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사실 전면 부인…법정 출석 '진정성'에 의심
재판장 오는 4월8일 공판준비기일 열기로
사과없는 전 씨에 오월단체·시민들 '분노'
【광주=뉴시스】구용희 기자 = 전두환(88)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39년 만에 광주 법정에 섰다. 내란죄 등의 혐의로 1996년 형사 법정에 선지는 23년 만이다.
전 씨는 신뢰관계인 자격으로 동행한 부인인 이순자(79) 씨와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아 재판에 임하다 몇차례 고개를 떨구는 등 졸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법정에 들어서기 전에는 '5·18 발포명령과 광주시민 사과'에 대해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왜 이래" 라며 신경질적 반응을 드러냈다.
전 씨의 변호인은 재판 관할지 위반을 재차 주장하며 재판장의 판단을 바랐다. 동시에 '1980년 5월 헬기사격이 존재했으며, 전 씨가 이를 알고도 회고록을 통해 고 조비오 신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는 검찰의 공소사실도 전면 부인했다.
◇ 5·18 39년 만에 법정에 선 전두환씨
광주지법 형사8단독(부장판사 장동혁)은 11일 오후 2시30분 법정동 201호 대법정에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 씨에 대한 심리를 열었다.
지난해 5월 기소 이후 10개월 만에 피고인 전 씨가 참석한 사실상의 첫 재판이다.
전 씨는 재판 시작 1분 전 부인 이 씨와 함께 재판장에 들어섰다.
재판장은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방청객들에게 협조를 당부했다. 전 씨는 두 눈을 감고 재판장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어 재판장은 전 씨에게 진술거부권을 고지하고 인정신문에 나섰다.이 과정에 전 씨는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법원은 미리 준비한 '헤드셋'(청각보조장치)을 전 씨에게 건넸다.
법원 직원 등의 도움으로 헤드셋을 착용한 전 씨는 재판장이 다시한번 진술거부권을 고지하고 연령과 주소를 확인하자 그제서야 "예. 맞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재판에 검사는 모두 4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전 씨 사건을 수사한 전·현 광주지검 소속 검사들이다.
검사들은 미리 준비한 화면 자료를 이용해 전 씨의 공소사실을 낭독했다.
이 과정에 전 씨는 부인 이 씨와 자리를 바꿔 앉기도 했다. 피고인석 모니터 화면이 이 씨 앞에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 씨는 화면 속 자신의 공소사실과 검사를 번갈아 보며 눈을 감기도 했다.
검사의 공소사실 낭독에 이어 피고인 모두진술 절차에 이르자 전 씨의 변호인은 일어서 발언을 이어갔다.
변호인은 먼저 재판 관할지 위반 설명에 집중했다. 광주에서의 재판이 위법하다는 그동안의 주장을 되풀이 한 것이다.
오랜시간 변호인의 진술이 이어지자 전 씨는 눈을 감고 꾸벅꾸벅 왼쪽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 사이 전 씨의 변호인은 몇가지 근거를 들며 전 씨의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양 측의 의견을 청취한 재판장은 증거 정리를 위해 공판준비기일을 한 차례 진행하기로 했다. 오는 4월8일 오후 2시 관련 재판을 열기로 했다.
재판이 끝날 무렵 부인 이 씨는 검사와 대화를 나누다 편지봉투 하나를 재판장에 전달했다.
재판장은 이 편지가 "재판부에 당부하는 사항, 재판에 임하는 느낌 등을 적은 글로 이해하겠다"며 오후 3시45분께 재판을 마쳤다.
◇ "왜 이래" 신경질적 반응도
전씨는 법정에 들어서기 직전 "광주시민에게 한 말씀 해달라. 발포 명령을 부인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엔 "왜 이래?"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광주시민에 사과할 마음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인상을 쓰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오월단체는 "시민 학살로 권력을 빼앗고 죗값을 치르지 않았던 전 씨의 뻔뻔함이 39년간 이어졌다"고 비판했다.
◇ 오월단체 사과 촉구
5·18 역사 왜곡 처벌 광주운동본부는 이날 오후 광주지법 앞에서 전씨 형사재판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씨는 학살 책임을 인정하고 광주시민에 즉각 사죄하라. 역사 앞에 즉각 회개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알츠하이머, 독감 등을 이유로 재판에 불출석하며 의도적으로 재판을 지연시켰지만 멀쩡하게 골프장에 출입한 사실이 밝혀져 국민의 분노를 샀다"면서 "더 이상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민주주의를 압살한 전 씨가 39년이 지나 잘못을 뉘우치고 광주시민에게 사죄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했다"면서 "하지만 전 씨는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을 부정하고 자신을 '씻김굿 제물'이라는 망발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5·18 당시 군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사격을 한 사실은 조비오 신부 뿐만 아니라 수많은 광주시민들에 의해 목격됐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국방부 헬기사격진상조사위원회를 통해서도 공식 확인됐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씨는 이를 부인하고 변명과 회피로 일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 조비오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는 "39년 만에 광주 법정에 선 것은 역사적 일이다"면서도 "재판을 통해 전 씨의 사죄를 받고 진상규명의 출발점으로 하려 했지만 이날 재판에서는 변호인의 '아전인수'격 변론만 듣게 돼 실망했고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 법원 안팎서 항의 이어져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재판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전 씨의 차량 행렬이 법원 밖으로 나오면서 일대는 10여분 간 혼란을 빚었다.
오월 단체 회원 등은 전 씨 차량 앞을 가로막아서며 '책임을 인정하라. 사과하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전 씨가 탄 차량은 경찰의 보호 속에서 항의하는 시민 사이를 빠져나갔다.
앞서 재판이 끝난 뒤 대기중인 차량에 오르려던 전 씨 부부는 모여든 오월단체 회원과 시민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재판 전후에도 광주지법 안팎에서 거센 항의가 이어졌지만, 전 씨의 사과는 없었다.
조진태 5·18 재단 상임이사는 "전 씨가 재판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역사의 피해자 앞에서 결자해지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촉구했다.
전 씨는 2017년 4월에 발간한 회고록을 통해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던 만큼 조비오 신부가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것은 왜곡된 악의적 주장이다. 조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고 주장, 고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지난해 재판에 넘겨졌다.
조 신부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시민수습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같은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오월 단체와 유가족은 2017년 4월 전 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며, 검찰은 수사 끝에 전 씨를 불구속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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