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공대·숭실대, 원자층 '선택적 기울기' 규명…사이언스 게재
전류 방향 따라 저항 달라져…초박막 절연체 누설전류도 억제
새 원소 없이 배열만 바꿔…반도체 절연막·열센서 활용 기대
[서울=뉴시스]윤현성 기자 = 똑같은 요리 재료를 쓰더라도 넣는 순서를 바꾸면 맛과 완성도가 달라진다. 국내 연구진이 이 원리를 원자 단위까지 끌어내려 완전히 새로운 신소재 설계법을 제시했다.
새 원소를 섞지 않고 원자층을 쌓는 순서만 바꿨다. 그 결과 금속에는 전기의 방향성을 더하고, 얇은 절연체에서는 전기가 새는 현상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포항공대 이대수·이길호·최시영 교수와 숭실대 박세영 교수 공동연구팀은 원자층의 조성 배열을 정밀하게 설계하는 '선택적 원자 기울기' 원리를 규명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됐다.
◆새 원소 넣지 않고 원자 '쌓는 순서' 변경…기존 소재 장점 지키며 신기능 구현
새로운 기능을 가진 소재를 만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새로운 원소를 섞거나 기존 원소의 비율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기가 잘 흐르거나 높은 안정성을 갖는 등 원래 재료가 지닌 장점까지 약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연구팀은 원소 자체를 바꾸는 대신 원자층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결정 크기에 영향을 주는 원자의 비율을 층마다 조금씩 다르게 배치했다. 한쪽에는 큰 원자를 많이 배치하고 반대쪽으로 갈수록 작은 원자를 쌓았다. 색상이 서서히 변하는 '그라데이션' 효과와 비슷하다.
원자 크기가 다르면 층마다 받는 압력이 달라진다. 이 미세한 차이가 쌓이면서 원자가 한쪽 방향으로 치우쳤다. 결국 재료 내부에 전기적 방향성(극성)이 새로 생겨났다. 극성이 만들어지면 외부 자극에 반응할 수 있어 메모리와 센서 등 다양한 소자로 활용이 가능해진다.
연구팀은 원자층이 한 층씩 자라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제작했다. 이후 최고 성능의 전자현미경으로 분석해 설계대로 원자 비율이 층마다 달라진 점을 최종 확인했다.
연구팀은 전기가 잘 흐르는 금속 박막에도 이 설계법을 적용했다.
그 결과 금속 본래의 성질은 유지됐다. 동시에 전류가 흐르는 방향에 따라 저항이 달라지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원자를 쌓는 방향을 반대로 뒤집자 저항의 방향도 함께 뒤집혔다. 제작 단계부터 원하는 전기적 방향성을 마음대로 줄 수 있게 된 셈이다.
아주 얇은 절연재료에서도 뛰어난 효과가 나타났다. 반도체 절연막은 얇을수록 좋지만, 너무 얇아지면 전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누설전류' 문제가 생긴다.
연구팀은 약 5나노미터(㎚) 두께의 초박막 절연재료에 같은 원자 배열 방식을 적용했다. 이를 통해 전기 에너지를 저장하는 능력은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면서도 누설전류를 크게 줄이는 데 성공했다.
원자층마다 극성의 세기가 달라지면서 재료 내부에 전자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전기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현상을 억제할 수 있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온도 변화에 대한 반응도 크게 향상됐다. 연구팀이 만든 박막은 비슷한 두께의 기존 비교 재료보다 온도 변화를 전기 신호로 바꾸는 능력이 약 100배 높게 나타났다. 작은 온도 변화도 비교적 큰 전기 신호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원자를 쌓는 방향을 뒤집으면 온도 변화로 만들어지는 전기 신호의 방향도 함께 바뀌었다.
◆'새 물질' 찾은 게 아니라 '새 설계법' 제시…차세대 반도체 등 활용 기대
이번 연구는 특정한 고성능 신소재 하나를 발견했다기보다 재료를 설계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는 새로운 기능을 얻기 위해 '어떤 원소를 넣을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면, 이번 연구에서는 같은 원소를 사용하더라도 '어떤 순서로 쌓을 것인가'가 재료의 기능을 결정하는 새로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특히 전기가 잘 흐르는 금속과 전기를 막는 절연체처럼 성격이 완전히 다른 재료에서 같은 원리가 작동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연구진은 이번 원리가 전류 방향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전자소자와 차세대 반도체용 초박막 절연막, 적외선·열 센서, 주변의 열을 전기로 바꾸는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 등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향후에는 자성체와 초전도체 등 다른 물질로도 연구를 확대할 계획이다. 원자 배열을 통해 기존의 자기적·전기적 성질과 극성을 동시에 구현하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양자적 특성을 갖는 소재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연구를 총괄한 이대수 교수는 "새로운 원소를 더하지 않고도 원자를 쌓는 순서만 바꿔 재료의 원래 장점은 살리면서 새로운 기능을 더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며 "앞으로 이 방법을 자성체와 초전도체 등 더 다양한 물질로 확장하고, 초박막 절연막과 열 센서 등 실제 소자로 구현하는 후속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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