신의 작업물과 치열하게 비교해보라고 권해요. 하지만 결론은 하나입니다. 결국 무대 위에서 AI보다 네가 라이브를 더 잘 해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본질입니다."

◆첫 브랜드 공연 '포레스트'…우리말 의성어·의태어로 직조하는 'K-재즈'

올해 종착역이자 가장 굵은 방점은 오는 11월 28~29일 서울 대학로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코튼홀에서 열리는 단독 콘서트 '2026 박기영의 포레스트(FOREST)'로 향했다. 데뷔 28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닻을 올리는 첫 브랜드 공연이다.

동료 뮤지션들이 저마다의 브랜드를 구축할 때 육아와 음악 활동을 병행하느라 분주했던 그는, 중학교 1학년이 된 딸의 "엄마,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응원에 힘입어 비로소 자신만의 무대를 설계했다. 그의 음악적 여정을 곁에서 지켜본 동료들이 "다양한 나무와 계절을 너르게 품어내는 큰 숲 같다"고 건넨 헌사가 공연의 씨앗이 됐다.
[서울=뉴시스] 박기영. (사진 = 엘리야 컴퍼니 제공)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 무대는 그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재즈'라는 새로운 영토의 서막이다. 편성부터 파격적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을 필두로 드러머 이상민, 베이시스트, 그리고 스트링 4중주가 결합했다. 록과 팝의 뼈대였던 기타를 과감히 배제하고, 건반과 현악의 유려한 타현·찰현 사운드로 공간의 여백을 숲처럼 채운다.

레퍼토리 역시 남다르다. 익숙한 대표 히트곡들의 새로운 편곡과 더불어, 내년 상반기 발매를 목표로 작업 중인 재즈 프로젝트의 미공개 신곡들이 첫선을 보인다. 스탠더드 넘버를 관습적으로 리메이크하는 재즈 보컬의 문법을 거부하고, 싱어송라이터답게 강승원의 명곡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단 한 곡만을 정식 허락받아 재해석했을 뿐 나머지는 전부 그가 쓴 신곡들이다.

특히 눈부신 지점은 '언어의 미학'이다. 영미권 재즈의 발음이나 영문 스캣을 답습하는 대신, 우리말 고유의 결을 품은 의성어와 의태어로 즉흥적 리듬을 빚어내는 이른바 'K-재즈(K-Jazz)'를 구현한다. 딸과 함께 서울 5대 궁 투어를 돌며 새삼 깨달았던 한국어의 서정성을 음악적 조형으로 승화시킨 셈이다.

"모든 악기를 컴퓨터와 전자음으로 찍어내는 시대에, 저는 역설적으로 모든 호흡을 리얼 세션의 질감으로 채우려 합니다. 시대와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아날로그의 떨림 속에 영혼이 머문다고 믿으니까요."

나아가 그가 명명한 '포레스트'는 물리적 공연장을 넘어 연대의 플랫폼으로 뻗어나간다. 산불로 상처 입은 폐허나 사막화가 진행되는 몽골 등 나무와 사람의 온기가 절실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노래하고 나무를 심는 공익적 무대로 확장하겠다는 포부다. 홀로 서 있는 나무는 결코 숲이 될 수 없듯, 풀잎과 흙과 벌레가 어우러져 비로소 하나의 숲을 이루듯 말이다.

록으로 데뷔해 클래식 성악, 발라드, 전자음악을 지나 이제 우리말 재즈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박기영. 그는 여전히 결승점을 정해두지 않는다. "노래하다 무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오랜 소원"이라며 맑게 웃는 이 '영원한 현역' 보컬리스트의 세계 속에서, 음악은 변치 않는 아름다움으로 매 순간 새롭게 발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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