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인, 권리 옹호, 문화예술, 인식 개선 직무
유엔장애인권리협약 홍보 등 가치 생산하는 노동
"여기 떠나면 갈 곳 없어"…맞춤형 일자리 보장 필요
[서울=뉴시스]한이재 기자 = #출입구 옆 벽에는 '모두를 위한 존중의 약속'이라 적힌 흔히 대자보 크기의 종이가 붙어 있었다. 노동자 임현수씨가 이를 떼 강당 앞으로 가져갔다. 3열 책상에 앉은 30여명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센터 내 모든 사람이 함께 만든 약속을 한 달에 한 번 돌아 보고 수정하는 날이다. 서로 의사 소통을 기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일종의 안전 규칙이다. 팀장이 마이크를 잡고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물었다. 임씨는 서로의 좋은 점을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다고 반성했다.
#마이크를 잡은 영화감독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영상 편집을 알려주고 있었다. 미음으로 둘러앉은 16명은 책상 위 휴대전화와 강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초상권이나 음악 저작권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두 달 뒤 열릴 스마트영화제를 위한 수업이었다. 이미 촬영을 끝냈다는 임씨는 열심히 편집 중이라 말했다.
지난 10일 뉴시스는 경기 안산단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노동자 임현수(25)씨를 만났다.
임씨와 동료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치 생산 노동을 하는 중증장애인이다. 그 노동은 조금 '특별'하다. 최근 대선을 앞두고 사전투표소가 휠체어로 접근 가능한지 관찰했고 작년에는 보치아 대회에 나가 1등을 하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발달장애를 가진 임씨는 첫 직장이던 시설 보호작업장에서 휴지나 마스크팩 포장을 하며 월 16만원을 받았다. 탈시설 후 참여하게 된 이곳에서는 금요일을 빼고 주중에 하루 4시간씩 노동하고 대가로 80만원 가량을 받는다. 임씨는 약간은 쑥스러워하며 주로 맛있는 걸 사 먹는 데 월급을 사용한다고 했다.
◆장애인도 시민…"이것도 노동이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는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권리 옹호, 문화예술, 인식 개선 직무를 제공한다. 사회참여 촉진, 노동권 보장, 유엔장애인권리협약 홍보를 통한 인식개선을 목표로 한다. 임씨는 "보호작업장과 공공일자리가 완전히 다르다"며 "처음에는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고 털어놨다.
노동은 생존에 필수 불가결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구직조차 쉽지 않다. 특히 '중증'장애인에게 권리중심 일자리가 소중한 이유다. 임씨를 비롯해 동료들은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 장애인 자립에 탈시설과 일자리가 중요한 이유다.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시설에 갔던 임씨는 시설을 "답답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저희도 인권은 중요하잖아요"라고 말했다.
탈시설 26개월 차 '대선배'인 임씨는 경기 안양에서 태어났다. 이사 등 여러 사정으로 경기 광주, 화성, 군포를 돌아다녀야 했다. 일자리 덕분에 단원에 뿌리를 내린 셈이다. 특수학교에서 전공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임씨는 이곳에서도 가끔 우쿨렐레와 피아노를 연주한다.
시설 밖으로 나와 너무 만족한다는 그는 자신처럼 탈시설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지역 사회로 가면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으니까 좋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사가 되어 다른 이의 탈시설을 돕는 게 미래 목표다.
임씨가 근무하는 안산단원장애인자립재활 센터에는 중증장애인 30명이 공공일자리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면접을 거쳐 채용된 직원이다. 탈시설 유무, 여성 가장,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이 가점 요소다.
임씨는 탈시설하며 공백기 없이 바로 취업한 운이 좋은 사례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3년 기준으로 한국에는 1529개의 거주 시설에 2만7352명이 살고 있다.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에 따르면 같은 연도 기준 권리중심 일자리는 10개 지자체의 1350명뿐이라 턱 없이 부족한 상태다.
장애인 맞춤형일자리 사업은 일자리 제공으로 장애 당사자가 지역사회로 자립하기 위한 기반 마련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이를 수행하는 안산 센터는 운영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대표적으로 퇴직금을 줄 수 없다. 장애인 노동자만이 아니라 전담인력이나 근로지원인 역시 마찬가지다. 연말이 되면 센터는 이들과 계약을 종료해야 한다.
또 앞으로 매년 신규 노동자를 30% 채용하라고 안내받았다. 하지만 예산이 더 늘어나지는 않았다. 센터로서는 신규 채용을 하면 기존 노동자가 실직할 수 있어 난처한 상황이다.
◆노동권은 헌법상 기본권…"언제 없어질지 몰라"
연속성 없는 일자리에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은 고용 불안을 호소한다.
서울에서는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이 지난해 5월 23일 사라지며 7월 말 노동자 419명의 근로계약이 종료됐다. 서울시의회는 지난해 4월 26일 '서울특별시 사회서비스원 설립 및 운영 지원 등에 관한 조례 폐지 조례안'을 통과시켰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5월 20일 조례를 공포한 데 따른 것이다.
누림에 따르면 2025년 초 기준 경기도에서 권리중심 일자리 수행기관은 44개로 중증장애인 780명이 참여하고 있다. 경기도에서도 권리중심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그 영향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안산단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김지섭(35)씨는 "언제 없어질지 모르고 또 이미 없어진 사례가 있기에 노동자로서는 불안하다"며 "딱 법으로 정해져 있으면 노동자는 고용 불안감이 좀 없어지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사회서비스원 설치 의무화를 담은 법률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또한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2월 23일 대표발의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지원 특별법안은 6개월이 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전문가는 권리중심 일자리가 안정적인 일자리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언한다. 장애인 노동권을 공공영역이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지혜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권리중심 일자리에 대해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맞춤형 일자리로서 비장애인에게도 의미가 크다"며 "노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근본적인 산업구조가 변화하는 시대에 던져볼 법하다"고 설명했다.
김기룡 중부대 특수교육과 교수는 "사회적 가치가 있는 직업임에도 사업이 종료되고 다시 시작되는 사이에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며 "국가가 진취적으로 무기 계약직이나 정규직으로 전환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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