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엔터 '구약의 시작' H.O.T. 30주년…아이돌 원형질서 K-팝 유산으로

기사등록 2026/09/06 05:57:20

1996년 9월7일 데뷔…K-팝 산업의 표준 세워

SMP·자작곡으로 완성한 아이돌 진화의 역사

[서울=뉴시스] H.O.T. (사진 = SM엔터테인먼트 제공) 2026.09.0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올해 창립 31주년을 맞은 SM엔터테인먼트의 역사를 성경에 비유한다면 7일로 데뷔 30주년을 맞은 그룹 '에이치오티(H.O.T.)'는 구약의 시작이다. 그룹 '에스파'가 신약의 도래이고, 그 정중앙에서 신약의 세계관을 예고한 '예언서'가 '엑소'였다면, H.O.T.는 K-팝이라는 거대한 산업과 문화의 첫 장을 쓴 창세기이자 모든 법칙이 파생된 원전(原典)이다.

1996년 9월7일 데뷔곡 '전사의 후예'로 세상에 나온 문희준, 장우혁, 토니안, 강타, 이재원 다섯 소년은 '십대들의 승리'(High-five Of Teenagers)라는 팀명처럼 당대 10대의 절망과 분노, 꿈을 직격하며 대중음악사의 흐름을 단숨에 바꿨다. 2001년 해체와 17년 만의 재결합, 그리고 30주년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남긴 궤적은 곧 K-팝의 역사 그 자체다.

◆'아이돌'의 정의를 세우다…시스템과 팬덤의 원형질

1996년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거대한 변곡점이었다. 그해 1월31일 한국 가요계를 뒤흔들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선언했고, 약 7개월 뒤 H.O.T.가 등장했다.

H.O.T. 이전에도 댄스 음악과 청소년의 지지를 업은 그룹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기획사 주도의 시스템 아래 훈련된 '아이돌'의 개념을 확립한 것은 H.O.T.가 처음이었다. 대중음악 평론가인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 겸 글로벌 K-컬처 센터장(한국대중음악상(한대음) 선정위원)은 "프로 경력이 없던 일반인이 연습생 신분으로 들어가 기획사의 트레이닝과 관리 과정을 거쳐 완성된 가수로 데뷔했다는 점에서 현재 아이돌의 정의에 부합하는 최초의 그룹"이라며 "메인보컬과 랩, 안무, 예능감, 대중형과 팬덤형 멤버 등으로 나뉜 포지셔닝은 4·5세대까지 이어지는 그룹 구성의 모범을 제시했다"고 짚었다.

정병욱 대중음악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 역시 "H.O.T.의 의의는 싹트고 있던 요소들을 기획사 주도의 재현 가능한 시스템으로 집약해 K팝의 첫 완성형을 종합적으로 꽃피웠다는 데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뉴시스] H.O.T. (사진 = 솔트 이노베이션 제공) 2026.09.0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무대 아래에서 조직된 팬덤 문화도 이들에게서 출발했다. 상징색인 흰색 풍선과 흰색 우비, 공식 유료 팬클럽 '클럽 H.O.T.', 멤버별 고유 번호와 캐릭터 굿즈, 공연장을 뒤흔든 떼창과 응원법은 오늘날 글로벌 K팝 팬덤의 기본 문법이 됐다. 조혜림 대중음악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는 "H.O.T.의 등장은 단순히 한 팀의 성공을 넘어 한국에서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정립한 사건"이라며 "10대를 문화의 주변부가 아닌 시장과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로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이아림 대중음악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는 "국내 가수 최초 올림픽주경기장 단독 공연, 최다 음반 판매량 등 '최초'와 '최다'의 기록을 세운 선발주자"라며 "멤버별 캐릭터 부여와 SF 콘셉트는 오늘날 K-팝 아이돌의 세계관과 서사 구축으로 고스란히 계승됐다"고 분석했다.

◆사회비판과 키치의 공존…'피조물'에서 '창작자'로의 도약

H.O.T. 음악의 결정적인 특징은 하나의 디스코그래피 안에 공존하는 극단적인 양면성이었다. 학교 폭력을 고발한 갱스터 랩 스타일의 '전사의 후예'와 유아적 키치 및 후킹한 멜로디를 결합한 '캔디'의 대비는 그룹의 폭발적인 대중성을 견인했다.

이들의 음악은 2집 '늑대와 양(Wolf and Sheep)'의 타이틀곡 '늑대와 양', 청소년의 자율성을 역설한 명곡 '위 아 더 퓨처(We Are The Future)'로 이어지며 록, 클래식, 힙합, 오케스트레이션이 결합된 'SM 퍼포먼스(SMP)'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윤미 대중음악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는 "구성 면에서 2집은 다채로운 장르를 완벽히 구현한 최고의 음반"이라고 특기했다.
[서울=뉴시스] H.O.T. (사진 = MBC TV '무한도전' 제공) 2026.09.0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동시에 이들은 '기획된 상품'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깨고 자율적인 창작자로 진화하는 선례를 남겼다. 3집 '레저렉션(Resurrection)'에서 멤버들의 자작곡 비중을 대폭 늘렸고, 1998년 강타가 작사·작곡한 '빛'은 지금까지도 SM의 사가(社歌)이자 희망의 찬가로 불린다.

최승인 대중음악평론가는 "3집을 기점으로 자작곡을 싣기 시작해 5집 '아웃사이드 캐슬(Outside Castle)'에서 전곡을 직접 작사·작곡하거나 프로듀싱하며 기획의 대상에서 주체로 건너갔다"면서 "아이돌이 아티스트로 성장하는 이 서사는 이후 K-팝의 핵심 성장 모델이 됐다"고 짚었다.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참사를 정면으로 다룬 4집 타이틀곡 '아이야!(I yah!)'에 대해 황선업 대중음악평론가는 "모차르트 교향곡 25번과 베토벤 월광 소나타를 차용한 과감한 시도를 통해 절실함과 비장함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며 당대 아이콘의 야심을 각인시킨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김성환 대중음악평론가는 "희망적 메시지를 담은 '위 아 더 퓨처(We Are The Future)'와 멤버들의 창작력이 피어난 3집 '레저렉션'은 아이돌 팝을 10대 보편의 문화로 키워내고 아시아 시장으로 확장하는 든든한 동력이 됐다"고 덧붙였다.

◆한류의 진원지와 비대한 성장의 명암

H.O.T.는 국내 시장에 머물지 않고 국경을 넘은 첫 주자였다. 2000년 중국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연 단독 콘서트는 현지에 거대한 문화 충격을 안기며 '한류(韓流)'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1999년 9월 팝스타 마이클 잭슨 등을 제외하고 한국 대중가수 최초로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 단독 입성하며 대중음악 공연의 물리적 규모도 획기적으로 확장했다.
[서울=뉴시스] H.O.T. (사진 = 토니안 인스타그램 캡처) 2026.09.0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이들이 촉발한 눈부신 팽창 이면에는 가요계의 구조적 편중이라는 그늘도 함께 드리웠다. 이대화 대중음악평론가는 "H.O.T.의 성공 이후 막대한 수익을 좇아 제작자들이 아이돌 시장에 과도하게 몰두하면서 가요계가 아이돌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됐다"며 "K-팝의 기획과 음악이 비약적으로 정교해진 반면, 가요계의 장르적 다양성을 좁히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에서 마냥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30년을 건너온 흰색 물결…'내 편'이라는 영원의 공동체

전성기를 구가하던 H.O.T.는 2001년 2월27일 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끝으로 그해 5월 공식 해체했다. 영원히 지켜지지 못할 것 같았던 재회 약속은 17년 만인 2018년 10월, 같은 장소에서 10만 관객을 운집시키며 현실이 됐다. 이듬해인 2019년 고척스카이돔 공연까지 성황리에 마쳤으나, 상표권 분쟁 탓에 자신들의 공식 이름 대신 풀네임인 '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스(High-five Of Teenagers)'를 내걸어야 했던 굴곡도 겪었다.

그럼에도 팬들에게 H.O.T.는 단순한 유행가가 아니라 지나온 삶의 한 조각이자 불가분의 일부였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주인공 성시원이 그러했듯, 10대 시절 책상과 방 벽을 하얗게 물들였던 팬들은 이제 주부가 되고 직장인이 돼 자녀의 손을 잡고 공연장을 찾는다. 실수를 품고 상처를 보듬으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가수와 팬의 관계는 일종의 무조건적인 '내 편'이자 가족의 형태를 띤다.

지난해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2025 한터 음악 페스티벌' 헤드라이너 무대로 6년 만에 다시 뭉쳤을 당시, 강타는 "다양한 세대의 아이돌들과 함께 서는 무대가 감사하고 뭉클하다"고 밝혔고, 문희준과 토니안은 까마득한 후배 그룹 아이덴티티를 보며 "데뷔 시절 우리 모습이 떠오른다"며 애정을 보였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메기 강 감독이 이들의 오랜 팬임을 자처했듯, H.O.T.가 심어놓은 DNA는 국경과 세대를 건너 글로벌 창작자들에게도 영감을 주고 있다.

30년 전 소년들이 외쳤던 "아 니가 니가 뭔데"의 날 선 외침과 "단지 널 사랑해"의 달콤한 고백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았다. 30년의 세월 동안 흰색 풍선은 디지털 응원봉으로, 10대의 아우성은 성숙한 연대로 형태를 바꾸었지만 이들이 구축한 K-팝의 세계관과 시스템은 지금도 변함없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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