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인간관계 고민 털어놔…"모르는 상대라 솔직해져"
온기우체국, 한 달 편지 3000통 접수…20~30대 70%↑
전문가 "정서적 위안 얻는 통로…지나친 의존 경계해야"
서울 성동구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하모(28)씨는 자신의 고민과 불안을 메일에 담아 보냈다. 수신인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익명의 상대였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거나 상대방의 반응을 걱정할 필요 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메일을 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상대의 경험담과 응원의 말은 하씨에게 또 다른 위로가 됐다. 현실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답장을 받는 과정에서 스스로 위안이 됐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고민을 익명의 타인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주고받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메일과 편지로 시작된 이러한 교류는 일대일 소통을 넘어 온라인 모임과 비영리단체 활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모습이다.
1일 뉴시스 취재에 따르면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에서는 익명 편지 교환 모임이 여러 개 개설돼 운영되고 있다. 지난 22일 기준 15개가 넘는 모임이 활동 중이었으며, 한 모임의 참여자는 351명에 달했다.
모임 참여자들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설명하거나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는 부담이 적고 평소 드러내기 어려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현재까지 익명의 두 사람과 편지를 교환했다는 하씨 역시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하씨는 "부모님께 고민을 이야기하기에는 죄송한 마음이 앞섰고 이미 취업한 친구에게는 처한 상황과 비교되면서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며 "해결책을 구한다기보다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상대방이 나를 모르니 평소에 꺼내지 못했던 말도 자연스럽게 적게 됐다"며 "현실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하씨는 앞으로도 익명 편지 교환을 이어갈 계획이다.
온기에 따르면 한 달 동안 접수되는 편지는 약 3000통에 이른다. 이 가운데 70% 이상은 20~30대 청년들로부터 온 편지로, 주로 인간관계와 진로 등에 관한 고민이 담겼다.
지난 2021년부터 온기우체부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최유민(27)씨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할 힘이 없어요' '지쳤어요'처럼 무기력함이 담긴 편지가 많아졌다"며 "답장으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 또한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는 "답장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 실패와 힘들었던 경험을 적게 된다"며 "답장이 과거의 내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도 전했다.
또 다른 온기우체부 자원봉사자 이혜빈(29)씨도 "답장을 쓰다 보면 그때의 나를 마음 깊숙한 곳에서 꺼내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며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익명 편지가 가까운 사람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고민을 털어놓고 정서적 위안을 얻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만큼 타인의 평가나 관계에 대한 부담을 덜어줘 자신의 감정을 보다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자신을 잘 아는 사람보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에게 오히려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며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다 드러내지 못하지만 익명의 상대에게는 부담 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도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이 심해지는 사회에서 대면 관계에 부담을 느끼는 청년들에게 익명 편지는 정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익명의 편지를 쓰고 받는 것이 고립된 곳에서 사회로 돌아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익명의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상대방의 조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곽 교수는 "위로를 받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며 "익명의 상대가 전하는 견해를 무조건 받아들이기보다 스스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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