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2020년대 한국인은 2500년 전 동아시아 한반도 지역에 살던 지리적 선조, 혹은 만주나 연해주에 살면서 우리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생물학적 조상들보다 지중해의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적어도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아테네 시민의 후예이고 로마 시민의 자손이다." (본문 중)
신간 '정치의 발명'(글항아리 출간)은 현대 정치를 분석하는 데 두드러진 통찰력을 제공하는 책이다. 저자 조홍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고대의 숨결이 현대 유럽과 한국의 정치 현실에 살아 있음을 구체적으로 포착한다.
고대부터 출발하는 이 책은 애초에 유럽연합(EU)이라는 독특하고도 신기한 정치 실험을 이해하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동아시아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지역 통합을 '유럽은 어떻게 성공시켰을까'라는 질문이 출발점이었다. 유럽연합의 성공 요인을 추적하다보니, 네이션의 특성에서 시작해 크리스천돔이라는 공통 기반, 유럽 킹덤의 네트워크 연결성, 로마의 레스 푸블리카와 그리스 폴리스라는 뿌리에 다다랐다.
그리스가 탁월한 점은 무엇보다 철학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발명했다는 데 있다. 고대는 멀고 깊다. 현대는 빠르고 실험적이다. 둘 사이의 간극에서 통찰력을 얻으려면 가까운 것과 얼마간 거리를 두면서 시야를 확보해야 하는데, 이에 따라 저자는 거대 역사를 조망하고자 방대한 정치 역사를 아우른다.
저자는 유럽의 정치 문법을 고대의 폴리스와 레스 푸블리카, 중세의 크리스처니티와 킹덤, 근대의 네이션과 현대의 코스모폴리스 등 6가지 역사적 유형(타입)을 통해 분석한다.
언어의 문법에서 형태, 통사, 음운과 같은 기본 규칙을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어족이 존재하듯, 유럽 정치 문법은 이 여섯 타입이 조합돼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 현실은 워낙 복잡다단한 탓에 모델로 환원될 수 없는데, 타입을 통한 분석은 이론적 추상성을 인정하면서도 구체적 역사 경험을 드러내준다.
"유럽 문명의 기원을 따질 때 아테네, 로마, 예루살렘은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들은 모두 고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기원전 5세기경이 되면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문화로 발전한다. (중략) 로마는 왕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레스 푸블리카라는 독특한 정치 문법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뚜렷한 정치 문법의 변화를 발견하기는 어려우나, 유일신 종교에 기초한 유대 민족의 정체성은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82쪽)
"그리스가 시민 전체가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고 투표하는 직접 민주주의라는 순수한 정치 문법으로 신선하게 다가온다면, 로마는 매년 두 명의 집권자를 선출하는 철두철미하고 참신한 공화주의의 정치 문법을 선보였다." (118~119쪽)
이 책은 정치의 발명과 그로부터 이어진 세계에 대해 논하지만 전체를 지탱하는 줄기는 정치의 바탕에 깔린 철학과 문화다. 정치는 언어로 상대를 설득하는 세계다. 또 인간이 아닌 법에 시민이 복종하도록 만든 추상의 세계다. 따라서 정치 제도의 발전은 사상 및 언어의 발전과 나란히 간다.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기보다는 추상적인 법에 복종한다는 생각,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사고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이었다. (중략) 달리 말해 고대 그리스에는 폴리스에 대해 고민하는 정치학이 존재했기에 민주주의라는 문법이 만들어졌고, 덕분에 후대는 민주주의를 수용·변용하거나 거부하면서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현실 정치가 정치학을 통해 개념화됐고 그 덕분에 하나의 문법으로 정리되면서 후대로 계승되었다는 의미다." (4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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