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이슈 한국판 10주년 기념 앨범
문영수·오현석·서명진·안연호 씨 참여
프로듀서 겸 DJ 말립, 총괄 프로듀서
노래의 화음(和音)은 물리적인 음으로만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 발매된 '빅이슈' 창간 10주년 기념 앨범 '시트(SEAT)'는 마음과 마음이 버무려져 만든 인간적 화음을 들려준다.
DJ 겸 프로듀서 말립(Maalib·고재경)이 총괄 프로듀싱을 맡아 '빅이슈 판매원'(빅판) 문영수(60)·오현석(50)·서명진(48)·안연호(51) 씨가 느낀 것들을 음악으로 옮겨냈다.
"오가는 수많은 시선들과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 / 여기 어디쯤 머물러있는 내 하루엔 하늘 한 바람뿐이네 / 오늘도 나는 서 있는 남자"(서 있는 남자)
문영수 씨가 써온 사연을 말립과 장석훈이 다듬고 말립·박준우·구영준이 멜로디를 붙인 '서 있는 남자'에는 문씨가 가창자로도 참여했다. 가수 장석훈이 피처링으로 도왔는데, 문씨의 고독함이 담백하게 배어 있다.
최근 말립 소속사 비스츠앤네이티브스(BANA) 작업실에서 만난 문 씨는 "이번 앨범 작업이 빅이슈를 판매하면서 느낀 감정을 글과 노래로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거리의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반갑습니다. 빅이슈 한권에 5000원"이라고 외치는 빅판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역사(驛舍)의 시간'의 가사 역시 문 씨와 말립이 함께 썼는데 초연함이 인상적이다.
"꽃이 핀다고 너무 기뻐하지 말아요 / 꽃이 진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 하늘이 맑다고 들뜬 마음 감추지 못하거나 / 하늘이 검다고 너무 우울해하지 말아요"
홈리스(부정적 어감을 지닌 '노숙인'의 대체어)가 판매하는 대중문화 잡지 '빅이슈'는 1991년 영국에서 창간했다. '빅이슈 코리아'는 지난 2010년에 창간, 홈리스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빅판으로 나선지 9개월이 된 안연호 씨는 홍대입구역 2번 출구를 지키고 있다. 원래 시골에서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지었는데, 신식 기계를 따라가지 못한 안씨의 농가는 형편이 어려워졌다.
부모와 형제에게 손 벌리기를 싫어했던 그는 이후 인력 사무소 등을 드나들며 근근이 생활에 왔다. 서울에 와 노숙 생활을 거쳐 빅이슈 판매원으로 나섰다. "신간이 나오는 때에 맞춰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들게 감사하다"고 했다.
"재경 피디님을 뵙고 처음에는 힙합음악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하. 저는 원래 트로트곡을 좋아해서요. 그런데 음악이 너무 좋더라고요. 가사는 속상한 일이 있었던 어느 날을 떠올리면서 쓴 거예요."
고속터미널 역 8번 출구 앞을 맡고 있는 오현석 씨는 직접 작사한 곡은 없다. 하지만 여러 곡에서 코러스를 맡았고 '서 있는 남자'에서는 내레이션을 담당하기도 했다. "마치 제가 가수가 된 것 같았어요. 하하. 참 만족스런 작업이었습니다."
이처럼 빅이슈는 판매원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문영수 씨는 "단지 잡지를 판매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게 만들어 주세요. 자활을 위한 프로그램도 많아요. (고시원 생활을 하다) 임대주택으로 옮겨가면서 느낀 건 발전된 삶의 가치에요. 그리고 그것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돼 주신 건 독자분들이죠. 너무 힘들 때도 책을 사주는 분들이 계시면, 그 힘듦이 녹아버려요."
'빅이슈' 한국 초창기부터 판매원으로 함께 일해온 오현석 씨는 현재 고속터미널역 앞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처음에 2주만 판매원 생활을 하면 "고시원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빅판을 시작했다. 이후에 희망을 갖고 한 단계 씩, 한 단계씩 앞으로 나아갔다. "빅이슈가 제 인생을 바꿔줬죠. 올래 초에는 임시 카페를 열어 커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오현석, 문영수, 서명진 씨는 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했다.
강남역 1번 출구 앞을 지키는 서명진 씨는 말립, 주럼퍼그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노래인 '러버'의 가사를 썼다. "하루를 7년같이 7년을 하루같이 / 날 바라보는 나무같이 넌 내게 안식처였지"라고 직접 노래도 했다.
무엇보다 서씨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 취향을 뽐냈다. JTBC 크로스오버 그룹 오디션 '팬텀싱어3'에서 우승한 '라포엠'을 비롯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퀸', 미국 팝밴드 '마룬파이브', 세계적 K팝 그룹 '방탄소년단', 급부상 중인 걸그룹 '오마이걸' 등이다. 특히 솔로 활동도 한 오마이걸 멤버 유아는 지난 4월 말 '빅이슈' 226호 표지모델로 나서 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서씨는 처음에 빅이슈를 판매하기를 꺼렸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홈리스라는 걸 인증하는 조끼를 입고, 얼굴까지 팔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기꾼에 속아 대포통장에 명의를 내줬다 곤혹스런 상황에 처하기도 했던 그는 지난 2013년 빅이슈 사무실을 스스로 찾아갔다. 이후 임대주택에도 들어갔다.
그 역시 독자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특히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꾸준히 빅이슈를 구입해준 학생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서울대 인류학과 3학년생이다. "매번 찾아온 그 친구에게 정말 감사함을 표하고 있어요. 그렇게 빅판으로 나선 이후 가족과 화해하고 제주 여행도 함께 갔어요. 저희 여행기가 빅이슈에 실리기도 했죠. 겨울이면 저희에게 따듯한 옷도 나눠주시는 분들에게 이번 기회를 빌려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달해주고 싶어요."
처음 빅이슈 코리아에 이번 앨범을 제안한 말립은 고3 시절 TV 프로그램을 통해 빅이슈의 출발을 목격한 이후 이 잡지에 대해 꾸준히 지지와 애정을 보내왔다. 10주년을 기념해 자신이 빅이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처음에는 1곡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빅판들의 글과 사연을 한곡에 담기에는 아까워서 7트랙을 만들어냈다.
"이 앨범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문영수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이 실마리가 됐어요. 처음엔 '사적인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글이 큰 도움이 됐죠."
"제일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좋은 음악을 만들 것인가'와 '선생님들이 작업실 환경에 어떻게 하면 잘 적응하실까'였어요. 개인적으로는 선생님들을 응원하기 위한 숙원 사업이었는데, 이제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난이도가 높았던 작업인데, 만족도가 나름 좋아요."
제이 디 사우더의 '유 아 온니 론리'와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문영수), 진성의 '보릿고개'와 최성수의 '해우'(안연호),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와 김진호의 '가족사진'(서명진), 양수경의 '당신은 어디 있나요?'(오현석) 등 저마다 다른 음악적 취향을 하나로 뭉쳐낸 것도 말립의 힘이다.
마지막으로 네 빅판에게 꿈을 물었다. "오늘을 잘 살아가고 내일의 떠오르는 태양을 잘 맞이하는 것"(문영수), "코로나19로 힘들어졌는데 빅이슈를 통해 더 자립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전념하는 것(안연호), "보일러 취급 기능사 자격증을 따는 것"(오현석), "작은 카페를 차려 인생의 3막을 여는 것"(서명진) 등의 답이 돌아왔다.
무엇보다 문영수 씨가 캘리그래피로 썼던 글귀라며 들려준 말이 이들의 심정을 반영하는 듯했다. "내가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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