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전 중원대 교수, 판심 흑어미 한자 공개
목판본 판각자 성·이름 흑어미에 새겨 넣은 듯
[괴산=뉴시스] 강신욱 기자 = '실명제'라고 하면 1993년 8월 전격 시행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금융실명제'를 우선 떠올리지만, 이 밖에도 정책실명제, 부동산실명제, 공사실명제, 인터넷실명제, 기사실명제 등 다양하다.
조선시대에도 실명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러나 그리 많지 않다.
조선시대 성을 쌓을 때 축성 구간별로 부역을 담당한 현과 군 책임자의 이름을 주춧돌에 새겼다. 일종의 공사실명제였다.
이와 함께 고서 제작에도 실명제가 더러 있었다.목판본에 '판각자 실명제'를 적용한 예다.
이상주(67) 전 중원대 한국어교육문화학과 교수가 31일 처음 공개한 '서전대전(書傳大全)'과 '서전대전언해(書傳大全諺解)' 두 권의 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두 고서의 판심(版心) 흑어미(黑魚尾)에는 한자와 문양, 기호를 음각한 사실을 이 교수가 확인했다.판심은 한문고서를 인쇄할 때 면 중심 부분이다. 이 부분을 경계로 판이 반으로 접혀 책장의 앞뒤 쪽을 이룬다.어미는 이 판심의 위쪽과 아래쪽에 새긴 물고기 꼬리 모양이다. 이 중간에 책이름과 권차(卷次), 면수(장차)를 새긴다.
어미는 흰 바탕의 백어미, 검은 바탕의 흑어미, 꽃무늬가 들어간 화문(花紋)어미 등으로 나뉜다.
이 교수가 공개한 두 고서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흑어미 안에 새긴 한자다.
1865년(조선 고종2) 영변부(현 북한 평북 영변군)에서 간행한 '서전대전' 목판본 권10 23장과 24장 판심 위아래와 '서전대전언해' 권2 69장과 70장에는 '仁(인)'이란 한자가 위아래 흑어미에 새겨졌다.
이 교수는 "두 책은 간행연도와 판각한 사람이 같다고 보아야 한다"며 "인(仁)을 약칭으로 하는 각수(刻手)가 책 글자를 새기는 업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서전대전 권10 49장과 50장, 서전대전언해 권2 55장과 56장에는 '戒(계)', 서전대전 권7 31장에는 한글 '견'이 보이기도 한다.
이 밖에도 '尹(윤)', '令(령)', '双(쌍)', '湜(식)', '卞(변)' 등의 한자가 나온다.
이 교수는 "어미는 공간이 작아 거기에 성이나 이름 중 한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두 고서의 어미에는 일엽(一葉·화문 수 1개)과 이엽 등 다양한 화문어미 문양도 새겨졌다.
이렇게 판심 흑어미에 한자와 문양을 새겨 넣은 이유에 대해 이 교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달라지는 문양을 보면서 잠시 머리를 식히게 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책장을 넘기면서 그 책을 만들기 위해 나무판에 글씨를 새긴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을 가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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